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가를 밑돌고 있는 스팩을 지금 사서 합병 실패로 해산하게 되면 공모가와의 차액에 이자까지 얹어 수익을 낼 수 있다.


스팩은 한 때 투자자들로부터 열광적 호응을 얻었다. 주가 상승 재료 중 최고로 치는 인수·합병(M&A)만을 위한 것이어서 대박이 날 수 있다는 환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미래에셋스팩1호’는 상장 초반 공모가(1500원)의 갑절이 훨씬 넘는 3800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 서울 강남 등지에서는 스팩 공모주에 투자하는 사모펀드가 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스팩 열풍은 그러나 상장 후 1년간 장외 기업 합병이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그라들었다. 뒤이어 터진 소위 ‘세금 족쇄’ 문제는 스팩 투자자들을 혼란으로 몰고 갔다. ‘세금 족쇄’란 스팩과 합병한 비상장 기업 대주주가 1년 안에 지분을 팔 경우 양도 차익에 대해 과세하는 것을 말한다. 우량 기업이 굳이 일반 기업공개(IPO)를 놔두고 스팩과 합병할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정부가 스팩의 특수성을 인정, 예외 조항을 만들면서 세금 문제는 일단락됐지만 스팩 주가는 지금도 살아날 기미가 없다.



‘참담한’ 스팩 성적표… 21곳 중 2곳만 합병 성공


스팩 도입 2년이 다 돼 가고 상장된 스팩만 19곳에 달하지만 실제 합병에까지 이른 곳은 단 두 개에 불과하다. 스팩 상당수는 합병할 기업을 찾지도 못하고 있다. 스팩 담당 투자은행(IB) 관계자들은 “그동안 실적도 좋고 사업성도 있는 기업이라면 굳이 스팩을 통한 우회상장을 하려하지 않고, 그저 그런 기업들만 스팩과의 합병을 바라고 있어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한다.

스팩이 합병 타깃을 정해도 상당수는 상장 심사를 맡고 있는 한국거래소(KRX)로부터 퇴짜를 맞는다. 사업의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부국퓨쳐스타즈스팩’이나 ‘하이제1호스팩’등은 KRX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우회상장 대상으로 거론된 프롬투정보통신과 엠에너지가 상장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KRX는 판단했다.

스팩이 합병 대상을 찾고 KRX의 심사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장이 좌절된 사례도 있다. ‘대신증권그로쓰스팩’은 썬텔과의 합병을 추진했지만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합병에 실패했다. 비상장 기업 썬텔의 수익가치를 부풀려 스팩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한 것으로 당시 기관투자가들은 판단했다.

또 ‘이트레이드SBI스팩’은 합병 가능성이 낮아지자 아예 자진 청산했고, ‘교보KTB스팩’은 ‘하유미 팩’으로 유명한 제닉과 합병하려다가 제닉 주주들의 반발로 합병 발표 몇 시간 만에 이를 철회하는 해프닝까지 겪었다. 제닉은 이후 직접 증시에 상장했다.

가까스로 합병까지 간 다른 두 곳의 스팩도 그리 웃을 처지는 아니다. 우회상장 뒤 주가가 오히려 뒷걸음질 쳤기 때문이다.‘HMC스팩1호’를 통해 지난 8월 17일 증시에 데뷔한 화신정공은 단기간 주가가 ‘반 토막’이 났다가 현재 조금 회복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신영스팩1호’와 합병한 알톤스포츠도 우회상장 이후 급락세를 보이다가 최근에서야 안정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자본환원율 상승으로 비상장 기업 가치 축소

스팩이 이처럼 참담한 실적을 기록 중인 이유는 당초 취지와는 다르게 비상장 우량기업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는 탓이 크다. 투자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괜찮은 기업들이 스팩을 외면하고 있다는 얘기다. 증권사들이 비상장 기업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권사 입장에서도 비상장 기업의 가치를 마냥 높게 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상장 기업의 가치를 과도하게 높일 경우 스팩의 기존 주주들이 손해를 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대신증권 스팩의 합병이 무산된 이유 중 하나도 스팩 주주들이 비상장 기업 가치가 과도하게 높게 평가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우회상장 규정이 강화되면서 가치 산정 방식도 비상장 기업에 불리해졌다. 무엇보다 비상장 기업의 수익가치에 영향을 주는 자본환원율이 크게 올라간 게 결정적이었다. 자본환원율이 상승하면 미래의 기업 이익을 산정할 때 불이익이 발생한다. 자신의 회사 가치가 쪼그라든다는 데 이를 반길 기업인은 없다.


현재 국내 증시에는 유가 증권 시장 3개, 코스닥 시장 16개 등 19개스팩이 상장돼 있다.

스팩 해산 시 오히려 수익 나는 구조

스팩이 당초 도입 취지와 달리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고사될 위기에 처하자 금융당국도 제도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올 초부터 금융투자협회, KRX 등을 통해 업계의 요구 사항을 듣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최근 주최한 국내 IB 대표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스팩 활성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만약 금융당국이 업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본환원율을 다소나마 내리거나 시장가치 평가 시 증권사의 자율을 좀 더 인정해준다면 지금보다 스팩 합병은 크게 활성화될 전망이다. 일부 스팩은 합병 대상을 찾고도 규제 완화를 노리고 합병 시기를 늦추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개선안 발표와 함께 스팩 합병이 봇물을 이룰 수도 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스팩이 지금은 인기가 없지만 의미 있는 기업이 합병하는 사례가 나온다면 덩달아 다른 스팩 주가가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제도 개선이 이뤄진다는 가정 아래 지금부터 스팩 주식을 사모아도 괜찮다는 뜻이다.

물론 제도 개선은 확정된 게 아니다. 당분간 이대로 스팩이 운영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투자자들이 크게 밑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증시 전문가들은 말한다. 스팩이 합병에 실패해도 투자자들은 원금 대부분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스팩은 공모를 통해 모은 자금의 90% 이상을 외부에서 유치해야 한다. 일부 스팩은 100%를 유치했다. 이 돈은 스팩 결성 3년 이내에 합병하지 못하는 경우에 이자까지 더해 주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따라서 공모가를 밑돌고 있는 스팩 주식을 지금 사서 보유하고 있다가 나중에 해산하면 주가와 공모가의 차이 만큼에 더해 이자까지도 받을 수 있다. 스팩 합병 실패만 보장된다면 역설적으로 수익이 보장된 무위험 자산이 스팩 주식인 셈이다.

이 때문에 “스팩 주가의 최대 악재는 합병”이라고 말하는 투자자도 있다. 성장성이 큰 기업과 합병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해산하는 게 주주 입장에서는 더 낫다는 뜻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덩치가 큰 일부 스팩은 합병 가능성이 낮다. 900억 원에 육박하는 자금을 모아놓은 대우증권 스팩은 합병 대상으로 수천억 원대 매출을 올리는 비상장 기업이 필요하다. 이 정도 매출을 올리는 비상장 기업을 찾기도 어렵지만, 설령 있다 해도 굳이 스팩과의 합병을 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스팩 도입 2년이 다 돼 가고 그동안 상장된 스팩만 21곳에 달하지만 실제 합병에까지 이른 곳은 단 두 개에 불과하다.
스팩 도입 2년이 다 돼 가고 그동안 상장된 스팩만 21곳에 달하지만 실제 합병에까지 이른 곳은 단 두 개에 불과하다.
안재광 한국경제 증권부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