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웅

‘박제가 돼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시인 이상(李箱·1910~37)의 초상을 그린 꼽추 화가 구본웅(具本雄·1906~53)을 아는가. 구본웅은 평생의 친구 이상의 빛나는 시선을 거침없이 화폭에 올렸다. <친구의 초상>은 이상의 얼굴이다.

폐병으로 얻은 창백한 피부에 광기마저 서린 가늘고 긴 눈, 그 속에 희미하게 서린 절규의 핏발과 거친 턱수염, 칙칙한 배경과 두꺼운 외투, 아무렇게나 덮어쓴 모자, 굵은 파이프 담배 연기 사이로 문학과 인생과 고독, 그리고 절망을 오가던 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이다.
<친구의 초상>, 1930년대, 캔버스에 오일, 65×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친구의 초상>, 1930년대, 캔버스에 오일, 65×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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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초상>은 식민지 시대의 우울한 내면과 가학적이고 고뇌에 찬 지성의 초상이다. 구본웅은 이상의 외모를 통해 자학과 조소로 가득한 자기 내면의 풍경을 극명하게 표출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로 시작하는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처럼 난해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다만 거칠고 광기 어린 이 초상화는 구본웅의 대표작이 됐다.

조선의 로트렉
구본웅 사진.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의 눈에 담긴 것은 불구가 된 자신의 슬픔일까. 아니면 세상 사람에 대한 연민일까. 우리들의 슬픈 초상이다.
구본웅 사진.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의 눈에 담긴 것은 불구가 된 자신의 슬픔일까. 아니면 세상 사람에 대한 연민일까. 우리들의 슬픈 초상이다.
구본웅은 1906년 3월 7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해방 후 유도회 총본부회장을 역임한 구자혁(具滋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상산(商山) 김씨는 산후병에 시달려 핏덩이 아들 구본웅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황해도 연백으로 산후조리를 갔지만 4개월 후 세상을 등지고 만다. 구본웅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동네 사람들에게 젖동냥을 다녀야 했고 허약 체질로 어른들의 애를 태웠다. 세 살 무렵, 젖을 얻어 먹이고 집에 돌아와서 대청마루를 오르던 하녀가 등에 업힌 구본웅을 댓돌 위에 떨어뜨렸다.

돌 위에 떨어진 아이는 엄청난 충격과 아픔에 오랫동안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1년이 지나 아버지 구자혁은 아이의 척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치료를 위해 서울 본가로 돌아왔지만 구본웅은 이미 치유가 불가능한 곱사등이가 됐다는 진단을 받는다.

훗날 일본 유학을 하고 유럽의 인상파와 새로운 화풍을 접하면서 알게 된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Toulouse Rautrec·1864~1901)도 어려서 넘어져 부러진 다리가 성장장애를 일으켜 난쟁이가 됐고, 불구의 뒤뚱거림 속에 겪었던 세인의 따가운 시선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들은 구본웅을 ‘조선의 로트렉’이라 불렀는데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3. <푸른 머리의 여인>, 1940년대, 캔버스에 오일, 60.4×40.4cm, 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4. <여인상>, 1940년대, 나무에 오일, 23×15cm, 개인 소장
3. <푸른 머리의 여인>, 1940년대, 캔버스에 오일, 60.4×40.4cm, 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4. <여인상>, 1940년대, 나무에 오일, 23×15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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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과 이상의 우정

구본웅과 이상은 어릴 때부터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랫동네에 이웃해 살던 신명보통학교 동기동창이다. 이상보다 네 살 많은 구본웅은 몸이 불구이고 약해서 보통학교를 다니다 말다 하는 바람에 이상과 같은 반이 됐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꼽추인 구본웅을 따돌렸다. 그러나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 있었다.

항상 외롭고 우울해 보이는 이상(본명 김해경)이었다. 당시에 동급생 중에는 구본웅보다 몇 살 더 많은 학생들도 있었다. 그래서 같은 학년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이상은 젖비린내 나는 아이로 취급받았으며 적지 않은 급우들에게 존대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이상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 등의 작품으로 한국 근대문학을 황홀하게 했다. 하지만 그가 화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상은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31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을 출품해 입선까지 했다. 이 입선작은 이상이 ‘제비다방’을 개업했을 때, 구본웅의 <나부와 정물>과 함께 벽에 걸려있었다. 이상은 <친구의 초상>도 제비다방에 나란히 걸어두었다. 두 사람은 마음이 통해서 의기투합했지만 외모는 확연히 달랐다.
5. <나부와 정물>, 1940년대, 캔버스에 오일, 90×72cm, 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6. <정물>, 1927년, 캔버스에 오일, 71×5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5. <나부와 정물>, 1940년대, 캔버스에 오일, 90×72cm, 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6. <정물>, 1927년, 캔버스에 오일, 71×5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1940년대, 캔버스에 오일, 90×72cm, 삼성 리움미술관 소장 6. <정물>, 1927년, 캔버스에 오일, 71×5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구본웅은 꼽추로 작은 키에 인버네스 외투를 땅에 질질 끌고 다녔고, 이상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데다 까치집 같은 머리에 얼굴이 희고 털북숭이 수염 천지인데 겨울에도 흰 구두를 신고 다녔다.

두 사람이 걸어가면 동네 꼬마들이 곡마단의 서커스 홍보를 하는 줄 알고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구본웅과 이상의 우정은 각별했다.

이상이 경영하던 제비다방이 문을 닫은 뒤 새로 인수한 인사동의 카페 ‘쓰루’ 경영에도 실패하는 등 연이은 사업 실패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을 때도 도와주었고, 1936년 10월 이상이 그토록 갈망했던 도쿄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구본웅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비다방이 파산하고 집달리가 기물들을 거리에 내놓고 건물의 출입구를 봉쇄하기 직전, 1931년 ‘선전(鮮展)’에서 입선한 이상의 10호짜리 <자화상>을 떼어내 자기 화실로 옮겨 보관한 이도 구본웅이었다. 이상의 아내이자 훗날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의 아내인 김향안(본명 변동림)도 구본웅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당시 그들의 관계는 복잡했다.

구본웅의 계모 변동숙은 그녀의 아버지 변국선의 본부인 소생이고, 여동생 변동림은 소실 소생으로 나이가 26세나 차이가 났다. 자매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변동림이 폐병이 심한 여섯 살 연상 이상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구본웅의 계모이자 언니인 변동숙은 극구 만류했다.

그럼에도 변동림은 이상과 결혼했고, 6개월도 안돼 도쿄에서 남편 이상이 폐병으로 죽었다. 훗날 화가인 수화 김환기와 재혼한다고 했을 때, 언니 변동숙은 동생의 머리채를 잡아 뒤흔들 정도로 그들의 혼인을 극력 반대했다. 이에 흥분한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인연을 끊겠다며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김환기와 동거에 들어갔고 몇 년 후 정식으로 결혼했다.

경기여고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중퇴한 변동림은 엄청난 소설 애독자로 <구운몽>, <삼국지> 등을 거의 외울 정도로 수십 번 탐독했고, 뛰어난 기억력과 유창한 화술을 구사하는 재원으로 재주의 탁월함에 언제나 탄복할 정도였다고 한다. 변동림은 누가 뭐라 해도 시대의 인물이었다.

구본웅의 딸이자 발레리나 강수진의 어머니 구근모는 “불구의 몸이었던 선친이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던 모습이 어린 눈에도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고 회상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세 자매를 모두 예술가로 키웠다고 말한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예술가의 피가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꽃피우게 했나 보다.

시대의 새로운 화풍
<중앙청이 보이는 풍경>, 1940년대, 캔버스에 오일, 90×72cm, 개인 소장
<중앙청이 보이는 풍경>, 1940년대, 캔버스에 오일, 90×72cm, 개인 소장
, 1940년대, 캔버스에 오일, 90×72cm, 개인 소장">구본웅은 경신고보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의 세계에 입문했다. 구본웅이 경신고보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이상도 바로 이웃한 보성고보에 다니며 그림에 빠져들었다.

구본웅은 토요일에는 서양화로 일가를 이룬 고희동이 이끄는 YMCA의 고려화회에 나가 그림을 배웠다. 그는 1925년부터는 조각가 김복진에게 사사하며 회화와 함께 조각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1927년 5월 열린 제6회 조선미전에서 〈얼굴 습작>이란 조소로 특선에 올라 화단의 주목을 받은 구본웅은 이듬해 도쿄로 유학을 떠나 가와바타(川端)미술학교에 입학했고, 다음해 봄 일본대 예술전문부로 옮겨 공부하다가 졸업한 후 1934년 귀국했다.

1920년대 일본 화단은 후기인상파의 유습을 청산하며 마티스와 루오로 대표되는 야수파 운동이 크게 유행했다. 구본웅 역시 이런 일본 화단의 영향 아래에서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강렬한 원색을 쓰며 독자적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1931년 6월 그는 도쿄에서 제작한 유화 50여 점을 가지고 서울로 와서 동아일보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개인전에 관해 서양화가 김주경은 1932년 정초에 조선일보에 기고한 ‘화단의 회고와 전망’에서 “규비즘과의 중간층과, 포비즘과의 중간층과, 내지 익스프레셔니즘 또는 임프레셔니즘과의 중간층에 속하는 작품들도 병진(竝陳)돼 있었다”고 적었다. 구본웅이 그때까지 누구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못한 입체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양식을 골고루 실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본웅의 그림은 당시 도쿄 유학생들의 통과의례인 인상파를 넘어 세잔과 마티스 화풍이 가미되고 피카소의 큐비즘까지 등장하는 진취적이고 대담한 화풍을 만들어 갔다.

<친구의 초상>에서와 같은 독일 표현주의 화풍의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에서부터 <푸른 머리의 여인>에서 보이는 마티스의 인물 표현 같은 야수파적 경향, <나부와 정물>에서의 문자가 조형의 일부가 되는 피카소의 큐비즘적인 표현, <정물>에서 보이는 불안한 정물과 입체적이고 분석적인 세잔의 기법은 구본웅이 일본 유학에서 얼마나 새로운 화풍에 심취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모방과 학습의 분위기뿐 아니라 <여인상>에서는 조선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마치 공부를 열심히 한 착한 미대생처럼 정직하게 그려낸 조선 여인은 1930년대 독일제 카메라 라이카(Leica)로 찍은 흑백사진을 대하듯 세월의 분위기를 흠뻑 느끼게 한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와 맑은 눈매, 반듯한 이목구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조선 여인이다. 지금은 헐리고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는 <중앙청이 보이는 풍경>은 구본웅의 성격을 대하듯 대담하고 간단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상반신의 누드 <여인>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풍이라기보다는 독일 표현주의 화풍에 더 가깝다. 모네나 밀레처럼 전원과 목가적인 부드러움보다는 뭉크나 샤갈 같은 격렬함이 구본웅의 가슴속을 뜨겁게 했다. 식민지 시대를 관통한 허무주의가 한 몫을 했겠지만, 그보다도 구본웅 개인사의 불행과 불구가 그를 그토록 강하게 했으리라.

이는 마치 시인 박인환(1926~56)이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하며’라는 유서를 남기고 제2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에서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템스 강으로 뛰어내려 세상을 등진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1882~1941)의 생애를 6·25전쟁 이후의 황폐한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에 빗대어 쓴 시 <목마와 숙녀>처럼, 예술이든 문학이든 인생이든 사랑의 진리든 그 모든 것들이 떠나든 죽든,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쓰러지는 술병을 바라보아야 하는 불행한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했다.
필운동 풍경.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1940년대 지어진 한옥이 가을 햇살에 빛난다. 한 시대를 고독하게 스치고 지나간 화가의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최선호2010ⓒ
필운동 풍경.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1940년대 지어진 한옥이 가을 햇살에 빛난다. 한 시대를 고독하게 스치고 지나간 화가의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최선호2010ⓒ
시인이자 비평가인 김기림은 조선중앙일보의 기고문에 “구본웅의 작품은 조선미술전람회의 관료주의에 대한 반대로 서화협회전의 빛나는 존재가치를 또렷하게 인식토록 해주었다”고 평가하면서 “조선화단의 아카데미즘이 그에게 아무리 돌을 던져도 구본웅은 엄연히 우리 화단의 최좌익이다. 적막한 고립에 영광이 있어라”라고 구본웅에 대한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1953년 정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피난지 부산에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상경한 구본웅은 서울의 신문사에서 삽화를 그리며 새로운 그림에로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던 가운데 2월 2일 종로구 누하동 자택에서 허약해진 몸과 꼽추로 인한 폐 기능 약화가 급성폐렴으로 이어져 48년의 고단하고 암울했던 화가의 일생을 마감한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 더 날아 보자꾸나”라는 <날개>의 마지막 대목처럼, 구본웅은 평생을 지고 살았던 꼽추의 멍에를 내려놓고, 한국 근대 개화기 미술의 날개가 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식민지 시대의 우울한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