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홍길 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

1988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2007년 로체샤르까지, 히말라야 8000m 이상의 고봉 16개를 세계 최초로 정복한 무한도전의 사나이. 산악인 엄홍길을 가장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그런데 16번째 고봉을 정복한 뒤 그는 더 이상 히말라야에 오르지 않는다. 50대 초반, 여전히 젊은 그는 히말라야를 오르며 경험했던 22년간의 도전과 성취의 쾌감에 못지않은 ‘인생의 17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3년 전 뜻을 모아 발족한 엄홍길휴먼재단은 네팔 고산지역에 세 번째 초등학교를 신축 중이다.
[Noblesse Oblige] “히말라야가 내게 준 것, 이제는 되돌려주렵니다”
서울 장충동에 위치한 엄홍길휴먼재단(www.uhf.or.kr) 사무실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엄홍길 대장’ 인터뷰차 들른 언론 관계자를 비롯해 후원 문의차 들른 일반인들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듯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자마자 양해를 구하고 그의 손바닥부터 만져 보았다. 역경의 흔적, 산악인의 굳은살을 확인해보려는 일종의 ‘결례’였다고 할까.

“하하. 저라고 다를 게 있나요.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면 생각보다 얼굴이 희다고 그러더라고요. 정말 그렇습니까.(웃음)”

정말 그랬다. 히말라야 고봉 정상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찍은 TV 화면이나 사진 속에 그는 늘 까만 숯처럼 검게 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자도, 선글라스도 벗은 채 만나고 보니 하얀 얼굴에 좋은 인상, 구수한 말솜씨를 겸비하고 있었다.

히말라야의 신(神)과 맺었던 약속,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엄 대장’으로 익숙한 그가 요즘 히말라야 산맥 중앙부의 남쪽을 차지하는 내륙국가 네팔에서는 ‘엄 사부’로 불린다. 3년 전 뜻을 함께하는 100여 명과 함께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한 후 해발 4000m 이상의 고산지역에 초등학교를 지어주는 일로 네팔을 자주 찾으며 얻은 별명이다.

1985년, 스물여섯이던 해부터 오르기 시작했으니 히말라야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자, 삶의 일부이며, 어머니다. 히말라야의 셰르파(히말라야 산악 등반 안내인)들은 그의 오랜 친구들이다. 그런데 더 이상 히말라야를 오르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가 부지런히 네팔을 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1985년에 히말라야를 오르기 시작해 두 해 연속 실패하고 1987년에 처음 성공한 후 16좌를 오르기까지 꼬박 22년이 걸렸습니다. 히말라야는 22년의 세월 동안 젊음을 바친 곳이에요. 38번 도전해서 16번 성공했는데, 그 과정에서 실패와 사고도 많이 경험했어요.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잘라내기도 했고, 해발 7600m에서 한 쪽 발목을 삐는 바람에 다친 발을 질질 끌며 내려온 적도 있죠. 또 그곳에서 저는 10명이나 되는 동료를 잃은 사람입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은 결국 동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고, 16좌를 모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산이 저를 받아주고 선택했기 때문이에요.

그랬기 때문에 16좌 완등 후에 ‘히말라야, 고마워’하고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산이 선택해서 살아남고 성공을 맛본 사람으로서 산을 오를 때마다 산에 한 무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재단을 설립했죠.”
1 팡보체 초등학교 전경. 팡보체 휴먼스쿨은 엄홍길휴먼재단이 해발 4060m 고산지대에 첫째로 완공한 학교다.
1 팡보체 초등학교 전경. 팡보체 휴먼스쿨은 엄홍길휴먼재단이 해발 4060m 고산지대에 첫째로 완공한 학교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산에 신(神)이 있다고 믿는다. 그도 그 믿음에 따라 히말라야의 신에게 마음속으로 빌었다고 한다. 16좌 모두를 성공하게 해주면 살아남은 자로서 히말라야와 그곳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꼭 하겠다는 약속.

히말라야의 신이 간절한 바람을 들어줬으니 그도 약속을 지킬 차례가 된 것이다. 무엇부터 할 것인지 고민하던 차에 히말라야 오지마을 주민들의 생활상을 떠올렸다.

열악한 교육환경과 의료시설, 계속되는 가난의 대물림. 20년 넘게 그들의 삶 속을 드나들었던 그는 그 모든 환경을 혁신할 수 있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막상 결심은 섰지만 재단이라는 것이 혼자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도 필요하잖습니까.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어요. 파라다이스그룹 문화재단에서 매년 말에 교육과 사회봉사 분야에서 큰일을 한 사람을 선정해 공로상을 수여하고 있는데, 2007년도에 제가 그 공로상을 받게 됐어요.

16좌 완등과 함께 등반 중에 사망한 후배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던 일로 공로상을 받았는데, 상금이 4000만 원이었어요. 그때 그 상금이 재단 설립의 종자돈이 된 셈이죠.(웃음)”

“16좌 완등했듯 초등학교 16개가 목표”
2 1여 년에 걸쳐 완공된 타루투 휴먼학교 준공식. 아이들은 튼튼하고 깨끗한 학교와 함께 학용품 일체, 최신 컴퓨터까지 선물받았다.
2 1여 년에 걸쳐 완공된 타루투 휴먼학교 준공식. 아이들은 튼튼하고 깨끗한 학교와 함께 학용품 일체, 최신 컴퓨터까지 선물받았다.
언제나 십시일반(十匙一飯)의 힘은 강하다. 엄 대장이 쾌척한 4000만 원을 기반으로 100여 명의 사회 각계각층 사람들이 힘을 보탰다. 파라다이스그룹은 엄 대장의 뜻을 높이 평가해 그룹빌딩 내 사무실을 무상으로 재단에 내줬다.

현재 재단에는 100만 원의 후원금을 내고 가입해 재단의 사업이 있을 때마다 주머닛돈을 아낌없이 내놓는 이사가 77명, 한 달에 1만 원 이상 후원하는 회원이 80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이 내는 후원금이 쓰이는 엄홍길휴먼재단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네팔 고산지역 오지에 초등학교를 짓는 것. 이름은 ‘휴먼학교’다. 해발 4000m 이상 고지에는 산을 넘고 넘어 3시간 동안 등교했다가 수업을 받고 다시 그 험한 길을 돌아오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워낙에 높은 지대이다 보니 건축 자체가 용이하지 않아 학교 짓기가 어렵기 때문. 게다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50달러인 ‘먹고 살기 힘든’ 나라 네팔에서 아이들의 교육과 의료시설은 정부의 중요 관심사가 아니다.
3 엄홍길 대장이 네팔 아이들과 함께 준공식을 축하하고 있는 모습. 네팔 현지에서 그는 ‘엄 사부’로 불린다.
3 엄홍길 대장이 네팔 아이들과 함께 준공식을 축하하고 있는 모습. 네팔 현지에서 그는 ‘엄 사부’로 불린다.
“1년에 하나 꼴로 완공했어요. 첫 학교는 해발 4060m의 팡보체 지역에 지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건립된 학교죠. 둘째가 올 2월에 완공한 타루투 휴먼학교이고, 셋째는 남부 평야지대인 룸비니 지역인데 현재 10% 정도 공사가 진척됐어요.

모두 해발 4000m 이상의 고산지대죠. 말이 쉽지 4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에요.

학교 하나 짓는데 보통 1억8000만 원에서 2억5000만 원 정도가 들어가는데, 자재 구입과 운송비가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지대가 높다 보니 헬기로 자재를 일정 고도까지 옮겨놓고 거기서부터는 인부들이 등짐을 지고 꼬박 3일을 올라가야 하거든요.”

그 지난하고도 고생스러운 시간 끝에 팡보체에 신축된 신식학교는 80여 명의 아이들을 맞이했고, 타루투 휴먼학교는 200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희망의 공간을 선물했다. ‘학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민망했던 허름하고 좁은 건물들은 깨끗하고 튼튼한 교실, 책걸상과 함께 최신식 컴퓨터가 구비된 컴퓨터실,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춘 근사한 학교로 거듭났다.

엄홍길휴먼재단은 여기에 조금 더 욕심을 냈다. 학용품 지원은 물론 교사들의 월급까지 지원한다. 학교 주변의 마을 주민을 위해 의료시설을 만들어 재단이 채용한 간호사를 상근시키고 있다. 한국 의료진과 현지 무료 진료봉사 활동도 병행한다. 의료봉사를 갈 때면 새벽부터 몰려온 주민들로 마을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기 일쑤란다.

“제가 16좌를 완등했듯 네팔에 16개의 학교를 짓는 것이 목표예요. 이제 겨우 2곳을 완공했으니 갈 길이 더 멀죠. 저희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껍데기(학교건물)만 지어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하드웨어에 걸맞은 소프트웨어 지원까지 책임지고 있어요. 학용품, 교사, 간호사 월급 충당은 물론 부족한 것이 없는지 네팔 현지 지부장과 함께 항시 체크하고 보충합니다. 저희 재단 이사 자녀 중 한 학생은 매월 8만 원을 후원하고 있어요. 교사들 월급으로 쓰이기 바란다면서요.(웃음)”
“저는 아직도 17좌에 도전 중입니다. 16좌를 정복하고 나서 넘어야 할 다음 ‘산 ’이 엄홍길휴먼재단이었던 거죠.”
“저는 아직도 17좌에 도전 중입니다. 16좌를 정복하고 나서 넘어야 할 다음 ‘산 ’이 엄홍길휴먼재단이었던 거죠.”
‘인생의 17좌 ’도전은 현재 진행 중

꽤 많은 한국 비정부기구(NGO)에서 학교를 지어주고 있어서인지 네팔 정부에서도 처음엔 휴먼학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둘째 학교 준공식 때는 네팔 대통령이 엄 대장을 친히 초청하기에 이르렀고, 네팔 정부의 공보장관은 “학교 컴퓨터실이 내 사무실보다 낫다”며 놀라움과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처음 보는 근사한 건물은 물론 시소, 미끄럼틀, 급수대가 갖춰진 학교에 누구보다 환호한 이는 역시 아이들이다. 비포장도로의 아슬아슬한 산길을 세 시간씩 걸어 다녔던 아이들에게 마을 근처에 있는 신식학교는 꿈이자 조금 더 밝은 미래다.

“첫째 학교를 지을 때 현지에 있는 한국인 선교사에게 진행을 부탁했는데, 문제만 너무 많고 진척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현재의 네팔 지부장인 홍순덕 씨를 급파해서 마무리했는데, 지부장이 그때 이후 2년 동안 한국에 못 들어오고 있어요. 일이 너무 많아 늘 미안하죠.

첫째 학교는 후원금과 이사들의 십시일반 성금으로 충당했지만, 둘째는 라이온스 354D지구에서 1억 원을 쾌척해 도움을 줬습니다. 현재 공사 중인 학교에는 ‘밀레’라는 아웃도어 회사에서 1억2000만 원을 지원했어요. 많은 돈이 들어가다 보니 기업들의 관심과 후원이 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진 않습니다. 산은 힘들어도 혼자만 꾸준히 오르면 되지만, 재단 일은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 어떨 땐 너무 힘들어서 다 내려놓고 당장 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도 있어요. 하하하.”

그래도 그가 학교 짓는 일을 멈추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힘든 과정을 겪은 뒤 학교 준공식을 할 때는 8000m 고봉 등반을 서너 번 실패하다가 성공한 것 같은 만족감이 훈훈한 위로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히말라야의 신과 했던 약속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지, 마지막은 이미 엄홍길휴먼재단을 히말라야 16좌 다음에 정복해야 할 ‘인생의 17좌’로 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뉴질랜드의 산악인으로 19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에드먼트 힐러리 경이 남긴 ‘나눔’이 영향을 끼쳤다. 힐러리 경은 2008년 작고하기 전까지 셰르파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해발 3750m의 남체마을 쿤중 지역에 학교와 병원을 짓고 열악한 도로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교량공사를 해 주는 등 히말라야와 히말라야 사람들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다. 엄 대장에게 그는 롤모델인 셈이다.

“저는 아직도 17좌에 도전 중입니다. 16좌를 정복하고 나서 넘어야 할 다음 ‘산’이 엄홍길휴먼재단이었던 거죠. 휴먼스쿨 16개 완공 후에 할 프로젝트도 벌써 구상 중이에요. 가끔은 개인생활을 할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몸이 바쁩니다.(웃음)”

이제야 털어놓자면 그날의 인터뷰는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긴 뒤 시작할 수 있었다. 앞서 진행되고 있던 방송 인터뷰가 지연됐던 것이 첫째 이유요, 둘째는 엄 대장을 찾아온 희수(喜壽)의 할머니 한 분 때문이었다. 어르신은 30분도 넘게 엄 대장과 심층(?) 인터뷰를 하고서야 자리를 떴다.

‘엄홍길’이란 이름만 걸어 논 단체가 아니란 사실을 확인한 후 할머니는 오래도록 모았을 쌈짓돈 1500만 원을 쾌척했다고 한다. 마침내 기자와 마주한 엄 대장은 주방용 투명 비닐봉지에서 꺼낸 짙은 다홍색 포장의 홍삼캔디 하나를 뜯어 입에 넣었다.

물론 기자에게도 권했다. 홍삼캔디를 입에 물고 “할머니께서 이걸 이렇게 싸 오셨어요”라며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서 ‘엄 사부’의 모습이 읽혔다. 얼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삶의 숙제’를 재빨리 발견한 그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일 게다. 엄홍길휴먼재단 후원 문의 02-736-8849(50)


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
사진 제공 엄홍길휴먼재단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