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재테크] 거라지 와인의 매력
거라지 와인(garage wine)은 이름 그대로 garage 즉, 차고에서 만든 와인을 말한다. 일반적인 보르도 와인은 샤토(Chateau)에서 만들어야 그래도 제대로 된 와인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와인 이름에 샤토라는 단어가 붙으려면 포도밭과 와인 생산시설, 인부들의 숙소, 와인 저장시설들이 완비돼 있어야 하고, 특별히 그 샤토에서 병입까지 완료돼야 한다.

포도밭은 경작하지만 와인 생산시설이 없는 포도재배업자는 포도를 네고시앙(Negociant)에게 넘기는 것으로 자기의 역할을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 와인생산은 네고시앙이 담당한다.

이런 일반적인 관행을 깨고 수확된 포도를 자신의 차고에 마련한 조그만 와인 생산시설로 옮겨 실험적인 와인을 만들어낸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거라지 와인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장 뤽 튀느뱅(Jean-Luc Thunevin)이다.

물론 그에게도 전임자는 있었으니 1970년대 말에 보르도 포므롤 지역에 2헥타르밖에 안 되는 조그만 샤토 르 팽(Chateau Le Pin)을 만든 벨기에 사람 마르셀과 제라르 티앙퐁이다.

튀느뱅은 이 샤토 르 팽을 시음해본 이후 ‘이것이 보르도 와인의 미래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만의 제조방법으로 자신의 차고에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989년에 탄생한 와인이 바로 샤토 발란드로(Ch. Valandraud)다.

1헥타르밖에 안 되는 작은 포도밭에서 생산된 와인을 자신의 차고에서 자신의 손과 발로 만들었다. 이런 방식의 와인생산은 많은 노동력의 투입에 비해 산출물이 적다. 하지만 품질은 탁월하다.
[와인 재테크] 거라지 와인의 매력
거라지 와인의 시조, 장 뤽 튀느뱅

튀느뱅이 와인을 생산한 이후 프랑스에서는 거라지 와인 열풍이 불었다. 라 몽도트(La Mondotte), 라고므리(La Gomerie), 르 돔므(Le Dome), 레 아스테리(Les Asteries), 르 카레(Le Carre), 키노 랑클로(Quinault L’Enclos), 롤 발랑탱(Rol Valentin), 바르드 오(Barde-Haut), 그라시아(Gracia), 레르미타주(L’Hermitage), 그리고 마로잘리아(Marojallia) 등의 와인이 탄생했다.

이런 와인들을 영어로는 ‘거라지 와인(garage wine)’, 프랑스어로는 ‘뱅스 뒤 거라지(vins du garage)’라고 부른다. 이렇게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을 ‘거라지스트(garagistes)’라고 한다.

와인업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국인 와인시음 전문가인 로버트 파커는 1995년 샤토 발란드로가 보르도 와인 중 가장 고가인 샤토 페트뤼스(Ch. Petrus)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했다.

이후로 튀느뱅은 유명인사가 돼 심지어는 파커나 젠시스 로빈슨(영국의 여류 와인시음 전문가로 파커와 필적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도 그를 만나려면 3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다.
[와인 재테크] 거라지 와인의 매력
10헥타르 포도밭에서 생산하는 6가지 와인

튀느뱅과 그의 아내 뮈리엘 안드로(Murielle Andraud)는 이후 조금씩조금씩 포도밭을 사들여 10헥타르의 포도밭을 경작하고 있으며, 6가지의 다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1) 샤토 발란드로(Ch. Valandraud)
2) 샤토 발란드로 카셰르(Ch. Valandraud Casher)
3) 비르진 드 발란드로(Virginie de Valandraud)
4) 더 트루와 드 발란드로(the 3 de Valandraud; 샤토 발란드로와 비르진 드 발란드로의 세컨드 와인)
5) 블랑 드 발란드로 뉘메로 앙(Blanc de Valandraud N° 1)
6) 블랑 드 발란드로 뉘메로 드(Blanc de Valandraud N° 2)
[와인 재테크] 거라지 와인의 매력
특등급 와인의 생산 방식마저 바꾼 역사적인 사건

튀느뱅이 새로운 와인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거라지 와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것은 와인 애호가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반가운 일이다.

전통적인 보르도 특급 와인은 숙성돼 마시기 적당한 시점이 되기를 기다리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로빈슨은 보르도의 메도크 1등급 와인에 대해 15년에서 20년, 길게는 30년이 시음의 적당한 시기라고 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 들어 가장 좋은 빈티지로 각광받는 2009년 빈지티 와인의 경우 15년 후면 2024년이 돼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특등급 와인이야 이 정도 재고를 유지할 자금 여력이 있겠지만 그보다 자금이 넉넉하지 못한 샤토들은 저장에 한계가 있다. 이런 환경은 샤토뿐 아니라 와인 소비자들에게도 그리 탐탁한 일은 아니다.

거라지 와인이 추구하는 것은 소규모 포도밭에서 최선의 노력을 들여 포도를 경작하고 이를 또한 최대한 세심하게 생산해 탁월한 와인을 생산하는 것이다. 여기에 특등급 와인의 이 같은 단점을 보완해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마실 만한 상태의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거라지 와인이 장기 보관이 어려운 것 또한 아니다.

로빈슨의 시음노트를 보면 샤토 발란드로의 와인은 대부분 수확연도로부터 6~7년이 지나면 시음 적령기에 이르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1990년 빈티지 이전의 보르도 특등급 와인들은 대부분 수확연도로부터 15~20년이 지나야 시음적령기에 이른다.

좋은 와인은 마시기에 적당한 시점이 되려면 적어도 15년에서 20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비슷한 품질의 거라지 와인 샤토 발란드로가 나오자 상황이 바뀌었다. 6~7년만 기다려도 좋은 와인을 시음하게 된 것이다. 와인업계에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보르도 특등급 와인 생산업자들도 이런 트렌드를 눈치 채고 21세기에 들어서는 시음 적령기가 훨씬 빨리 도래하는 와인들을 생산하고 있다. 7~10년이 지나면 마실 수 있는 와인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규모가 작은 샤토 발란드로가 거대한 보르도 특등급 와인들의 생산방식을 바꾸어놓은 작지만 위대한 사건이다. 그 덕분에 와인 소비자들은 꿈같은 와인을 살아 생전에 맛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가 직접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이디어로 만들어낸 새로운 개념의 와인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배드보이(Bad-Boy)다. 파커는 튀느뱅에게 ‘배드보이’라는 별명과 ‘까만 양’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만든 또 하나의 실험적 와인이 바로 배드보이다.

로트칠드 가문에서 특등급 와인 이외에 저렴한 대중적 와인을 만들기 위해 무통 카데를 만들었던 것처럼 튀느뱅도 저렴하고 대중적인 와인으로 배드보이를 만들었다.

전통을 사랑하는 생테밀리옹에 기반을 둔 와인이 이토록 파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다. 이 와인의 라벨에는 까만 양이 불량스럽게 짝다리를 짚고 서서 ‘차고(GARAGE)’라고 쓰인 간판에 기대고 있다. 필자는 배드보이의 라벨을 보며 그 까만 양이 보르도 특등급 와인을 긴장시킨 건방진 배드보이 튀느뱅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김재현 이사(하나은행 WM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