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김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

인생역전의 ‘신화(神話)’. 누구나 꿈꾸는 달콤한 말이긴 하나 누구나 이룰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유년시절 가난을 밑거름 삼아 이민 1세대로 아메리칸 드림을 보기 좋게 이루며 인생역전의 역전을 거듭한 한국인이 있다.

그런데 밑바닥에서 시작해 미국 상류사회까지 경험한 그가 3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3년 전 다시 보따리를 싸서 영구 귀국했다.

정보기술(IT)기업을 20억 달러에 매각하며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지금 꿈과 희망과 미래, 그리고 열정과 도전을 역설하는 강사로 변신했다. ‘스티브 김’,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Success Story] ‘아시아의 빌 게이츠’가 말하는 ‘채움’과 ‘버림’의 美學
나이 사오십이 되면 누구나 드라마 한 편 쓸 정도의 얘깃거리가 있다고 한다. 가장 흔한 것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애절한 러브 스토리가 아닐까 싶다. 다음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는 시나리오(?)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뒤집은 성공신화일 것이다.

가난을 딛고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이야기는 늘 사람들에게 감동을 넘어 모종(某種)의 동기를 부여한다.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족적이 그랬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 역시 그랬다. ‘맨손’으로 출발했던 그들의 억척같은 삶의 이야기는 여전히 회자되는 인기 ‘인생 드라마’다.

서양에서도 ‘맨손의 성공신화’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세계적인 ‘트릴리어네어(trillionaire: 최소 10억 달러 이상을 가진 무한장자)’ 빌 게이츠다. (비록 그의 부모는 가난하지 않았으나) 대학생 신분으로 창고에서 창업, 오늘날의 마이크로소프트(MS)로 성장시킨 그는 맨손이 ‘기적’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사업으로 이룬 재력만큼이나 대단한 기부(寄附)에 있다. 아내와 함께 자신들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든 그는, ‘아름다운 부자’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이 가운데 한 명이다.

최근 한 지인이 ‘아시아의 빌 게이츠’라 불리는 한국인이 있다며 알려왔다. 스티브 김(한국명 김윤종)이 그 주인공. 3년 전 30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영구 귀국해 현재는 꿈·희망·미래재단의 이사장으로 있다고 했다.

최고경영자(CEO)로 이끌던 IT 업체를 나스닥에 상장시킨 후 한화 2조 원에 달하는 가격으로 매각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빅 타임 비즈니스맨’이었던 그의 지난 3년간의 이야기에 ‘촉’이 꽂혔다. 삶의 터전과 방향을 틀어야 했던 이유가 궁금했다.

‘아시아의 빌 게이츠’ vs 빌 게이츠

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1976년 도미했다. 당시 수중에 재산이라야 2000달러가 전부. 야간 빌딩 청소, 창고형 매장의 자동차 부품코너에서 일하며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에서 정보통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미국의 대기업에도, 중소기업에서도 일했다. 1984년, 광섬유 네트워킹 회사인 파이버먹스(Fibermux Corp.)를 창업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의 첫 단추를 끼웠고, 창업 6년 만인 1991년 회사를 5400만 달러에 매각한다.

1993년에 컴퓨터 네트워킹 시스템을 제작하는 자일랜(Xylan Corp.)을 창업하며 아메리칸 드림의 ‘제2막’에 도전, 1996년 나스닥에 상장시켰고, 1999년 프랑스 알카텍과 인수·합병(M&A)을 추진, 20억 달러에 매각하며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의 현주소는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 장학사업과 나눔 활동으로 매년 20억 원의 금액을 출연하고 있다.

귀국 후 그의 성공신화는 강연의 좋은 소재가 됐고, 김 이사장은 리더십센터를 운영하면서 크고 작은 강연으로 전국을 누비고 있다. 예순을 살짝 넘긴 나이지만 그는 매일 하나 이상의 강연회에 초청된다. 강연의 주제는 거의 ‘열정’과 ‘소통’, 그리고 ‘나눔’이다. 그런데 과거에 비해 너무 조용(?)하게 사는 건 아닐까.

요즘엔 어떤 일에 열정을 쏟아 붓고 계신가요.

“DVD를 만들고 있어요. 그동안 했던 강의를 여덟 가지 주제로 나눠 담을 건데 타이틀이 ‘60전 60승’이에요. CEO로 오직 앞만 보며 달렸던 미국에서의 15년을 분기로 나누면 60분기가 되더라고요.

부자들의 자녀 교육, 글로벌 비즈니스 마인드, 일류가 되는 길, 글로벌 인재의 조건 등 그간의 강의 내용을 정리하는 중인데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동영상 DVD는 제게는 새로운 분야라 만들다 보니 재미가 있더라고요. 이것도 일종의 도전이거든요.(웃음)”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직과 함께 SYK 글로벌 대표이사를 겸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SYK 글로벌은 지난해 11월에 정리했어요. 주식 투자를 주로 하는 회사였는데 예전처럼 열정이 안 생기더라고요. ‘올인’해서 몰입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안 됐다고 할까요. SYK를 정리한 뒤에 책도 발간하고 강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만나 뵙기 힘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잘나가는’ 비즈니스맨의 삶과 강사로서의 삶, 어느 쪽이 더 체질에 맞나요.

“강의는 제게 행복을 줍니다. 사실 쉰 살이 될 때까지 제 자신을 잃어버린 채로 살았어요. 달려가는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듯 회사를 경영하는 CEO는 앞만 보고 달리기를 멈출 수가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기업이 나 혼자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기업은 성장을 멈출 수가 없는 법입니다. 비즈니스의 패러다임은 늘 변화하고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해야 합니다. 15년간 2개의 회사를 창업하고 성공을 이루면서 정말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어요. 지금이 저는 행복합니다.”

돈보다 더 절실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미국 나이로 오십이 될 때 회사를 매각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자유로워졌어요. 한 마디로 먹고 살만하게 된 거죠. 부촌인 비벌리힐스에 욕실만 열한 개짜리 저택에도 살아봤어요. 집 안 벽을 장식할 미술품 등을 사 모으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릴 정도였죠.

그러면서 미국 상류사회의 문화도 많이 즐겨봤어요. 집에서 살롱 콘서트도 해보고 전세기도 타고 다녀 봤죠. 누릴 것 다 누려봤지만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니더라고요.

온갖 파티로 집은 사람들로 늘 붐볐지만 모이는 사람들도, 하는 일도 비슷하니 나중엔 그것도 싫증이 나더군요. 또 돈이 많으면 관리하기도 쉽지 않아요.(웃음) 돈 많은 사람들이 주로 계열사도 만들고 미술관도 만들고 그러잖습니까. 그거 다 골치 아픈 일이에요. 삶 자체를 단순하게(simplify) 만들고 싶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상류사회 생활을 버린 뒤 비로소 행복해지신 건가요.

“돈이나 성공은 정말 순간적인 것이더라고요. 사람들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고 나면 뭐가 남습니까. 다시 내려와야 해요.

욕심을 버리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어요. 비로소 인생을 즐기게 됐죠. 저는 지금도 저한테 주문을 겁니다. ‘내가 제일 잘나가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라고요.”

‘박수 칠 때 떠나라’고 하시던데, 2조 원에 회사를 매각하며 떠난 뒤 정말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나요.

“없습니다. 솔직히 강연회가 많아요. 지난해 7월부터 12월 동안 한 강의를 세어봤더니 94회나 되더라고요. 그래도 그때 행복했어요. 청중들과 눈 맞추며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막상 한국에 돌아와 살아보니 사람들이 남의 일에 당최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사람들 만나면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떠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한 번씩 찔러주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수많은 강연회를 통해 ‘소통’과 ‘리더십’을 역설하시던데 실제 사람들과의 소통은 잘하는 편인가요.

“사실 한국 와서 그 부분에서 좌절을 느꼈어요. 그래서 강연에서 소통을 더 강조합니다. 한국에서는 친구 만들기가 힘들었어요. 미국에서 제가 이뤘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이상하게 저를 어려워해요.

지위, 재력 같은 것을 생각하면 지레 바쁘겠거니 짐작하고 먼저 연락을 안 해 와요. 심지어 학교 동창들도 저를 어려워하더라고요. 남자들은 일종의 경쟁의식 같은 것이 있나 봐요. 그래서 저는 여성 팬과 여자 친구가 더 많은 편이에요.(웃음) 제가 좀 감성적인 편이거든요.”

‘아시아의 빌 게이츠’란 별명을 갖고 계신데, 실제 빌 게이츠와 비슷한 DNA가 있다면요.

“(웃음) 사업적 감각이랄까요. 미국에서 창업했던 두 개의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도 그랬고, 한국에 들어와서 교육 사업에 대한 비전을 가진 것도 그런 맥락이에요.

그런데 사실 빌 게이츠 같은 경우엔 부모님의 상황이 저와는 많이 달랐어요. 그런 면에서는 제가 오히려 빌 게이츠보다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하하하.”

15년간, 논스톱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그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없었다는 거죠. CEO인 제가 뛰어 내리고 나면 저를 대체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죽는 한이 있어도 밀어붙이고 보는 거였죠.”

성공신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헝그리 정신’

김 이사장은 위로 누나 셋에, 아래로 남동생을 하나 둔 5남매 가운데 장남이다.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에 서울 장교동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포목상을 했던 아버지는 그 시절 이미 스키와 승마를 즐길 정도로 유복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해방정국의 혼란과 이어 터진 6·25전쟁으로 모든 재산을 잃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는 서울로 터전을 옮겨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빚만 지게 됐다. 당시 살던 곳은 북한산 아래 세검정이었다.

가난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하셨는데, 사실 전후세대 대부분이 가난을 ‘멍에’처럼 지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야 물론 그랬죠. 경복중학교에 시험을 봐서 합격해 내일이 입학식인데 오늘 당장 교복 살 돈이 없었어요. 아침에 어머니께서 옷을 한 벌 내어 놓으시더라고요. 숙명여고를 졸업한 누나 교복을 밤새 고쳐 제 교복을 만드신 거죠.”

2001년 꿈·희망·미래재단을 설립한 이래 장학사업과 사회복지 사업에 매년 20억 원씩 지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비로 출연하시는 건가요.

“(웃음) 제 돈이라기보다는 재단이 지원하는 거라고 봐야죠. 사람들이 ‘2조 원 매각’만 기억하고 제가 돈이 많은 줄 아는데, 매각 당시 기업의 전체 가치가 2조 원이었다는 얘기지 그게 모두 제 돈은 아니죠.

그리고 재혼을 하면서 전처에게 절반을 주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처럼 돈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웃음) 그저 먹고 살만할 정도죠.” (실제 그는 자신의 저서 <꿈, 희망, 미래>를 통해 재혼하기까지의 과정을 솔직담백하게 밝혔다.)

재력가들이 흔히 ‘재산을 물려 주는 것이 자식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말합니다. 동의하시는지요.

“우리 집 아이들은 아직 어린데 솔직히 줄 수 있는 선에서 미리 준 것도 있어요(주식 신탁을 의미하는 듯했다).”

청소년을 위한 교육사업에 남다른 비전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귀국해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현실을 보고 참 암담했었습니다. 교육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지방 소도시에서도 학부모 대상 강연회에 저를 많이 초청하는 편이에요.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가 안되면 하지 말고 방황도 해보라고 말합니다.

청소년 대상 리더십 캠프에서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프레젠테이션(PT)을 해보라고 숙제를 주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 있게 PT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총 300만 원의 장학금을 걸고 PT 대회를 열기도 하는데 캠프를 통해 아이들이 변하더라고요. 대화와 스피치의 기술, PT 방법 등에 대한 교육을 통한 경쟁력 강화가 목표죠. 최근에는 CEO를 위한 아카데미도 준비했습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 방황도 할 만큼 해보라고 하시는데, 당시 경복중·경복고 출신으로 어패가 있는 얘기 아닐까요.

“하하하. 전 공부 별로 안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바둑에 빠졌고, 고등학교 땐 여학생한테 빠져 있었죠. 대학 때도 공부는 뒷전이었습니다. 연애만 열심히 했어요. 솔직히 유신시절 대학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못 됐어요. 시대가 어수선하니 학생들도 방황을 했죠.”

대학 때까지 방황만 하신 겁니까.

“아, 미국 가서는 철이 들었죠. 스물일곱 살 때였어요.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까진 솔직히 공부도 안했지만 취직에 대한 걱정도 별달리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대기업이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거든요. 미국에 가서는 살아남아야겠다 싶었죠. 엔지니어가 되려면 공부하지 않고는 안 되겠더라고요.”

미국은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군대 제대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미국행을 결심하게 됐어요. 당시 부모님과 큰누나, 작은누나가 결혼을 해서 미국에 살고 있었거든요. 큰누나 내외가 화분 만드는 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한동안 거기서 일을 하기도 했었죠.”

“나눌 수 있어 더욱 행복한 지금”
[Success Story] ‘아시아의 빌 게이츠’가 말하는 ‘채움’과 ‘버림’의 美學
‘자일랜’을 2조 원에 매각한 뒤 미국에서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을 누렸다. 대저택에서는 파티며 오페라 살롱 콘서트가 연신 열렸고, 15년간 미국에서 쌓은 부와 명성을 바탕으로 들어가기 어렵기로 유명한 LA 오페라단 이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LA 오페라단 이사는 총 40여 명가량으로, 개인별 연 기부금액이 5만 달러에 달해 미국 상류사회 사람들이라고 해도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감투는 아니었다.

김 이사장은 LA 오페라단 이사회 참여를 계기로 미국 상류사회 문화에 발을 들이게 됐다. 이후 그는 집에서 한인 예술가 후원을 위한 특별한 파티들을 열었고 실제로 살롱 콘서트로 모인 후원금은, 재능은 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뮤지션들에게 전달됐다. 소프라노 조수미와 홍혜경 등도 그가 주최한 저택에서의 살롱 콘서트 무대에 섰던 음악인 가운데 한 명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과 함께 그는 자일랜 매각 후 미국 내 가족재단인 ‘스티브 앤드 로빈 김 가족 재단(Steve & Robin Kim Family Foundation)을 설립했다(로빈은 아내의 이름이다). 수입이 있을 때마다 지속적으로 재단의 기금을 늘리면서 미국과 한국, 북한, 제3세계 등지에서 사회복지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별히 장학 사업에 적극적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미국은 공부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누구든지 대학에 갈 수 있는 나라예요. 이걸 한국에 가서 해보자 싶었죠.”

‘나눔’에 대한 원칙이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첫째는 생선을 주기보다는 고기 낚는 법을 알려준다는 것, 둘째는 돈이 귀하게 쓰이게 하는 것, 셋째는 시작하면 끝까지 책임진다는 것, 마지막은 양과 질의 균형을 맞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삶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다면요.

“솔직히 말하면 제겐 이렇다 할 멘토가 없었어요. CEO를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제가 하는 얘기가 바로 제 자신의 경험담이랄 수 있어요. 청중인 CEO들에게 제가 먼저 겪었던 문제들을 오픈하며 마음을 열면 듣는 사람들도 공감하며 마음을 열죠.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은 김안과 창립자이신 건양대 김희수 총장입니다. 올해 84세가 되신 것으로 아는데 아직도 열정이 넘치는 분이시죠. 저도 그 연배가 되면 과연 그런 열정을 뿜어낼 수 있을까 싶어요. 단, 김 총장님의 경우 옛날 분이시라서 그런지 소통에는 좀 약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웃음)”

연배에 비해 동안(童顔)이신데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별 다른 것 없습니다. 운동 열심히 하고 소식하는 정도랄까요.”

미국에서 기업을 운영하실 때, 그리고 현재 재단을 이끌어 가시면서 직원들과의 소통에 특별한 원칙이 있나요.

“일단 어깨에 힘 빼고 격이 없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가감 없이 투명하게 공개할 때 직원들 역시 기업의 목표를 인식하고 따라올 수 있어요. 지금도 저희 사무실에는 화이트보드가 있는데 회의를 할 때 항상 보드에 메모를 해가며 아이디어를 교환합니다. 소통에 관문이 많으면 시간을 낭비하게 돼요. 최대 효율을 위해 업무 담당자가 직급에 상관없이 저랑 직접 대화를 합니다.”

미국은 정말로 ‘기회의 땅’입니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엔 더더욱 그랬었죠. 의사나 간호사, 엔지니어 등 전문직인 경우엔 영주권도 쉽게 나왔거든요. 예전엔 유태인들이 주름잡았던 주유소나 세탁소, 마켓 비즈니스가 한인들에게 많이 넘어왔습니다. 열심히 땀 흘리면 잘살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비즈니스 하기도 편해요. 일단 접대문화가 없고 학연이나 지연에 좌우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타인과 비교하며 살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요. 한국 사람들은 워낙 건실해서 어디에서라도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회의 땅에서 제대로 기회를 잡아 두 번의 ‘홈런’을 제대로 날렸던 그는 지금 열정을 쏟고 있는 리더십 교육 사업을 ‘제3의 창업’이라고 말했다. 지난 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는 달력 가득 빼곡히 적힌 미팅과 강연 일정을 달리는 열차처럼 멈추지 않고 소화해낼 것이다. 이제, 미국 상류사회를 떠나며 비웠던 마음을 사람들과의 소통과 나눔으로 채울 차례다.


스티브 김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
서강대 전자공학과
UCLA 정보통신학 석사 학위
1993년 자일랜(Xylan Corp.) 설립
LA 오페라단 이사
서강대 경영대학원 초빙교수

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