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미학 산책] 한글 창제와 아름다운 책들
요즘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들은 나만의 글꼴과 편집을 갖고 싶어 한다. 이러한 경향은 젊은 세대들에게 더욱 활발하고, 개인을 넘어 기업들도 나만의 글꼴을 갖고 있으며 글꼴에서 멈추지 않고 서식이라는 편집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글 창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글의 글꼴, 서식의 다양성과 그 아름다움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글은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에 창제를 알리는 기사가 실록에 실려 있다. 세종이 조정의 의론을 거치지 않고 사초로만 남겼기에 12월의 기사로 묶여 실렸다.

이에 2월 보름 집현전의 최만리 등이 명나라와의 사대(事大)관계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세종은 이를 받아들여 관부(官府)에서는 한글을 쓰지 않는 쪽으로 한발 물러섰다. 세종은 어린(愚) 백성들이 한글을 널리 쓰게 되면 관부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세종으로서는 관부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을 것이다. 관부에 나갈 수 없는 중인 이하의 세력까지도 한문에 집착해 관부지향적 의식이 넓게 퍼져있는 사회에서 세종의 기대는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로부터 452년이 지난 고종 32년(1895) 5월 8일에 이르러서야 한글을 바탕으로 하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한문과 섞어 쓰도록 하는 법령이 내려졌다. 이것도 개혁을 바라는 쪽의 주장이었을 뿐 조선 사회의 흐름은 아니었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한문 쓰기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니 수백 년 묵은 관습을 떨쳐버리기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막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삼아 개국한 조선왕조에서 세종은 어떻게 한글을 나라글자로 바꾸어가는 첫 바탕을 마련했을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동양미학 산책] 한글 창제와 아름다운 책들
훈민정음에 담긴 세종의 뜻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2년 10개월이 지난 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으로 이름 지어진 책이 완성됐다. 이 책은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이 소장했던 국보 제70호다. 2년 전에는 상주에서 또 다른 한 권이 발견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하디귀한 책 한 권을 더 얻게 됐다. 이 책에는 세종이 지은 ‘예의(例義)’와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세상에 알리고자 지은 ‘해례(解例)’와 정인지의 ‘서문’이 실려 있다.

홍기문은 <정음발달사>에서 세종이 지은 예의보다 해례가 더 어렵다고 했다. 한문으로 된 글을 어린 백성들이 읽고 한글을 이해하기 바란 것은 아닐 것이다. 바로 한글을 나라글자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며 한문 쓰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이른바 지식인들에게 한글이 단순한 소리부호의 나열이 아니란 것을 깨달으라는 의미였다.

<훈민정음>에 이어 나온 <용비어천가>는 한문으로 지은 시와 이를 한글로 풀어 함께 실은 것이고, <동국정운>(東國正韻)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은 한자의 중국 음을 한글로 단 것이다. 모두 어린 백성들을 위한 책들은 아니었다.

<훈민정음>에는 한글과 한문, 성질을 달리하는 두 글자가 함께 한다. 한글과 한자 각각 같은 크기의 공간을 할애했지만 한글은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네모 모양으로 그 떳떳함이 돋보이게 하고, 한문은 가는 획의 행서로 모서리를 죽여 작게 했다. 이런 까닭에 한문으로 쓴 글이 한글처럼 보일 정도다.

또한 한글에서 초성이나 중성이 넓어지거나 길어지는 조형상의 문제가 있었지만 1년도 안 돼 간행된 <용비어천가>에서 이를 보완했다. 곧 중성 ‘아래 아(ㆍ)’가 일으키는 조형상의 문제점을 세로획과 가로획으로 바꾸어 해결했는데 이는 세종이 언어부호의 원형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조형상 필요하다면 변형도 허용했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 <용비어천가>며 <동국정운>, <홍무정운>을 간행해 관부지향 세력을 설득하는 한편, 집현전에서 사서(四書)를 한글로 번역토록 했다. 세종 30년에는 박팽년으로 하여금 어린 단종에게 한글로 <소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한글을 부정적으로 보는 상황에서 세종은 관부가 아닌 다른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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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된 <석보상절>

<훈민정음>이 간행되기 6개월 앞선 세종 28년 3월 9일로 세종 부부가 세자 문종에게 조정을 맡기고 수양대군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다음날부터 소헌 왕비가 아프기 시작해 보름이 지난 3월 24일 돌아가셨다.

많은 스님들을 모아 왕비의 쾌유를 빌었고, 대신들이 종묘, 사직 및 산하(山河)며 절을 찾아 쾌유를 빌었으며, 문종과 세조 등 왕자 및 시종들이 다투어 연비(燃臂)를 뜨며 슬픔과 아픔을 견디었으나 결국 왕비가 돌아가셨다.

하루하루 죽음으로 다가가는 어머니를 지켜보던 세조의 슬픔과 아픔은 누구보다도 컸고, 이를 지켜본 세종이 소헌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의 일대기를 지어 마음을 달래보라고 했다. 이에 세조가 한문으로 <석가보>(釋迦譜)를 지었고 세종이 28년 12월 김수온에게 증보토록 한 것이 바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석보상절>을 본 세종은 누구나 쉬 알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케 했고 이를 읽어본 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으셨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따로 간행됐으나 세조 5년(1459)에 김수온과 성임이 두 책을 묶어 <월인석보>(月印釋譜)를 만들었다.

서강대 소장의 <월인석보> 권 1, 2 앞에 귀중한 자료 하나가 더해져 있다. 바로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훈민정음>의 예의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중국의 치음이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으로 나누어짐을 지적하고 ‘시옷(ㅅ)’의 길이를 달리해 표시한 것이 더해져 있다.

세종의 부인 소헌 왕비의 죽음으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이 간행됐다. 세조 3년(1457) 9월 의경세자(懿敬世子)가 20세로 어린 아들 둘을 남기고 죽자 작은아들 예종이 세자가 됐다.

다 큰 아들을 앞세운 세조의 슬픔과 두려움이 <월인석보>를 한 책으로 만들게 했다. 또한 그는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도록 하는 등 불사(佛事)에 전심(專心)했다. 조정의 반대가 일자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의 번역을 넓혀 나갔다.

한글 창제기의 관련 자료들은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로 귀하고 귀한 우리의 보물들이다. 이 보물들은 불교계의 보물에 머물지 않고 한글을 민간에 널리 정착시킨 세종의 한글 보급을 위해 선택한 길이 됐던 것이다.

필자는 한글과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할 때마다 ‘한글 서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다. 그들이 누구인지 밝힐 수 없다 해도 그들의 조형 세계며, 가치만은 찾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식(板式)을 설계한 장인이며, 생활로 승화시킨 사람들이 이어온 이름 없는 역사를 쓰고 싶을 뿐이다.

글 해정 김세호

김세호_ 김세호 선생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후 국립타이완대에서 예술사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일본 교토대 동양사연구실에서 연수했다. 귀국 후 예술의전당과 원광대 등의 강단에 섰다. 10여 년 전부터 한글의 변천사와 서예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