이보현 슈콤마보니 대표


하이힐은 꽤나 자주 여자의 자존심에 빗대어지는 ‘물건’이다. 10cm가 넘는 힐 위에 올라섰을 때 늘씬해 보이는 각선미가 주는 만족감은 발이 느끼는 피로감을 밀어내고도 남는다. 국내 디자이너 슈즈 브랜드 1호라고 불리는 ‘슈콤마보니(suecomma bonnie)’는 여성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한국 슈즈의 자존심을 끌어올렸다. ‘한국의 지미추’라 불리는 하이힐 마니아 이보현 슈콤마보니 대표는 아직도 양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CEO Interview] ‘한국의 지미추’, 화려한 힐로 세계를 딛다
2003년 2월 서울 청담동에서 슈즈 40켤레로 론칭한 ‘슈콤마보니’는 시작부터 서울 강남 여성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하루에 두 켤레만 팔려도 좋겠다고 했던 구두는 일주일도 안 돼 동이 났고, 주문을 해도 한 달은 기다려야 할 판. 33㎡ 남짓한 매장은 하도 북적거린다고 해 ‘청담동 만원버스’란 별명까지 붙었다.

고작 40켤레로 시작했던 브랜드는 10년이 지난 지금은 국내 매장만 15개, 해외 19개국 50개 이상의 편집 숍과 백화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여배우들의 레드카펫 드레스 아래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했던 슈콤마보니는 ‘여배우 신발’ 또는 ‘연예인 신발’이란 애칭을 얻으며 종종 ‘한국의 지미추’에 빗대지기도 한다.



드디어, 파리 프렝탕 백화점 입성

“자존심이 상하기는요. 오히려 과찬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지미추(Jimmy Choo)’나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은 구두 제작의 전 공정을 하는 전문가로 장인정신을 가진 디자이너들이죠. 저 같은 경우엔 제작 과정에 대한 이해를 하고 디자인을 하지만 실제로 만드는 건 기술자들이 하니 스타일리스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 더 이상 지미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미추는 여전히 전 세계 여성들이 사고 싶어 하는 슈즈예요. 어떻게 보면 지미추는 제 비즈니스 롤 모델이랄 수 있어요.”

프랑스 파리 출장에서 갓 돌아온 이보현 슈콤마보니 대표는 내년도 SS(봄·여름) 컬렉션 준비에 벌써 착수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저 ‘바쁘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그 결실들이 너무 달콤하다. 지난해 12월엔 버킷리스트 상위에 있던 파리 프렝탕백화점의 문턱을 넘었다.

“패션 하는 사람으로서 꿈을 이뤘다고 할까요. 정말 작은 코너지만 너무나 기뻤고, 영국 헤롯백화점에서도 지난해 한 달 동안 프레젠테이션 쇼를 하며 슈콤마보니를 선보였어요. 5월 19일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아시아 패션 익스체인지에서 FNN(패션 포털)과 함께 싱가포르 셀레브리티들을 초대해 프레젠테이션 쇼를 가질 예정이에요. 얼마 전 서울패션위크에서 슈콤마보니를 본 그쪽 관계자들이 초청을 한 거죠.”

슈콤마보니는 국내 슈즈 브랜드로는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2010년부터 서울패션위크에서 단독 쇼를 해오고 있다. 의류가 주인공인 패션 쇼 무대에서 ‘들러리’가 돼 왔던 슈즈가 주인공으로 탈바꿈된 쇼에는 슈즈에 의한, 슈즈를 위한 크리에이티브한 퍼포먼스가 동반됐다. 이번 싱가포르 쇼 역시 서울패션위크를 통해 성사된 일. 그런데 슈콤마보니의 해외 시장 진출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론칭 다음 해인 2004년 일본을 필두로 유럽, 미국 등으로 유통망을 넓혔던 것. 국내 단독 숍들조차 자리를 잡기 전이었다.

“뭐, 한 마디로 무식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죠.(웃음) 슈콤마보니를 론칭할 때 파리 페어에 나가서 오더를 받으면 참 좋겠단 생각을 했었죠. 파리에 진출한 지 6년 반 정도 됐는데 처음엔 혼자 샘플 싸들고 가서 부스에 프랑스어 통역할 사람 한 명만 불러 두고 영업을 했어요. 뉴욕으로 갈 때도 혼자였고요. 기차 타고 이동하며 인보이스를 만들었다니까요. 하하하.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겁도 없고 무식했죠. 오직 꿈 하나 갖고 달려갔었는데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던 것 같아요.”
[CEO Interview] ‘한국의 지미추’, 화려한 힐로 세계를 딛다
남성복 디자이너에서 슈즈 디자이너로

슈콤마보니에는 ‘한국의 지미추’라는 별명과 함께 ‘한국 디자이너 슈즈 브랜드 1호’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론칭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 대표가 고수하고 있는 디자인의 화두는 여성성과 화려함, 그리고 유니크함. 강렬한 색채와 섹시한 디자인, 10cm를 훌쩍 넘는 슈콤마보니의 하이힐은 ‘디자이너 슈즈’를 표방하는 수많은 브랜드들의 등장에 분화구가 됐다.

“그 당시 국내 여성 슈즈는 제화 3사 제품, 살롱화, 수입 브랜드가 전부였어요. 슈콤마보니 이후 디자이너 슈즈 브랜드군이 생겼죠. 제가 2003년 2월에 론칭했는데, 그해 하반기에 두 개 브랜드가 더 생겼고, 이후에는 우후죽순으로 생겼어요. 디자이너 슈즈를 내거는 제품들이 해외 명품을 카피한 제품을 내놓는 경우를 볼 때가 있는데, 안타까워요. 좀 더 노력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굽 낮은 플랫슈즈부터 아찔한 킬힐까지 여자의 발에 몰입해 산 지 10년. 얼굴이나 옷에 머물던 사람들의 시선을 맨 아래로 끌어내리려 무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슈즈 디자이너인 그의 시선도 한때는 옷에 꽂혀 있었다. 대학에서 의류직물학을 전공하고 남성복 브랜드 디자이너로 진출하는 수순을 밟았던 것. 당시에는 멋 좀 안다는 남자들이 입던 캐주얼웨어 브랜드에서 일했다. 그런데 9년간 잘나가던 남성복 디자이너의 가슴에 어느 날 큰 바람이 일었다.

“서른 초반이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십이 넘으면 은퇴하고 조용한 삶을 살고 싶었거든요. 뭘 하겠다는 뚜렷한 계획은 없었는데, 어쨌든 패션은 쳐다보지도 않을 생각이었어요.(웃음)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이더라고요. 스페인 친구가 있었는데, 스페인산 구두 브랜드의 한국 에이전트를 해보라는 제안했어요. 몇백 켤레의 샘플이 바로 날아왔길래 그것도 재미있겠다 싶어 편집 숍과 대기업을 찾아다니며 영업을 했죠. 물건을 검수하러 스페인에도 가고요. 그런데 한창 잘되던 때 외환위기가 터졌어요. 손해를 본 것보다 스페인을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워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스페인으로 한 달간 여행을 갔어요. 해변가에서 늘어지게 쉬는데 문득 신발 만드는 공정을 배워서 내가 좋아하고 신고 싶은 슈즈를 만들어서 소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됐어요.”

쉬러 갔던 스페인은 대책 없던(?) 그에게 새로운 삶의 지표를 선사했다. 귀국 후 신발 공장 섭외에 들어갔고, 자신의 브랜드 출시를 위해 회사를 창업하고 준비 기간 동안 슈즈 주문자생산방식(OEM) 사업을 병행했다. 빠듯한 시간에 이동시간도 아낄 겸 아예 공장 한쪽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공장 기술자 아저씨들에게 커피를 타 드려가며 조금씩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신발 제작 공정은 제대로 만든다면 200단계에 이를 정도로 복잡다단했다. 의류보다 부자재도 훨씬 많아 만들기도 쉽지 않은 신발은 제작 후 체중을 실어 착용했을 때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발견될 때도 많았다.

“가죽 다루는 일이 워낙 험해요. 옛날에는 ‘갖바치’라고 해서 천민들이 하던 일이었잖아요. 신발 제작은 철저한 분업이 필요하고, 스트레스도 많은 일이에요. 가죽에, 가죽 꿰맬 실, 내피, 중창, 창, 앞코와 뒤꿈치 처리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전 과정을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요즘도 구두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젊은 친구들이 있는데, 환상만 갖고 오는 경우가 많아요. 일 배우러 왔다가 빠르면 하루 만에 그만둔 사람도 있었죠.(웃음)”
“미국 삭스 피프스 애버뉴와 니만 마커스 등 고급 백화점 입점도 목표인데, 그러기 위해 현재 회사의 내실을 다지는 중입니다. 미래를 위해 씨를 뿌리는 과정이죠. 전 세계 패션 리더들의 신발장에 슈콤마보니 슈즈 한두 켤레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미추가 없는 지미추 구두가 여전히 여성들의 로망인 것처럼요.”
“미국 삭스 피프스 애버뉴와 니만 마커스 등 고급 백화점 입점도 목표인데, 그러기 위해 현재 회사의 내실을 다지는 중입니다. 미래를 위해 씨를 뿌리는 과정이죠. 전 세계 패션 리더들의 신발장에 슈콤마보니 슈즈 한두 켤레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미추가 없는 지미추 구두가 여전히 여성들의 로망인 것처럼요.”
여성성과 화려함, 변하지 않을 화두

슈콤마보니 매장에는 편안한 플랫슈즈부터 펌프스, 화려하고 섹시한 샌들, 최근 몇 년 사이 스테디셀러로 등극한 스터드(징) 박힌 워커까지 다양한 슈즈를 만날 수 있다. 일명 ‘연예인 신발’이라 불리는 데는 셀레브리티 마니아들의 영향도 컸다. 최근에 자신의 슈즈 브랜드 ‘익스큐즈미’와 협업한 ‘익스큐즈미 슈콤마보니’를 선보인 연기자 공효진을 비롯해 가수 엄정화와 이혜영, 연기자 한가인과 한혜진, 서우 등이 그들. 이들은 이 대표의 오랜 친구이자 슈콤마보니의 고객들이기도 하다. 남을 위해 슈즈를 만드는 이 대표 역시도 예쁜 구두를 보면 지나칠 수 없는 슈어홀릭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전 세계를 다니며 사 모은 신발이 1500켤레에 달한다는데, 그의 슈즈 사랑은 어렸을 때부터 유별났단다.

매장에 있는 슈즈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아이템 하나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그는 난감해 했다. 예의 “모두 자식 같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어울릴 만한 신발 하나 추천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는 3초도 안 돼 몸을 반사적으로 움직였고 순식간에 그의 양손에는‘답안’이 들려 있었다.

“서양 여성들은 낮에는 편한 신을 신고 밤에 하이힐을 신는데, 그들보다 활동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우리나라 여성들은 낮에도 하이힐을 신어요. 다리가 길고 날씬해 보이고 싶은 욕구가 그만큼 큰 거죠. 하루 종일 신어도 발이 피곤하지 않은 하이힐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어요. 미국 삭스 피프스 애버뉴와 니만 마커스 등 고급 백화점 입점도 목표인데, 그러기 위해 현재 회사의 내실을 다지는 중입니다. 미래를 위해 씨를 뿌리는 과정이죠. 전 세계 패션 리더들의 신발장에 슈콤마보니 슈즈 한두 켤레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미추가 없는 지미추 구두가 여전히 여성들의 로망인 것처럼요.”


이보현
연세대 의류직물학과
1985~95년 남성복 디자이너
1995~2003년 빈티지 편집 숍 지퍼(Zipper) 운영
스페인 구두 Ras 에이전트
국내 구두 OEM 에이전시 운영
2003년~슈콤마보니 수석 디자이너 겸 대표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