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인 오재순이 비문을 짓고 이채가 비전을 쓰고, 이익회가 비문을 쓴 삼도통제사 오혁의 신도비. 신도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본다.

이채의 초상
이채의 초상
서울 북쪽 장흥유원지에 권율 장군 묘소가 있고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총탄에 맞은 큰 비가 길가에 서있다. 바로 영조 때 삼도통제사를 지낸 오혁의 신도비(神道碑)로 이곳서 산으로 오르면 중턱에 묘소가 있다.

오혁(1709~1769)은 선조 45년 61세로 생을 마감했다. 처음 지금의 경기도 안성 천덕산의 선영에 묻혔으나 20년 뒤인 정조 12년에 이곳 장흥면 고비동으로 옮겼고, 26년이 지난 순조 14년 7월에 비를 세웠다. 기단과 개석은 화강암이고 비신은 오석(烏石)이다. 한국전쟁 때 입은 탄흔이 곳곳에 있는 것 이외에 어느 한 곳 무너진 곳 없이 말끔해 200년 전에 세운 비석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종친인 오재순(吳載純)이 비문을 지었고, 화천(華泉) 이채(李采)가 비전(碑篆)을 썼으며, 고동(古東) 이익회(李翊會)가 비문을 썼다. 한 무신의 비석을 위해 세 문신이 모이게 된 사연이 궁금해진다.
오혁 신도비 정면
오혁 신도비 정면
오혁 신도비의 비전을 쓴 이채

오혁은 일찍 아버지를 잃어 어머니를 돕고자 무신의 길을 택했다. 권력에 빌붙은 군인을 자르고, 군인의 밥그릇을 챙겨주었으며, 군에 당쟁이 있을 수 없다며 몸을 아끼지 않다 실명에 이르러 죽었다. 이 충무공이 성을 쌓지 않았다는 비난에 대해 오혁은 수군에겐 ‘이해위성 이주위루(以海爲城, 以舟爲壘)’ 곧 ‘바다가 성이고, 배가 보루’라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길만을 생각했다.

두 아들과 사위도 무신이었는데, 아들 재광(載光)은 아버지에 이어 삼도통제사에 올랐다. 이 비석이 없었다면, 또 오재순의 <순암집>에 비문이 남지 않았다면 오혁의 삶은 한낱 무덤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오재순은 오혁과 족질(族姪)의 관계지만 가계가 직접 닿아있지는 않다. 오재순은 해창위(海昌尉) 오태주의 손자로 정조 16년 66세로 사망했으며, 정조가 순암(醇庵)이란 호를 내린 데 이어 우불급재(愚不及齋)란 호를 내렸다. 순암은 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 양 대제학,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했다.

‘유명조선국가선대부삼도통제사해주오공신도비(有明朝鮮國嘉善大夫三道統制使海州吳公神道碑)’의 비전을 쓴 이채(1745~1820)는 당시 사림의 스승이었던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손자다. 자는 계량(季亮)이고 호는 화천(華泉)이며 <화천집>이 있다.

그는 59세 때 조부처럼 관직을 버리고 사림이 돼 76세로 세상을 등졌고, 오재순의 아들 오희상(吳熙常)이 ‘호조참판이공묘갈명(戶曹參判李公墓碣銘)’을 지었다. 오희상도 이채와 같은 때 관직을 버리고 광주 징악산에 은거했으니 모두 도암을 본받은 것이다. 이채의 묘갈과 오혁 신도비의 관직을 보면 순조 14년에 쓴 것이 확인된다. 바로 70세 때의 글씨다.

국립중앙박물관에 59세 때 그린 이채의 초상이 있다. 보물 제1483호다. 이채는 자신의 초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스스로 글을 지었는데, 나이 70을 넘긴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1732~1815)이 전서로 썼다.

“…꼿꼿하면서 단정하게 앉아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중략) 그대가 참으로 계량 이채란 사람인가? (중략) 지난 행적을 살펴보니 세 고을과 다섯 주의 수령을 역임했으며 무슨 공부를 했는가 물으니 사서와 육경이다. 한 시대를 속이고 헛된 명성을 도둑질한 것은 아닐까? 아! 네 할아버지 이재의 고향으로 돌아가, 네 할아버지 남긴 글을 읽어라. 그러면 삶의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정자와 주자의 문도가 되기에 부끄럽지 않으리라.”
오혁 신도비 비문탁본 / 오혁 신도비 부분
오혁 신도비 비문탁본 / 오혁 신도비 부분
정수만 남겨 담백함을 추구한 이채의 글씨

이채는 초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72세의 저암(著菴) 유한준(兪漢雋)이 지은 찬(讚)을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가 예서로 썼고,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지은 찬(贊)을 송원(松園) 김이도(金履度)가 행서로 썼다.

“관복을 벗었다고 단정함을 잃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정지돼 있다. 어느 한 곳 흔들릴 여지가 없다. 다만 얼굴에는 마음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모두 도암의 가르침이라면서 마음의 움직임은 그를 오래 사귄 사람만 안다고 했다. 세 사람의 글씨는 이러한 초상화의 흐름에 물들었는지 움직임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 조심스러움이 마음의 움직임처럼 우리에게 옮겨온다.

이채의 비전은 그림 속의 이채를 닮은 듯 정지돼 아래 배인 이익회의 글씨를 기다린다. 화천 앞에서 자랑삼아 글씨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흐름을 함께 해야 한다.

이익회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자는 좌보(左輔), 호는 고동이다. 45세 때인 순조 11년 문과 정시에 급제해 임실현감 등을 거쳐 순조 20년 사간원 대사간을 시작으로 중앙에 진출, 성균관 대사성,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69세에는 동지정사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판윤을 거쳐 헌종 9년 77세로 임종했다. 고종 40년 홍문관 대학사에 추증됐다.

이익회는 자하 신위와 같은 또래이며 어렸을 때부터 자하와 시서화(詩書畵) 이야기로 밤을 지새운 오랜 벗이고, 추사 김정호보다 스무 살 위다. 김정호가 우리나라 서예계에 새로운 흐름을 불러왔다면 이익회는 우리나라 서예의 지평을 지켰던 서예가다. 김정호도 이 지평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이익회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혁 신도비가 바로 이익회를 대표하는 글씨다. 신위는 귀국하면 나이 70을 바라보는 이익회에게 예나 지금이나 글씨가 한결같다며 사행에서 천하를 새로이 보고 나면 왕희지의 난정을 꿰뚫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익회는 베이징에서 옹방강의 해서족자만을 가져왔다. 곧 이익회는 변화보다는 그가 평생을 지켜온 글씨에 대한 가치를 더욱 확신했던 것이다.

어떤 이는 이익회를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흐름이 일고 있음을 알면서 고집했다면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중국과 달리 글씨를 대하는 우리 나름대로의 태도가 있다. 이익회는 곧 우리의 가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정수만을 남겨 담백한 멋을 담으려 했다고 하겠다.

아울러 오혁 신도비 이외에 조평비(趙平碑), 영월호장엄흥도원강서원비(寧越戶長嚴興道圓岡書院碑), 학당조공(상경)신도비명[鶴塘趙公(尙絅)神道碑銘], 심승경묘표(沈承慶墓表), 삼우당문익점신도비(三憂堂文益漸神道碑),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 증의정부영의정시충무이공순신유허비(有明水軍都督朝鮮國三道統制使 贈議政府領議政諡忠武李公舜臣遺墟碑), 대명충절신서귀이선생지묘(大明忠節臣西歸李先生之墓), 호성군이주신도비(湖城君李柱神道碑), 난산비(卵山碑) 등 구국(救國)의 의거를 기리기 위한 비들이 모두 이익회가 썼음을 살핀다면 단순히 글씨만을 쓴 것이 아님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글 해정 김세호

김세호_ 김세호 선생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후 국립타이완대에서 예술사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일본 교토대 동양사연구실에서 연수했다. 귀국 후 예술의전당과 원광대 등의 강단에 섰다. 10여 년 전부터 한글의 변천사와 서예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