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언제나 즐겁다. 무더위에 지쳐도 우리에겐 여름휴가가 있으니까. 봄이나 가을, 겨울에도 휴가를 가는 외국 사람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1년 내내 기다리는 귀한 여름휴가.

그런데 다들 여름휴가 계획은 슬슬 세우고 계신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는다고 국내외 여행업계와 항공업계에서는 벌써 얼리버드 패키지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보기만 해도 시원한 그림들을 함께 만나보자.
[강지연의 그림일기] Early Summer, 가슴 뛰는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Women running on the beach), 1922년, 파리 피카소 박물관 소장

온통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두 여인이 손을 잡은 채 해변을 질주한다. 뒤로 한껏 젖힌 머리와 쭉 뻗은 팔다리, 큼직한 손과 발, 그리고 한쪽 젖가슴을 풀어놓은 그녀들의 모습은 원시시대의 다산(多産)과 풍요로움을 간직한 채 끝없는 자유를 갈망하는 듯한 느낌이다.

맨발로 해변을 내딛는 그녀들의 달리기는 언제쯤 끝이 날까. 눈부신 바다는 그녀들에게 끝없이 내달리라고 말한다. 그들을 속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여인들의 모습은 언뜻 신화적 소재를 연상케 한다. 필자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쌍둥이좌 카스토르와 폴룩스가 생각난다. 백조로 변한 제우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를 유혹해 낳은 쌍둥이 형제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어딜 가든 늘 함께하는 우애가 깊은 형제였다.

형 카스토르가 먼저 죽자 동생 폴룩스가 슬퍼하며 제우스에게 간청해 결국 두 개의 별자리로 하늘에 함께 남게 됐다는 이야기인데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느낌이고 실제로 파블로 피카소가 카스토르와 폴룩스를 염두에 두고 그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카소가 이 시기에 그를 거장으로 만들어준 입체주의보다 신화적 소재를 재해석한 고전주의에 잠시 흥미를 가졌다는 점이다.

피카소는 로마여행 이후 이 그림과 같은 시기에 신화적 소재를 연상케 하는 몇 가지 작품을 더 제작했다. 찬란한 과거의 유물을 간직한 로마는 피카소에게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선사한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하늘과 맞닿은 바다는 답답한 일상 속 우리에게 언제나 시원한 자유를 선사한다. 다가오는 여름, 바다로 떠날 계획이 있는지. 그렇다면 그림 속 여인들처럼 끝없는 자유를 느껴보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우리의 인생과 비유하자면 여름은 아직 중년 이전 청춘의 시기가 아닐까. 한없이 내달리진 못하더라도 맨발로 해변을 느끼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는 상상만 해도 마음은 벌써 여름 한가운데에 있다.
[강지연의 그림일기] Early Summer, 가슴 뛰는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오베르 근처 평원>(The plain near Aubers), 1890년,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소장

여름엔 바다만 있는 게 아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여름날의 산과 들은 지친 눈과 마음을 쉬게 해준다. 뭉게구름이 크게 펼쳐진 하늘 아래 초록빛 풀들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매미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여름은 가장 뜨거운 계절이지만 또한 가장 편안한 계절이기도 하다. 그림 한쪽에 있는 오두막에 앉아 시원한 수박 한 쪽 쪼개먹고 싶을 정도로 그림 속 여름은 목가적인 분위기다.

빈센트 반 고흐가 오베르에 도착한 것은 1890년 5월 21일이었다. 7월 23일에 쓴 편지에서 고흐는 이 그림의 스케치를 완성했다고 이야기한다. 여름날의 오베르 들판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 본다.

오베르는 그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으로, 이곳에 오기 전까지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발작과 안정의 상태가 반복되고 있었다. 오베르에서 그렸던 고흐의 그림을 보면 생애 마지막으로 잠시 평온을 찾은 듯 보인다.

그는 약 두 달간 오베르에 머물렀으며 오베르에서의 여름은 그의 인생에서 보낸 마지막 계절이었다.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다시 우울증이 도진 그는 7월 30일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오베르에 머물렀던 그의 마지막 여름은 비교적 안정된 모습이었다. 사이프러스 나무와 밀밭 등을 소재로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숨을 거두었을 때 그의 나이 37세.

그의 인생은 아직 여름이었다. 초가을로 접어들기도 전이었다. 그만큼 뜨거웠으며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다간 고흐와 여름은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강지연의 그림일기] Early Summer, 가슴 뛰는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막스 리베르만(Max Liebermann), <수영하는 소년들>(Boys bathing), 1898년,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 소장

바다로 뛰어드는 소년들, 그들에게서 눈부신 청춘이 느껴진다. 물속에서 나와 옷을 입고 있는 몇몇 소년들을 보아 하니 곧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 때문인가 보다. 여름 날씨는 변덕스러워 언제 장대비가 쏟아질지 모른다.

아직도 나올 생각을 않고 첨벙첨벙 즐거워하는 소년들의 모습도 보인다. 하긴 이미 물속에 있으니 비를 좀 맞더라도 대수는 아니리라. 어린 소년들의 누드와 여름은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아직 앞날에 대한 불안과 걱정보다는 지금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려야 할 때, 여름은 그런 계절이다. 누군가는 겨울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개미가 아닌 이 순간을 즐기는 베짱이 같은 태도를 나무랄지도 모르지만 소년들의 청춘은 여름과 함께 반짝반짝 빛이 난다.

언젠가 그들이 자라서 지금 이 순간을 추억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인생의 절반이 지나 중년기에서 장년기로 접어들 때도, 황혼이 깃든 노년기에도 그들의 이 순간은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강지연의 그림일기] Early Summer, 가슴 뛰는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조르주 레멘(Georges Lemmen), <에이스트의 해변>(Beach at Heist), 1891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석양이 드리워진 해변은 꿈처럼 아름답다. 하늘은 붉은빛과 보랏빛으로 물들고, 구름과 배는 수직으로 멋진 대비를 이룬다. 연한 에메랄드빛 바다와 황금빛 해변은 어느 풍광 좋은 휴양지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림을 보면서도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감탄이 나올 법하다.

이런 석양을 어디 가면 볼 수 있을까. 조르주 레멘의 눈에 비쳤던 벨기에 에이스트의 해변이 궁금해 언젠가 꼭 저곳에 가보리라 마음먹기도 했었다. 점묘법으로 촘촘히 표현된 풍경은 쇠라를 연상케 하지만, 레멘의 그림은 쇠라보다 더욱 선명하면서도 아름답다.

그는 벨기에 태생의 화가로 풍경화와 인물화에 점묘법을 사용했으며 쇠라로 대표되는 신인상주의를 충실히 계승했다. 빛의 아름다움은 촘촘한 점으로 나타나 마치 공기 중에서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덧 여름이 꿈처럼 흘러가 버린 것 같다. 이제 휴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눈부셨던 여름은 지나갔지만 여운은 남는다. 상상 속 에이스트의 해변에서 그 여운의 마지막 자락을 잠시 잡고 서있다. 가는 여름이, 시간이 아쉬워서다.

초여름 우리가 꿈꾸는 여름휴가는 어떤 모습일까. 눈부신 햇살과 파란 하늘, 혹은 평온한 숲과 들녘, 언제든 뛰어들 수 있는 바다, 저녁에 드리워진 석양까지. 그림을 보며 나의 여름휴가를 상상한다. 늘 바쁜 일상에 쫓기듯 살지만 1년에 단 한 번은 사랑하는 가족과 즐기는 아름답고 여유로운 그 시간을 말이다. 오늘, 다가올 우리들의 여름휴가를 미리 상상해보자.

강지연 _ 교사. <명화 속 비밀이야기>, <명화 읽어주는 엄마> 저자.
네이버 블로그 ‘귀차니스트의 삶(http://blog.naver.com/oilfree07)’ 운영. oilfree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