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숙 크리스틴 갤러리 대표

최근 청담동 파모소 빌딩에 2호점을 연 크리스틴 갤러리의 박영숙 대표. 박 대표는 홍콩 최고의 라이프스타일리스트다. 홍콩에서는 그의 손이 닿으면 집값이 하루에 수천만 원이 오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항공사 승무원을 시작으로 지금이 있기까지 굴곡 많은 그의 스토리를 들었다.
[Success Story] 홍콩판 마사 스튜어트의 Dreams come true
2010년 말 열린 크리스틴 갤러리 2호점 오픈 기념식에서는 인도네시아와 아이티 이재민을 돕기 위한 대규모 바자회가 함께 진행됐다. 박영숙 크리스틴 갤러리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크리스틴 재단이 주최한 이 바자회에는 볼프강 곤잘레스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를 비롯해 약 400여 명의 문화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민간 갤러리가 개최한 바자회치고는 VIP가 유난히 많았는데, 여기에는 박 대표의 유명세가 큰 역할을 했다. 홍콩 상류층 여성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여성으로 꼽히는 그는 오래전부터 국제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다.

프랑스 낭만주의 스타일의 갤러리 2호점

바자회가 열리고 보름 후 크리스틴 갤러리에서 박 대표를 만났다. 갤러리에 들어서자 화사한 꽃과 그림이 기자를 맞았다. 메인 홀에는 여러 사람이 오가며 새하얀 테이블 위를 세팅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박 대표가 있었다.

저녁에 있을 미니 콘서트 준비로 정신이 없다고 입을 연 그는 20분 만 양해를 구한다며 자리를 떴다. 그 사이 갤러리 구경에 나섰다. 복층 구조의 갤러리는 그 자체가 작품처럼 보였다. 아이보리색을 기본으로 한 데커레이션이 화사했고 특히 큰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밝게 했다.

소규모 연회장을 연상시키는 2층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저녁 행사 준비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풍경에 잠시 넋을 빼앗긴 사이,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손질하며 박 대표가 걸어 나왔다.

“갤러리 어때요. 일반 화랑하고는 다르죠. 한국에서는 저를 마사 스튜어트와 자주 비교하시던데, 저랑 마사 스튜어트는 좀 달라요. 마사가 요리와 꽃을 중심으로 활동을 한다면 저는 삶 전반을 코디한다고 보시면 돼요. 물론 저도 시작은 꽃이었지만요. 지금은 타월에서 가구, 침실 세팅, 식기까지 모든 것이 제 관심사예요.”

우리의 생활 전체가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는 라이프스타일리스트라고 불린다. 처음에는 그도 라이프스타일리스트라는 이름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하자 주변에서 그를 아티스트로 대접했다.
“제가 손을 대면 모든 게 예술이 된다고 하는데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바닥 색을 정한 다음 전체 톤을 정하면 되는 거죠.”
“제가 손을 대면 모든 게 예술이 된다고 하는데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바닥 색을 정한 다음 전체 톤을 정하면 되는 거죠.”
무용학도에서 항공사 승무원으로 변신

그렇다고 박 대표가 미술 계통을 전공한 것은 아니다. 다섯 살 때부터 무용을 배운 그는 수도여사대(지금의 세종대)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무용은 음악부터 의상(드레스), 무대미술까지 다양한 예술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다. 그는 무용을 하면서 라이프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자질이 자연스럽게 키워졌다고 생각한다.

무용으로 다양한 문화적 소양을 키운 그에게 유학 시절은 꽃꽂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대학원에 다니던 중 그는 삼촌의 권유로 샌프란시스코 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크리스틴 박이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꽃을 좋아했던 그는 샌프란시스코 유학 시절 본격적으로 꽃꽂이를 배웠다.

첫 직장은 전공과 무관한 항공사 승무원이었다. 캐세이퍼시픽항공 승무원으로 1979년부터 91년까지 12년간 일했다. 12년간의 승무원 생활은 그에게 전 세계 문화를 접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유럽, 그중에서도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좋았다. 근무 일정을 바꿔서라도 한 달에 두 번은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그마저도 어려우면 휴가를 냈다. 그렇게 유럽의 미술관이며 박물관, 패션하우스 등을 유람했다.

12년을 그렇게 살다 보니 유러피언이 다 됐다. 당시 크리스찬 디올의 플로리스트 등 유럽의 예술인들과 교분도 쌓았다. 어떤 유럽인은 전생에 그가 프렌치였을 거라고 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예술품에 경도되면서 자연히 안목이 키워졌다. 자신만의 안목이 생기자 월급을 모아 작품을 하나둘씩 사들였다.

“개인적으로 르누아르를 좋아하는데, 그때 산 작품들은 내놓으면 손해예요. 가격이 계속 오르는데 되사려면 돈이 더 드니까요. 제가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어요. 스페인 노(老) 작가의 작품을 팔았는데, 자식을 잃은 듯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갤러리 스미스의 관장이 ‘팔면 손해’라고 했는데, 그 말의 뜻을 그때서야 알게 됐어요.”

결혼 이후 안목을 팔아 수백억대 자산 형성

호화 결혼식이 가져오는 폐단을 고치기 위해  그는 100만 원 결혼식 사업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100만 원 결혼식은 한국에서의 첫 라이프 스타일 제안인 셈이다.
호화 결혼식이 가져오는 폐단을 고치기 위해 그는 100만 원 결혼식 사업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100만 원 결혼식은 한국에서의 첫 라이프 스타일 제안인 셈이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던 박 대표에게 1988년 인생의 전환기가 찾아왔다. 한 남자를 만난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중국계 변호사였다. 그는 결혼 3년 후인 1991년 승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그때부터 라이프스타일리스트 크리스틴 박의 인생이 시작됐다. 이름도 ‘미세스 크리스틴 추’로 바뀌었다.

“항공사를 그만둘 때 이미 홍콩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난 상태였어요. 손만 대면 예술이 된다고 다들 그랬으니까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상류사회를 오랫동안 경험하면서 몸에 밴 거죠. 사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집을 꾸밀 때 가장 중요한 게 바닥이에요. 인테리어를 할 때 저는 베이식 컬러로 내추럴한 크림색을 써요. 그렇게 하면 웅장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 다음 거기에 맞게 가구를 들이고, 소품을 데커레이션하는 거죠.”

그의 진가가 여지없이 발휘된 사례가 몇 있다. 그는 1991년 한국 정부의 아는 분으로부터 한국총영사의 관사로 쓸 집을 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예산이 약 56억 원이라고 했다. 홍콩 시내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닌 끝에 안성맞춤인 집을 찾아냈다.

여섯 채로 구성된 빌라였는데, 은행이 소유하고 있었다. 총영사에게 빌라를 추천했더니 단독주택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기는 너무 아까워 그가 직접 매입했다. 처음부터 모두 보유할 생각은 없었다.

펜트하우스 두 채만 자신이 갖고 나머지 네 채는 팔 요량이었다. 그동안 모은 돈과 대출을 받아 총 58억 원에 매입했다. 그 뒤 6년을 거기서 살았다. 그러는 동안 홍콩을 거쳐 가는 세계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빌라에서 살며 그와 교류했다. 최종적으로 빌라를 팔고 나올 때 약 75억 원의 이익을 남겼다.

그 다음부터 “크리스틴 박이 손을 대면 하루에 집값이 3000만 원씩 오른다”는 말이 나돌았고, 부동산 전문가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다음 거처를 마련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40여 곳을 찾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75평의 아파트 두 채를 사서, 트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곳에서도 5년을 살았다. 당시는 홍콩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던 시기였는데, 다행히도 그의 아파트 가격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부동산에 문외한인 그가 부동산 전문가 뺨치는 투자를 해온 셈이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부동산을 투자수단이 아니라 집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에게 집은 부동산이 아니라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예술작품이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집을 예술품으로 보는 안목이 없다는 점이 그와의 차이점이다.

“제가 손보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흙속의 진주를 찾아서 빛이 나도록 닦아주는 것이죠. 굴곡진 곳은 탁 트고, 어두운 곳을 밝게 하면 되거든요. 여기 갤러리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척 밝잖아요. 제가 오기 전까지 거의 버려진 공간이었어요. 그런 곳에 빛을 들인 거죠. 일단 집은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 사는 사람도 긍정적으로 변하거든요. 그런 다음 블랙과 화이트로 조화를 주면서 조금씩 바꿔가는 거예요. 단순하죠.”

강제 이혼과 한국에서의 첫 번째 라이프스타일 제안

박 대표는 아파트를 처분한 뒤 아들을 위해 수영장이 있는 개인 주택을 구입했다. 38억 원 정도를 줬는데 지금은 200억 원을 호가한다. 하지만 2007년 6월 그는 어이없는 일을 당하게 된다. 남편이 느닷없이 이혼 소송을 제기하며 아들에 대한 접근금지 명령까지 받아낸 것. 뒤이어 2010년 3월엔 법원 집달리와 경찰들이 들이닥쳐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당시 이 사건은 홍콩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그는 전 남편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홍콩의 로펌, 법원, 의사, 경찰 등의 거대한 커넥션이 만든 조작극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그는 전 남편을 상대로 300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어이없이 쫓겨나 있는데 법원에서 집에서 나온 짐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어요. 안 그러면 폐기처분한다는 거예요. 가보니까 컨테이너 20개가량의 짐이 쌓여있더라고요. 밤새 정신없이 그림이며 물건을 분류했죠. 정리하다 보니 좋은 그림은 이미 빼돌렸더군요.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아침에 보니까 손이 온통 피범벅이 됐어요.”

지금의 크리스틴 갤러리는 그때 허겁지겁 싣고 나온 작품들이 바탕이 됐다. 2008년에는 영국 유명 로펌에서 크리스틴 재단을 만들어주었다. 지난 10여 년 그의 자선활동을 지켜 본 로펌에서 재단을 만들어 준 것이다.

재단 설립 이듬해 그는 서울에 크리스틴 갤러리 1호점을 냈다. 지인이 가진 건물의 빈 공간이었는데, 둘러보고 30분 만에 오케이를 했다. 그의 손을 거친 지금 갤러리 1호점은 주변의 명소가 됐다.

박 대표는 갤러리 2호점 오픈을 계기로 한국에서의 자선사업과 ‘100만 원 결혼식’ 사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100만 원 결혼식’은 한국의 호화판 결혼식 문화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박 대표의 첫 라이프스타일 제안이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