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출신의 전 국회의원 이계진이 서울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산골로 스며든 것은 1996년이다. 중풍에 걸린 노모와 허약한 아내를 위해 산골생활을 시작한 그는 15년째 아마추어 농부로 살고 있다. 최근 15년 산촌생활을 담은 책 <주말 농부 이계진의 산촌일기>를 펴낸 그가 시골집으로 기자를 초대했다.
[Life Balance] 주말 농부 이계진 전 국회의원, 흙과 땀으로 빚은 15년 산촌생활
이계진 전 국회의원은 관봉(觀峯)이란 호를 갖고 있다. ‘봉우리를 본다’는 뜻의 관봉은 아나운서 시절 선배들이 지어줬다. 경기도 인근에 있는 농장(그는 외부에 농장의 위치가 알려져 생활에 방해가 될까 봐 구체적인 지명은 가급적 삼가달라고 당부했다)의 이름은 호를 딴 ‘관봉농장’이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채 녹지도 않은 초겨울 아침, 관봉농장으로 향했다. 1시간 여 차를 달려 관봉농장에 들어서자 매실나무의 가지를 치던 그가 엉거주춤 일행을 맞았다. 훤칠한 체구에 사람 좋은 낯으로 악수를 청한 그는 “날이 춥죠”라며 거실로 일행을 안내했다.

바깥에 비해 조금 나을 뿐 거실도 따뜻한 기운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자리를 권하는 그의 복장도 조금 전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목에 수건을 동여맨 채였다.

“좀 춥죠. 어머님 생전에는 보일러를 돌렸는데 지금은 추위만 가실 정도로 지냅니다. 기름 값이 좀 비싸야죠. 요즘은 1드럼에 8만 원 가까이 하니까 그나마 나은데, 기름 값이 오를 땐 1드럼에 30만 원 가까이 오른 적도 있었습니다. 하자고 들면 기름을 못 땔 것도 없지만 왠지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밤에는 전기요를 까니까 웬만한 추위는 견딜 만합니다.”

산촌생활의 필요조건 Work, Water, 그리고 Wife

사람 좋은 낯을 하고 자리에 앉으며 그는 “가을걷이가 끝나도 농사일이란 게 끝이 없네요”라고 했다. 매실과 복숭아나무, 배나무 전지도 해야 하고, 이듬해 농사에 쓸 퇴비도 숙성시켜야 한다.

농사가 몸에 밴 농부처럼 말을 잇는 그의 옆으로 작은 다실이 눈에 들어왔다. 팽주 자리 옆으로 그가 써놨을 것이 분명한 <다연묵향>이라는 제목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법정스님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법정스님의 유발상좌다. 그 덕에 법정스님이 남긴 글과 뜻을 늘 그리며 살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도 스님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우리가 어쩌다 건강을 잃고 앓게 되면 우리 삶에서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인지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무엇이 그저 그런 것인지 저절로 판단이 된다’는 스님의 말씀이 특히 가슴에 와 닿았단다. 그는 아등바등 세사에 매달려 살면서 한자락 마음을 낸 산골생활을 위로한 말씀 같아 마음에 내내 담아두었다고 말했다. 세상을 떠난 지금도 스님은 늘 그의 곁에서 가르침을 주었다. 시골살이를 시작한 것도 스님이 추천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 <월든>(Walden)의 영향이 컸다.

시골에서 자란 많은 이들은 농촌에 대한 일종의 회귀본능을 갖고 있다. 원주가 고향인 그도 그랬다. 마침 방송국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터라 시골생활에 대한 동경심은 더욱 깊었다. 문제는 아내였다.

보통의 서울 여자인 아내가 시골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더구나 아내는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때 아내의 마음을 돌려세운 게 민족생활의학연구회 장두석 선생의 책이었다. 자연계에는 질병의 치유력이 있어 자연에서의 생활이 건강에 좋다는 장두석 선생의 책을 읽은 아내는 이어 <월든>을 읽고 시골생활을 해보자고 했다.

“시골생활에 필요한 3W가 뭔지 아세요. 노동력(work)과 물(water), 그리고 아내(wife)입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데는 아내의 협조가 큰 힘이 됐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었죠. 농사일은 전적으로 제가 책임진다는 거였죠. 처음부터 아내의 손을 빌리겠다는 생각이 아예 없었습니다.”

점심을 준비하던 아내가 그의 말에 힘을 실었다.

“지금도 제가 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남편이 모은 낙엽에 불을 붙이면 낙엽 타는 향이나 맡고 산길을 산책하는 정도예요. 가끔 심심하면 감자를 캐기도 하는데 재미삼아 하는 수준이지 농사라고 할 건 못돼요.”
[Life Balance] 주말 농부 이계진 전 국회의원, 흙과 땀으로 빚은 15년 산촌생활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흥얼거리며 호기 있게 시작한 산촌생활

기왕에 결심한 일이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방송생활을 하며 번 돈으로 땅을 사고 서둘러 집을 지었다. 건축 설계며 자재, 기본 조경 등은 모두 아내의 결정을 따랐다. 집 짓는 일이 여간 일이 아니라는 주변 충고를 받아들여 평당 400만 원, 당시로는 적지 않은 건축비를 주며 좋은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시공자는 마음 약해 보이는 부부를 이리저리 속여 부실공사로 일관했다. 그러나 저러나 공사는 끝이 났고, 그해 겨울 두 부부는 노모를 모시고 화계산(그의 이름에서 ‘계’자를, 아내의 이름에서 ‘화’자를 따와 그가 지은 이름이다) 골짜기로 스며들었다. 화계산 자락으로 들어서며 어찌나 흥이 나던지 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나 이제 전원으로 돌아가리. 전원이 황폐해가고 있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내 잘못으로 스스로 벼슬살이를 했고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괴롭혔거늘 어찌 혼자 한탄하고 슬퍼만 하겠는가? …중략…집으로 돌아가는 배는 출렁출렁 가벼이 일렁이며 표표히 부는 바람은 옷자락을 불어 날리고 있다. (이하 생략)’

호기롭게 시작한 시골생활은 그러나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사정도 모르고 산 땅은 예전 화전민이 일구던 묵정밭이어서 노모로부터 자주 “애비는 돈 주고 돌 샀구먼” 하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난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거친 텃밭을 위해 수십 대 분량의 흙을 퍼다 날랐고, 물이 부족해 지하수를 파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농사일은 오히려 괜찮았습니다. 아버님이 농업학교를 나오셨는데,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배운 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거기다 부지런을 떨었더니 한 3년 지나니까 농사가 몸에 익더군요.”

그는 자신이 하는 농사를 전업농과 구별해 ‘취미농’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가끔은 전업농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열심이다. 그의 농사는 4월 초순, 작은 술잔치인 ‘시농제’를 시작으로 봄 부침을 시작한다.

경작하는 땅이 제법 넓어 작물도 30가지가 넘는다. 고추, 상추, 쑥갓, 고구마, 참깨, 당근, 도라지, 더덕, 미나리…. 욕심을 있는 대로 부려 심고 가꾸는 것은 취미농사의 특징이다. 술에 시달려 상한 위장에 좋다는 말을 듣고 수개월간 임상실험을 끝낸 후 마를 심기도 했다.

‘신나는’ 농사를 시작한 초기 3~4년은 ‘농사일지’도 열심히 썼다. 언제 거름을 펐고, 그 값은 얼마며, 무엇을 심었고, 김매기는 언제 했는지 소상히 적었다. 뒷산에서 두릅 따는 시기, 야생자두라고 부르는 와일드 플럼 따서 술 담그는 시기, 약쑥을 뜯어말리는 시기 등을 모두 기록했다.

건달 농부들의 추수감사제 ‘옥토버 페스티벌’

농사일이 몸이 익을 즈음 동지도 생겼다. 그가 사는 모습을 보러왔다가 인연을 맺거나 소개를 통해 와서 농사 동지가 된 사람들이다. 그렇게 10년 동안 모여든 사람들끼리 ‘건농회’를 만들었다. 건농회는 ‘건달 농민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건농회는 제대로 된 농사꾼이 아니라 아마추어라는 겸양과 장난기가 뒤섞인 이름인데, 그의 말을 빌리면 ‘무논에 개구리 모여들 듯’ 화계산 골짜기에 모여든 나그네들의 모임이다.

회원 중에는 자영업자도 있고, 교장도 있고, 전무도 있고, 건축사도 있다. 하지만 건농회에서는 직함 대신 별호를 부른다. ‘농사를 좋아하는 신선’이라는 뜻의 ‘농선’, 외모가 헤르만 헤세를 닮아서 붙여진 ‘허만’, 웃으며 사는 모습이 아이 같다고 붙인 ‘여동’ 등 별호도 제각각이다. 평균 연령 60세의 남자만으로 구성된 건농회는 1년에 한 번 아내들을 불러 큰 행사를 치른다. 이름하여 ‘옥토버 페스티벌’. 건농회만의 추수감사제인 셈이다.

축제일이 잡히면 보름쯤 전부터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다.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옥토버 페스티벌! 10월 아무날’이라는 플래카드를 농장 입구에 내건다. 그리고 잔치가 벌어질 산벚나무 가지에 전등을 달고 모닥불을 지필 장작과 당일에 쓸 숯도 넉넉한지 살펴야 한다. 술이 모자라는 낭패가 없도록 소주는 짝으로 사다놔야 한다. 봄부터 담근 야생자두주, 매실주 등 과일주와 쑥술 같은 약술도 제대로 익었는지 살펴서 익었으면 깨끗한 병에 담아 예비해둔다.

“회원 중에는 사진 찍는 분, 색소폰 부는 분, 노래 잘하는 분들이 있어서 흥을 돋웁니다. 옥토버 페스티벌의 전통은 벌써 8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낙엽 타는 연기 속에서 지지고 볶고, 권커니 잣거니 다들 흥겹게 놉니다. 그때는 멀리서 들리는 비행기 소리도 정겹게 들립니다.”
[Life Balance] 주말 농부 이계진 전 국회의원, 흙과 땀으로 빚은 15년 산촌생활
건강과 삶의 길을 밝혀준 산촌생활

그렇다고 시골생활이 어디 즐거움만 있으랴. 농사일은 어떤 일보다 고되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특히 선거구인 원주와 서울, 농장을 오가는 삶은 고되기도 할 터다.

농사일이란 게 때를 놓치면 망치기 십상이다. 겨울 배추만 해도 그렇다. 영하 5도에 바람이라도 맞게 되면 아예 못쓰게 된다. 그런 날이면 한밤중이라도 농장으로 내려와 비닐을 덮어줘야 한다. 그뿐 아니다. 농장에는 그의 손을 기다리는 강아지며 채소 등 생명들이 그득하다.

그럼에도 그는 농사가 좋다. 농사를 일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농사를 운동처럼 하려고 애쓴다. 운동과 노동의 차이점은 운동은 다양한 근육을 쓰는 반면, 노동은 같은 근육을 반복적으로 쓴다는 점이다. 여기서 착안해 그는 농사를 할 때도 다양한 일을 요령 있게 한다. 오른팔로 호미질을 열 번 했으면 다음에는 왼팔을 쓰고, 허리가 아프면 허리를 펴고 일을 하는 식이다.

과욕 부리지 않고 일삼아, 운동 삼아 풀을 깎으면 집 주변과 밭을 멀끔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욕을 부려 지칠 정도로 일을 하면 되레 건강을 해칠 수가 있다. 아마추어 귀농자가 하는 짓이 대개 그렇다. 풀을 깎든 밭일을 하든 마음을 비우고 쉬엄쉬엄 하는 취미농사는 건강에 정말 좋다고 그는 믿는다.

계속 서울에 있었다면 지금처럼 건강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낮에 열심히 농사일하고 저녁 먹고 막걸리 한 잔,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곧바로 잠이 든다. 이런 생활에 불면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정직한 노동은 세상사의 시름을 씻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법이다.

“지난 도지사 선거 직후에도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선거에서 지면 기분이 정말 묘합니다. 거기 가만히 있으면 여러 상념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 것 같더라고요. 그날 오후에 바로 내려와서 호미를 들었습니다. 농사일을 하면서 그 시기를 잘 견뎠던 것 같네요.”

시골생활의 또 다른 장점은 생각의 속도를 조절하게 한다는 점이다. 서울생활은 세상 변화에 속도를 맞추느라 사색에 잠기기가 어렵다. 농사는 다르다. 성질 급한 사람은 싹이 나오지 않는다고 땅을 판다지만 좋은 농부는 싹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다. “또 하나, 농사는 일한 만큼 그 열매를 맺습니다. 오래 농사를 짓다 보니 다른 일도 다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농사든 정치든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