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목 참소리 축음기·에디슨 박물관장

수학여행 필수 코스라고 하는 강원도 강릉의 명소 ‘참소리 축음기·에디슨 박물관’은 우리가 아는 여느 박물관과는 다르다.

‘축음기’, ‘에디슨’에 꽂힌 한 남자의 로망이 담긴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손성목 관장은 다음 목표인 영화 박물관 건립을 위해 영사기와 영화 촬영 장비를 모아두고 있다.
손성목 관장은 다음 목표인 영화 박물관 건립을 위해 영사기와 영화 촬영 장비를 모아두고 있다.
지난 4월 눈으로 본 ‘참소리 축음기·에디슨 박물관’의 규모는 애초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축음기 4000여 점, TV·라디오 1500여 점, 에디슨 발명품 2000여 점, 전 세계 축음기 및 에디슨 발명품의 3분의 1 소장이라는 숫자의 힘을 빌려 박물관의 모습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입구로 들어서자 역사상 최초의 컬러필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찍었다는 촬영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당시 사용한 2대 카메라 중 1대는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 화재 때 소실됐고 남은 1대가 여기에 있다. 세계 최초의 TV ‘베어드 30라인 TV’, 에디슨이 발명한 최초의 축음기 ‘틴포일’도 눈길을 끈다.

전시관을 돌면서 가이드의 설명이 듣다 보면 ‘최초’, ‘유일’이라는 단어는 ‘에디슨이 실제로 발명한’이라는 말과 함께 귀가 따갑게 듣는다. 축음기나 전구 같은 너무도 유명한 에디슨의 발명품부터 커피포트, 말하는 인형 등 에디슨이 이런 것도 발명했나 싶은 전시품을 볼 수 있다. 볼수록 이 박물관의 독특한 테마와 규모에 입이 벌어진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박물관이 한 개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개인 박물관이라는 점이다.


축음기 수집으로 시작된 ‘박물관’의 꿈

박물관 휴게실에서 손성목 관장을 만났다. 올해 일흔이 된 손 관장은 왠지 인터뷰에 집중하지 못했다. 혹시 건강이 좋지 않은가 염려가 됐다. 그런데 그의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는 모습을 보니 건강보다는 다른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빨리 박물관 음악감상실 시스템을 업그레이드 하러 가야 돼요. 축음기 소리부터 최신 음향 장비까지 소리의 역사를 들을 수 있는 곳인데, 사운드가 세계 최고 수준이죠. 그것 말고도 박물관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서….”

그는 틈만 나면 ‘박물관을 어떻게 할지, 어떤 것을 박물관에 들일지’를 생각한다고 했다. “박물관에 더 많은 물건을 진열하고 사람들이 보러 올 수 있게 50년 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그가 이렇게 박물관에 정성을 쏟는 것은 이곳에 그의 인생과 로망이 그대로 묻어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축음기를 만난 것은 다섯 살 때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동네 아이들이랑 어울리질 못했어요. 보다 못한 아버지가 작은 축음기를 하나 사오셨어요. 제 소장품 1호라고 할 수 있는 ‘콜롬비아 G241’이죠. 이 축음기 하나가 많은 걸 바꿨습니다.”

이 축음기 하나로 그는 동네 영웅이 됐다. 축음기는 자연히 그의 보물 1호가 됐다. 여덟 살 되던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손 관장은 1·4 후퇴 당시에도 축음기를 버리지 못해 피난길 내내 작은 등에 지고 월남했다.

축음기의 소리에 매료된 손 관장은 중학교 시절부터 축음기를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전파사를 찾아다니며 모은 축음기가 중학교 졸업할 때는 10여 개로 늘었다. 1970년대 군 전역 후 현대건설에 입사하면서 그의 수집은 불이 붙었다.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하면서 외국을 돌며 축음기를 사들였고, 4년 뒤 귀국할 때 소장한 축음기는 600점에 이르렀다. 머릿속에 ‘박물관’의 꿈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제가 축음기를 통해 매료된 ‘소리의 진화 과정’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자는 소원에서 비롯됐습니다. 축음기가 우리나라 기계는 아니지만 축음기를 통해서 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보고 소리의 역사를 알 수 있거든요.”
손성목 관장은 “박물관에 더 많은 물건을 진열하고 사람들이 보러 올 수 있게 50년 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그가 이렇게 박물관에 정성을 쏟는 것은 이곳에 그의 인생과 로망이 그대로 묻어있기 때문이다.
손성목 관장은 “박물관에 더 많은 물건을 진열하고 사람들이 보러 올 수 있게 50년 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그가 이렇게 박물관에 정성을 쏟는 것은 이곳에 그의 인생과 로망이 그대로 묻어있기 때문이다.
‘영화 박물관’ 건립이 목표

귀국 후 시작한 임대아파트 사업이 잘 풀렸고 부친이 남긴 유산을 정리하면서 ‘총알’은 마련했다. 아프리카, 유럽, 러시아, 미국, 남아메리카 등 50여 개국을 축음기만 찾아 돌아다녔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에요. 정보를 얻기 위해 무조건 해외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고생 많이 했죠. 세상에 한 대 남은 ‘아메리칸 포노그래프(동전을 넣고 음악을 감상하는 축음기)’를 사러 갈 땐 미국에서 강도를 만났어요. 어깨에 총을 맞고 경매에 못 가게 됐는데 제 사연을 들은 주인이 경매를 연기해줘서 간신히 구할 수 있었죠. 해외에 나가서 1달러가 없어 며칠씩 굶는 일도 비일비재했어요. 몇십만 달러짜리 물건을 사러 다니는 여행인데 아이러니하죠. 박물관에 전념하다 보니 사업에 소홀해 파산한 적도 있어요. 소장품을 팔라는 제의가 들어왔는데 목숨과도 같은 물건들을 차마 팔 수 없더라고요.”

집념과 투지는 결국 결실을 맺었다. 1982년 소장품을 진열해 만든 ‘참소리방’을 발전시켜 1992년 마침내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을 세웠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축음기를 쫓다 보니 에디슨과 만났다. ‘에디슨 없이는 축음기를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에디슨의 발명품 및 유품을 수집해 전시하기 시작했고 박물관 이름도 ‘참소리 축음기·에디슨 박물관’으로 바꿨다.

현재 참소리 박물관에는 미국 본토의 에디슨 박물관보다 많은 에디슨 발명품이 소장돼 있다. 박물관을 방문한 미국인들이 “이게 왜 다 여기 와 있느냐”며 시기할 정도다. 매년 40만 명의 관람객이 참소리 박물관을 찾고 있다.

이 정도만 돼도 “대단하다”를 넘어 “미쳤구나”라는 소리까지 나올 법하다. 그런데 손 관장은 아직도 목이 마르단다.

“영화 박물관을 만들 생각입니다. 내년에 착공할 거예요. 우리나라가 이제 영화를 많이 좋아하고 영화제 같은 행사도 성공을 했는데, 아직 그렇다 할 영화 박물관이 없어요. 제가 축음기 모으면서 영사기나 영화 촬영 장비를 많이 모았어요. 이걸로 영화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겁니다. 에디슨은 ‘300년을 더 살고 싶을 만큼 내겐 아직 많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 박물관 때문에 아직 300년을 더 살아도 부족할 만큼 할 일이 많네요.”


함승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