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균 (주)화남피혁 대표이사 회장

‘화합하고 신뢰하며, 정직하고 겸손하며, 노력하고 감사하자.’

30년을 훌쩍 넘기는 세월 동안 피혁산업에 종사해 온 여우균 (주)화남피혁 회장은 석 줄의 사훈(社訓) 가운데서 맨 아랫줄을 가장 강조하며 읽었다. 9년 전 사재로 ‘이우장학회’를 설립해 매년 고향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이유,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화남피혁과 자신의 ‘오늘’을 안겨준 이 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작은 발걸음은 지금 큰 ‘울림’이 돼 돌아오고 있다.
[Noblesse Oblige] 아름다운 ‘還元’을 실천하는 재미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 안에 위치한 (주)화남피혁의 본사 겸 제1공장을 찾은 날은 봄 날씨라고 하기엔 무색할 정도로 흐린 날이었다. 두터운 코트 차림으로 집무실에 들어선 기자를 여우균 회장은 환한 웃음으로 맞으며 달짝지근한 ‘꽃다방’ 커피를 대접했다.

“참, 오늘 인터뷰하러 오셨는데, 그러면 이 점퍼는 별로일 것 같네요. 잠시만요, 금방 갈아입고 나올게요.”

감색 슈트로 갈아입고 나온 여 회장과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갈 가벼운 화두를 꺼내려던 찰나, 그는 이미 전화상으로도 수없이 반복했던 얘기를 다시 꺼낸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인터뷰를 해도 되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잡지에 인터뷰 할 정도가 되려면 훌륭한 인물이어야 하는데, 제가 뭐 한 것도 없고….”

오랜 기간을 설득한 끝에 만난 그가 기자를 반갑게 맞으며 옷을 갈아입을 때 안심할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지원군을 요청했다. 여 회장의 아들이자 대표이사 사장으로 화남피혁을 이끌고 있는 여승태 씨가 배석(陪席)하고 나서야 준비했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1인당 500만 원 ‘통 큰’ 장학금 지급

3녀 1남 중 막내인 아들 여승태 사장이 화남피혁에 합류, 경영수업을 한 지도 8년 째. 그는 미국에서 배운 선진 경영 노하우로 화남피혁에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3녀 1남 중 막내인 아들 여승태 사장이 화남피혁에 합류, 경영수업을 한 지도 8년 째. 그는 미국에서 배운 선진 경영 노하우로 화남피혁에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화남피혁은 여 회장이 1986년에 창업한 회사로 신발, 가방, 소파 등에 쓰이는 피혁원단을 생산하는 회사다. 현재는 국내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의 신발 피혁원단 공급을 비롯해 유럽, 미국 등지의 유명 브랜드 캐주얼화 피혁원단 수출을 주로 하고 있는데, 연 평균 매출이 7000만 달러에 이르는 내실 있는 중소기업이다.

대한민국 국군들이 신는 군화에 쓰이는 가죽 원단의 3분의 1 정도를 납품하기도 하는데, ‘신발지’라고 통용되는 신발 피혁원단 공급업체로서는 국내 1위 기업이다.

올해로 36여 년째 피혁산업에 종사해 온 여 회장은 창업 이래 괄목할 만한 매출 성장으로 여러 차례 무역의 날 수출의 탑을 수상했고, 성실납세자로 대통령 표창도 받은 기업인이다. 주말까지 반납하며 일했던 지난 시간의 땀이 일군 성과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 아니었나 싶습니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회사가 무리 없이 꾸준히 성장해왔거든요. IMF 때도 수출을 위주로 하는 사업이다 보니 오른 환율 덕에 흑자폭이 더 컸고요. 그런데, 이게 다 남의 도움 받아서 이룬 거 아니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또 사회가 도와준 덕분이에요. 그런 도움을 받은 저는 그야말로 행운아지요. 그러니 늘 행복합니다.(웃음)”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 ‘허허’ 웃는 너털웃음이 이웃집 어르신 만난 것처럼 편하다. 300여 명의 직원들에게 참으로 인기 많은 회장님이겠다 싶다. 누굴 만나도 위아래 없이 똑같이 대하다 보니 그는 주거래 은행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높단다. “적게 벌어도 사람들한테 잘해서 관계를 유지해야 오래 간다”는 말은 아들인 여승태 사장에게도 항상 강조하는 얘기다.

여 회장에게 “무슨 거래를 20~30년씩 하느냐”고 물으면 실례다. 보통 인연을 맺으면 20~30년은 보통이기 때문이다. 한번 믿으면 최선을 다하고, 그러니 애써 바꿀 이유도 없단다. 이는 ‘사람’이야말로 보이지 않은 ‘재산’이라고 믿는 그의 신념에 기반한다.

그런데 여 회장이 안산 본사에서보다 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그의 고향인 대구 달성군이다. 달성군하고도 가창면 정대리란 산골 출신으로 매출 7000만 달러의 기업을 이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2002년 사재 10억 원을 출연해 ‘이우장학회’를 설립, 9년째 고향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처음엔 가창면 학생들에게만 혜택을 줬지만 소문이 나면서 달성군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1인당 500만 원씩 ‘통 큰’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베풀고도 살아야지 돈만 벌며 살아서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어요. 그러다 어릴 적 선친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선친께서 학자였는데, 시골이라 학교도 못가는 아이들을 모아 작은 분교를 설립해 신식교육을 시켰거든요. 나중에는 시골에 아이들이 아예 없어져 폐교되고 말았지만요. 당시 달성군에 열두 개의 면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창면이 가장 어려운 동네였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고향 학생들을 위해 장학사업을 해야겠다는 거였습니다. 2002년에 선친의 호를 따서 ‘이우장학회’라는 이름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했는데, 해 보니까 참 재미가 있어요. 남한테 베푼다는 것이 진짜 좋더라고.(웃음)”

애초에는 가창면 학생들에게 지급했던 장학금이 차차 달성군 전체로 확장됐고, 전남 모 지역 군수로부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뒤로는 지역을 전국으로 확장하기 위해 정관 수정까지 해뒀다.

장학금 주는 ‘재미’에 푹 빠진 여 회장은 2004년과 2008년에 10억 원씩 추가 출연해 전체 출연금을 30억으로 늘였다. 물론 세 번에 걸쳐 증액된 출연금은 모두 여 회장의 사재다. 매년 2월에 주어지는 장학금은 출연금의 이자수익이다.

“출연금 50억 달성하면 해외 유학도 지원할 터”

여우균 회장은 이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주고자 ‘통 큰’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이우장학회 10주년이 되는 2013년에는 총 출연금 50억 원을 달성해 해외 유학도 지원할 생각이다.
여우균 회장은 이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주고자 ‘통 큰’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이우장학회 10주년이 되는 2013년에는 총 출연금 50억 원을 달성해 해외 유학도 지원할 생각이다.
“1인당 200만~300만 원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어요. 대학교 한 학기 학비가 너무 비싸잖습니까. 부모 신세 안지고 공부하려면 500만 원은 돼야 할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일단 장학금 액수가 높아야 학생들이 악착같이 공부를 해요.(웃음) 이우장학회 장학금은 평점 4.0 이상 돼야 받을 수 있거든요. 경북대에 다니는 한 학생은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어요. 1회 장학금 수혜자 가운데 검사도 나왔어요.”

올 2월에 이우장학회에서 지급한 장학금 총액은 1억7500만 원. 1인당 500만 원 씩, 대학생 35명이 혜택을 받았다. 2004년부터 꾸준히 지급해온 장학금은 그 출연금이 커진 만큼 수혜 대상도 늘어났다.

하지만 여 회장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이우장학회가 10주년을 맞는 2013년에 사재 20억 원을 추가로 쾌척할 예정이다. 출연금 50억 원을 만들어 놓고 나면 해외 유학생까지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매년 장학금 수여식이 있는 2월은 달성군 사람들에게 ‘동네잔치’가 된 지도 오래다. 여 회장은 장학생들의 부모까지 초청해 호텔에서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고, 그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도 준비한다. 회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시작한 일이니 모든 준비에 드는 비용도 그가 개인적으로 부담하고 있다.

“학생들이 대기업에도 입사하고 그럴 때마다 보람이 크지요. 모쪼록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학생들 만날 때마다 잘 사는 사람만 보고 그렇게 안 된다고 성질 내지 말라고 합니다.

높은 데를 쳐다보되, 저 사람의 본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야지 그 사람하고 똑같이 안 된다고 한탄하거나 과욕을 부리면 좋을 게 없어요.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학생들이 나중에 또 다른 사람들한테 베풀고 살면 정말 좋은 일 아니겠어요.”

전 세계로 수출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브랜드의 신발을 만드는 데 쓰인다는 피혁원단이 보고 싶다는 말에 여 회장은 다시 양복 윗도리를 벗고 점퍼로 갈아입었다. 멀리서 보면 형형색색 아름다운 천 같은 원단들은 가까이 가자 특유의 가죽냄새를 진하게 풍겼다.

인터뷰 사진을 촬영하는 내내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던 그는, 피혁원단 앞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모습으로 세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한창 피혁원단 설명에 몰입한 그에게 장학사업 다음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하고 싶은 일이라. 정처 없이 실컷 여행 다니는 겁니다. 예전엔 무전여행이라고 했는데, 요즘엔 배낭여행이라고 하나요. 남들은 회장이니까 해외여행도 다니고 그러겠다 싶겠지만, 그 흔한 동남아 여행도 아직 한 번 못해봤어요.(웃음)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일에 너무 매달려 살았던 거지.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해 봤으니 슬슬 여유롭게 여행이나 다니는 게 꿈이에요.”

여행길엔 꼭 화남피혁이 원단을 수출하는 아웃도어 브랜드 신발을 신고 가시라고 제안했다. 기자의 제안이 싫지는 않았는지 그는 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우균

(주)화남피혁 대표이사 회장
(재)이우장학회 이사장
1996년 무역의 날 철탑산업훈장 수상
1999년 유망중소기업상(경기도지사)
2001년 납세자의 날 대한상공회의소 표창


글 장헌주·사진 서범세 기자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