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종태 & 미술평론가 최태만

작가 최종태는 조각과 회화, 문학을 넘나드는 전방위 예술가다. 올해 여든이 된 노 작가는 스승 김종영과 장욱진의 작품 세계를 끌어안으며 자신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개척해왔다. 그가 오랫동안 관장으로 몸담아온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제자이자 미술평론가인 최태만 국민대 교수를 만났다.
원로 작가인 최종태 김종영미술관장(왼쪽)과 제자이자 미술평론가인 국민대 최태만 교수
원로 작가인 최종태 김종영미술관장(왼쪽)과 제자이자 미술평론가인 국민대 최태만 교수
최종태 작가를 아는 이들은 그의 올곧은 작가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많은 제자와 젊은 작가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최태만 국민대 미대 교수도 그들 중 하나다.

두 사람의 인연은 최 교수가 조각미술관인 모란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 교수는 모란미술관 학예실을 맡은 후 최 작가를 자주 만났고 그의 영향으로 조각에 대한 평론을 많이 썼다. 그즈음 한국 조각 1세대 작가이자 최 작가의 스승인 김종영 회고전이 열렸는데, 최 작가가 최 교수에게 평론을 쓰라고 권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일을 도모하게 된 것은 2002년, 김종영미술관이 문을 열면서부터다. 최 작가가 미술관장을 맡으면서 최 교수에게 학예실장을 맡겼다. 최 작가의 부름을 받은 최 교수는 국민대 교수를 겸하며 비상근 학예실장으로 6년간 미술관에 손을 보탰다.
1. 얼굴, 2006년, 수채, 34.8×25cm / 2. 얼굴, 2007년, 먹, 37×25.3cm
1. 얼굴, 2006년, 수채, 34.8×25cm / 2. 얼굴, 2007년, 먹, 37×25.3cm
문학과 그림에 빠졌던 학창시절

최태만 교수(이하 최 교수): 선생님이셨다 미술관 일을 하면서 직속상관이 된 거죠. 관장님으로서도 직원들에게 자율성을 많이 부여해 주셔서 저로선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학예실장을 그만둔 뒤로도 선생님 작품집과 회고전 등에서 글을 썼습니다. 선생님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당신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까 하고요.

최종태 작가(이하 최 작가): 다 모자라죠. 기호나 형태 등 여러 면에서 미숙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중에 괜찮은 것도 있지만요. 나이가 든다고 다 괜찮은 건 아니고 초기 작품도 좋은 게 있어요. 그걸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기본 수준 이상은 될 겁니다.

최 교수: 지금도 그렇지만 미술 전공 하면 으레 회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선생님 세대에 미술을 한다고 했을 때 반대도 컸을 것 같은데요.

최 작가: 어릴 적에는 그림도 그리고 문학도 좋아했어요. 그때 미술 선생님이 그림을 해보라고 저를 끌었죠. 아마 그분이 안 계셨다면 십중팔구 문학을 했을 겁니다. 그림 그리겠다고 했을 때 당장 벌이가 안 되니까 집에서는 못하게 했죠.

사범학교 나와서 한때 초등학교 선생을 했어요. 선생 해서 번 돈을 갖고 상경해 미대에 들어갔죠. 그때도 꼭 조각을 고집한 것은 아니에요. 어쩌다 조각을 하게 됐는데 아무래도 김종영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죠.

[Friends] "예술은 영원히 변치 않는 최고의 가치를 탐구하는 것"
조각가의 길을 걷게 한 김종영의 작품

최 교수: 선생님의 역할이 그만큼 크겠죠.

최 작가: 그렇습니다. 제 경우에는 어려서 좋은 선생을 만났고, 대학에서도 김종영, 장욱진 같은 선생을 만났으니까요. 대학에 등록하고 사실 김종영 선생보다 장욱진 선생을 먼저 만났어요.

최 교수: 선생님이 3~4권의 에세이집을 내신 게 이제 설명이 되네요. 글을 통해 선생님 특유의 감수성, 사색적인 성품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조각을 택하셨잖아요. 조각가의 길을 선택했다는 건 그만큼 김종영 선생의 영향이 컸다는 얘기겠죠.
기도하는 사람, 2006년, 나무, 26×21.7×98cm
기도하는 사람, 2006년, 나무, 26×21.7×98cm
최 작가: 정확히 1953년이었어요. 그때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문학을 했어요. 문학잡지를 몇 개 보고 있었는데, 그중 <문화세계>라는 잡지에 김종영 선생의 ‘나상’이 실린 겁니다. 그해 영국 테이트갤러리에서 열린 국제조각콩쿠르 입상작이었어요. <문화세계> 첫 페이지에 그게 실렸는데 느낌이 확 왔어요. 로댕의 조각을 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죠.

최 교수: 선생님 작품 중에는 단순화한 얼굴이 많고, 그 얼굴은 대부분 소녀일 때가 많습니다. 소녀 하면 순수, 순결성, 지고함 등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런 부분이 종교와도 닿아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 작가: 한평생 소녀상을 만들어왔어요. 의도한 것은 아니고 특별히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종교적인 느낌을 받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두 스승이 돌아가신 후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과 오랫동안 교류가 있었으니까요.

최 교수: 작품을 하시면서 한때 젊은 작가들과 함께 ‘현대공간회’를 만들어 사회 참여도 하셨잖아요.

최 작가: 1967년이었는데, 4·19혁명 직후라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였어요. 젊은 사람들이 함께 하자고 해서 시작했죠. 당시 현대공간회에는 작가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젊은이들이 참여했습니다.

조각가로 다시 태어나게 해준 ‘반가사유상’
[Friends] "예술은 영원히 변치 않는 최고의 가치를 탐구하는 것"
“우연히 불경 공부를 하며 ‘반가사유상’을 만났어요. 그게 1965년인데, 제 작품 세계에 전환기가 됐어요. 김종영 선생의 그늘에서 벗어난 계기가 됐으니까요.”

최 교수: <나의 스승 김종영>이라는 일종의 평전도 출간하셨잖아요. 스승이지만 김종영 선생과 작품 경향을 다른 면이 많은 듯합니다.

최 작가: 김종영 선생은 순수미술의 세계에 천착했는데 저는 체질적으로 김종영 선생과 달랐던 듯해요. 대학 때 불경 공부를 한 적이 있어요.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불교사상 대강좌’ 포스터를 본 게 불경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됐죠. 비원 앞 대각사에서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반가사유상’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게 1965년입니다. 그때부터 조각가 최종태의 작품이 시작됐다고 보면 됩니다. 그 10년 뒤 40대가 되면서 드디어 김종영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건 중요하지만 그의 그늘을 벗어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최 교수: 개인적으로 소녀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작품 같은 경우엔 무척 종교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독실한 가톨릭신자이면서 김수한 추기경, 법정 스님과 가까이 지내셨잖아요. 명동성당 입구에 있는 예수상이나 길상사 입구에 있는 관음보살상은 그런 인연으로 작업하게 되신 건가요.

최 작가: 명동성당에 있는 건 1990년대 김수한 추기경 요청으로 만들었고, 관음보살상은 2000년에 법정 스님이 부탁해서 작업하게 됐습니다.

김수한 추기경, 법정 스님과의 인연
[Friends] "예술은 영원히 변치 않는 최고의 가치를 탐구하는 것"
최 교수: 김수한 추기경님과는 어떤 인연으로 가깝게 되신 건가요.

최 작가: 제가 서울카톨릭미술가협회 회장직을 10년 가까이 했어요. 모임에서 자연히 추기경과 인사를 하게 됐죠. 만나고 보니까 아주 좋은 분이셨어요. 제가 추기경께 “언젠가 관음상을 만들 생각인데 그러면 가톨릭에서 파문하실 건가요” 하고 물은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안 그럴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랬는데 진짜 몇 년 뒤에 관음상을 만들게 된 거예요. 그때도 추기경께서는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사실 150년 전 일본에서 가톨릭신자들을 탄압할 때 신자들이 들키지 않으려고 관음상 뒤에 십자가를 그려서 기도를 한 적도 있습니다.

최 교수: 선생님 작품 세계에서는 회화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선생님께서 쓰신 책을 선물할 때 앞 페이지에 예쁜 소녀 얼굴을 그려주시잖아요. 저도 몇 권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걸 보면 선생님께 그림은 조각과는 또 다른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 작가: 그림은 초등학교 때부터 그렸어요. 그전에는 붓글씨를 했죠. 김종영 선생이 어려서 붓글씨로 상을 받았는데, 저도 초등학교 때 군 붓글씨대회에서 1등을 했어요. 문학도 그렇지만 어릴 때 몸에 익은 것은 쉽게 밖으로 안 나갑니다.

문학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글을 씁니다. 제가 웬만한 일에서는 아니다 싶으면 “노(No)”를 잘 합니다. 그런데 원고 청탁을 “노”를 못합니다. 마감도 이틀 전에 꼭 지키고요. 그 대신 제 글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죠.

그림도 그렇습니다. 저는 그림이 조각의 부수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완전히 별개죠. 판화, 매직 그림, 연필 그림 등은 그 자체가 독립된 예술입니다.

[Friends] "예술은 영원히 변치 않는 최고의 가치를 탐구하는 것"
노 작가, 21세기의 예술을 말하다

“예술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탐구가 목적이 돼야겠죠. 진리란 무엇이냐. 영원히 변치 않는, 최고의 가치죠. 예술은 그걸 탐구하는 겁니다.”

최 교수: 그림의 영향인가요. 어느 시점부터 조각 작품에 채색을 하시게 됐습니까.

최 작가: 그건 사실 좋은 나무를 만나기 어려워서 그래요. 좋은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채색을 하게 됐어요. 아마 그림을 하니까 그것도 가능했겠죠. 저는 회화를 입체에 접목했다고 생각합니다.

최 교수: 색깔도 좀 특이한 듯합니다.

최 작가: 얼마 전 책을 읽다 보니까 제가 좋아하는 색이 대부분 종교적 색깔이 많더군요. 보라색, 어두운 붉은색, 청색…. 전혀 의도한 적이 없는데 말이죠. 저는 의도된 것보다 의도되기 이전의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 듯해요. 조각을 하고, ‘반가사유상’을 만나고, 김수환 추기경을 만난 그 모든 게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잖아요.

최 교수: 그런 면에서 예술가들은 계획보다는 직관이 앞서는 듯합니다.

최 작가: 최근에 전시회를 갔는데 피카소의 그림 두 점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다른 작품은 보이지도 않았어요. 어떤 영기가 느껴졌거든요. 그런 건 직관으로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최 교수: 그런 걸 볼 수 있는 것도 직관이 있는 분이니까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 작가: 사실 현대인들이 신봉하는 이성의 사회는 15세기 이후에 나타난 겁니다. 이전에는 직관이 세상을 지배했죠. 저는 21세기는 이성보다는 직관이 중요한 시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최 교수: 21세기를 직관의 시대라고 하셨는데요, 21세기 예술의 방향은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시나요.

최 작가: 앞서 말씀드렸지만 지난 600년은 이성이 지배한 시기입니다. 반대로 600년 동안 정신적인 면이 결핍됐다고 할 수 있어요. 그 결핍을 채우는 방향으로 나가야겠죠. 그리고 예술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탐구가 목적이 돼야겠죠. 진리란 무엇이냐. 영원히 변치 않는, 최고의 가치죠. 예술은 그걸 탐구하는 겁니다. 지금 같은 지나친 상업주의는 반성해야 합니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