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큐어 작가 정산 김연식

김연식은 스님이자 사찰음식 전문가이며, 작가다. 매니큐어라는 가장 세속적이고 현대적인 재료로 동양의 정신세계를 구현하는 화승(畵僧), 정산 김연식을 만났다.
[Artist] 성냥갑에 매니큐어로 그린 '색즉시공, 공즉시색'
올 초 프랑스 샤랑통(Charenton)에서는 ‘제58회 살롱 드 샤랑통(Salon de Charenton) 명예작가 김연식 초대전’이 열렸다. 샤랑통은 프랑스의 이름난 교육 도시로 문화행정을 지향하며 관련 사업을 적극 후원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60여 년을 이어온 살롱 특별전으로 마련됐다.

초대전 주최 측은 홍보물에서 김연식의 작품을 “다양한 색채, 대담한 형태와 빛을 이용해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작품으로 관람객을 명상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소개했다. “어떤 작품들은 하나의 꽃이 그래픽적인 기호로 하나의 색을 간직한 형태로 변하면서 모네의 연꽃 시리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는 평도 덧붙였다.

접합력 좋고 다양한 표현 가능한 매니큐어의 매력
[Artist] 성냥갑에 매니큐어로 그린 '색즉시공, 공즉시색'
<관조+명상>은 ‘색즉 시공, 공즉시색’을 표현 하기 위해 김연식 작가가 1년여 수행과 같은 고민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특별전을 통해 프랑스 화단에 데뷔한 작가 김연식을 서울 인사동 사찰음식 전문점 ‘산촌’에서 만났다. 사찰음식 전문가로도 유명한 김연식은 ‘산촌’을 운영하며 같은 건물 3층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

‘산촌’에 들어서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그의 대표작 <관조+명상>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성냥갑 위에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리고, 그렇게 작업한 수백 개의 성냥갑을 세워 만든 작품은 독특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작품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 결에 기자 곁에 선 그가 인사를 겸해 설명을 이어갔다. “이 작품은 불교의 3보인 불(佛), 법(法), 승(僧)을 모두 아우릅니다. 부처님과 말씀, 그리고 수행자를 통해 결국에는 ‘공(空)’을 말하고자 한 거죠.”
관조+명상, 90X180cm, Mixed Media on Matchboxes,2010년
관조+명상, 90X180cm, Mixed Media on Matchboxes,2010년
김 작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표현하기 위해 1년여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관조+명상>은 때에 따라선 2만5000개의 성냥갑으로 또 때에 따라선 500여 개의 편백나무 큐브 등을 활용해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를 통해 ‘무(無)와 유(有)’, ‘공(空)과 색(色)’을 표현한다. 매니큐어라는 재료 자체가 어쩌면 덧없는 세속적 욕망의 현현(顯現)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소비하고 욕망하는 현실도 영겁의 시간 속에서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한 줄기 연기를 뒤로 사라지는 성냥이 담긴 성냥갑 또한 세속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김 작가가 매니큐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0년 전이다. 자신이 좋아하던 도자기의 일부가 깨지자 이를 가리기 위해 매니큐어로 무늬를 새긴 것이 계기가 됐다. 이전에 쓰던 아크릴 물감에 비해 손색이 없는 데다 접합력 또한 뛰어났다.

“제가 스님이지만 느긋하게 기다리질 못해요. 결과를 빨리 보고 싶은 거죠. 유화는 마르는 데 열흘 가까이 걸리잖아요. 매니큐어는 아무리 두껍게 칠해도 사흘이면 말라요. 색깔도 다양해서 미세한 명도의 차이를 나타내거나 투명, 반투명 등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어요. 심지어 야광도 있고요. 매니큐어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작가는 작업을 하면서 화구로써 매니큐어의 다양한 매력을 알게 됐다. 사실 매니큐어만큼 여러 빛깔이 오묘하게 실현된 물감도 없다. 색상별로 보면 자그마치 600여 종에 이른다. 물에 닿아도 문제가 없으니 그만한 재료도 없는 셈이다.

Meditation, 90.8X120cm, Manicure on Acrylic panel, 2010년
Meditation, 90.8X120cm, Manicure on Acrylic panel, 2010년
15세 가출에 이은 출가, 사찰음식 전문가로 변신

매니큐어로 작업을 하면서 프로 작가로 나섰지만, 그림을 그린 것은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덕에 그의 작품이 종종 교실 한편을 꾸몄다. 평탄하던 그의 삶은 천경자 화백을 만나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천경자 선생의 첫 수필집 <유성이 흘러간 곳>이라고 있어요. 거기 보면 ‘붉은 동백 숲 앞을 지나가는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 ‘제주도 정방폭포 뒤에 있는 정방사의 저녁 예불 종소리’라는 대목이 있어요. 그 대목이 어찌나 가슴에 와 닿던지…. 출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죠.”

초등학교 졸업 후 얼마 안 돼 제주도 정방사를 찾은 그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61년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했다. 수행의 과정에서 사찰음식을 접한 그는 사찰음식용 식자재를 구하며, 주변의 자연풍광에 매료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전국 사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독특한 절 음식들을 채록해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사찰음식 전문가로 다양한 매체에 원고를 기고하며 동산불교대 사찰음식문화학과 학과장을 맡아 후학도 지도하고 있다. 그만큼 사찰음식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현재 작품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특별한 존재다.

김 작가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사찰음식 전문가, 대학교수, 미술가, 집필가, 재즈 피아니스트 등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그에게 음식이나 미술, 음악은 모두 한 줄기이며 뿌리는 결국 하나로 통한다.

그 이면에는 불교의 부처님 말씀을 통해 무욕과 관조의 바탕을 이룬 ‘불성’이 형상화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꼭 불교적인 테마로만 이해하는 것은 작품의 반쪽만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기성 작가들과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는 탁월한 작품 감각을 지닌 어엿한 프로 작가다. 특히 큰 스케일의 설치작품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관조+명상, 90X120cm, Manicure on aluminum panel, 2010년
관조+명상, 90X120cm, Manicure on aluminum panel, 2010년
한동안 <관조+명상> 작업 진화에 매진

프랑스 특별전은 김 작가와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재불화가 이기태 씨가 가교 역할을 했다. 이기태 씨는 그가 매니큐어 작업에 몰두하던 초기에 음식점에서 만나 인연이 됐다. 음식점 한쪽에 앉아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리던 그를 눈여겨본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작품을 본 이 씨는 프랑스에서 좋아할 그림이라며 전시를 권했다. 처음에는 그저 듣기 좋은 소리라 여겼다. 하지만 다른 미술계 인사들도 전시를 권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주변의 권유에 힘을 얻은 그는 2007년 공화랑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스님이, 그것도 매니큐어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화제가 됐다. 그렇게 벌써 세 차례의 개인전을 치렀다. 개인전을 치를 때마다 그는 프랑스에 있던 이 씨에게 전시회 소식을 알렸다. 이 씨는 프랑스 화단에 김 작가를 알렸고, 작품 사진을 본 샤랑통 살롱전 측이 먼저 김 작가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샤랑통 살롱전은 프랑스 정부가 후원하는 공식적인 미술전람회로, 1667년 루이 14세가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에 소속된 미술가들의 작품 전시를 후원하면서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살롱전에는 130여 명의 작가가 작품 한 점씩을 출품한다. 명예작가인 그에게는 별도로 25m의 공간을 마련해 20여 점의 작품을 걸었다.

김 작가는 특별전을 위해 2만여 개의 성냥갑을 이용해 만든 가로 5m가 넘는 설치작품을 전시해 호평을 받았다. 프랑스 전시회를 마친 그는 여전히 식당을 운영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아침에 영감이 떠오르면 모든 일을 팽개치고 작품에 몰두한다.
관조+명상, 30X60cm, Manicure on Acrylic panel, 2010년
관조+명상, 30X60cm, Manicure on Acrylic panel, 2010년
“한동안은 이 작업을 진화시킬 계획입니다. <관조+명상>은 4년 전 전시에서 처음 선보였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사실 전시회에서 관객이 그림 앞에만 서있어도 괜찮은 작품이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은 관객을 오랫동안 붙들어두는 매력을 지녔어요. 아마 불상뿐 아니라 세상만사 모든 게 작품 속에 스며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