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정태섭 박사
후텁지근했던 여름 오후,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 로비에 마중을 나온 그를 따라 들어가 연구실 문을 열어젖히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사방에 꽉 들어찬 방은, 미안한 얘기지만 ‘연구실’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까운 수준이었다.실제보다 더 좁아보이던 그 방에서 나눈 230년 전의 현미경과 30년의 의사 생활, 뒤늦게 시작한 ‘X-레이 아트’에 관한 이야기는 온갖 컬렉션이 그득히 들어찬 그 방만큼이나 밀도가 높았다. 연세의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장인 정태섭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쯤이다. 그는 당시 필자가 몸담고 있던 모 잡지의 칼럼니스트 가운데 한 명이었다. ‘X-레이(X-Ray) 영상아트’라는, 시쳇말로 ‘듣보(듣도 보도 못한)’ 주제로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글과 함께 직접 찍은 X-레이 작품 사진을 보내왔다. 이제야 고백하자면, 외고 담당자로서도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에 매료됐다.
어느 가을날 저녁식사 자리에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장에 백 팩을 멘 차림으로 나타났다. X-레이를 쬐고(?) 나와 맛이 한결 부드럽다는 와인 세 병이 그 가방에서 나와 테이블로 옮겨졌다.
덕분에 그날 필자는 ‘코키지(corkage: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손님이 가져간 와인을 마실 때 술잔 등을 제공해주는 것)’ 서비스를 받았다. 그의 말이 맞아서였을까, 아님 생각이 이미 미각을 지배하고 있어서였을까. 정 교수의 설명에 따라 기울이는 와인 잔 속에 출렁이는 레드 와인은 그 어느 와인보다도 감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청계천을 배회하던 ‘왕따’ 초등생
“아, 요즘은 와인에 X-레이 안 쬡니다. (웃음) 그때 X-레이를 쬐었던 이유는 값싼 와인의 역겨운 맛을 줄이기 위해서였어요. 싼 와인에는 간혹 무당벌레 같은 벌레가 섞인 경우가 있거든요. 방사선을 쪼이면 그것들로 인한 역겨운 맛을 줄일 수 있죠. 물론 이론적으로 성립되는 얘깁니다.”
‘방사선 쪼인 와인’ 얘기로 공백이 컸던 대화에 물꼬를 텄다. 예의 그 유쾌하고도 자세한 설명이 답으로 돌아온다. 희한한 넥타이 수집벽(蒐集癖)도 그대로냐고 물으니 이젠 아예 넥타이 디자인까지 하고 있다는 대답.
200여 년 전에 제작된 현미경에서부터 화폐, 넥타이, 현미경 필름, 고지도(古地圖), 오래된 서찰과 사진 등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의 컬렉터이자 방사선의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의사인 그는, 솔직히 보통사람들에게는 ‘기인(奇人)’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싶다(실제 그의 연구실에 널브러져(?) 있는 수집품들의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하자면 어마어마하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探究)’에 착수. 그런데 이야기는 생각보다 시곗바늘을 아주 오래전으로 돌려놓았다.
“부산에 살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편을 잡고 계셨던 아버지께서 서울로 전근을 오시게 됐어요. 형제들은 이미 전학하기 애매한 나이가 돼 4남매 중 막내였던 저만 아버지를 따라오게 됐죠. 그때 살던 곳이 내수동이었는데, 막상 전학을 하고 보니 제 심한 사투리 때문에 친구들이 상대를 안 해주더라고요.
공부도 거의 독학으로 했으니 요즘 말로 하자면 ‘왕따’죠. (웃음) 그러니 심심하잖아요. 하교 후에 매일 청계천엘 갔어요. 고장 난 전자제품을 구해다가 부품 갈아 끼워 고쳐서 친구나 친척한테 팔기도 하고, 매킨토시 207 앰프랑 TV는 책을 보고 직접 만들기도 했어요. 고등학교 땐 천체망원경을 만들어 판 적도 있어요. 천체망원경 만들기가 생각보다 어렵진 않거든요.”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나 보다. 책상 옆 책장에서 40여 년 전에 발행된 ‘학생과학’ 잡지를 증거로 꺼내 놓는다. 누렇다 못해 초콜릿 빛처럼 바랜 잡지 종이가 세월을 증명하고 있었다.
친구 대신 과학 잡지를 붙잡고, 오락실 대신 청계천 상가를 배회하며 전자제품 부품을 구하던 소년은 자연스레 ‘청계천식’ 문화에 익숙해졌다. 화폐 수집을 시작한 것도 그 즈음. 실제로 고2 때는 그의 화폐 수집 물량이 전국 랭킹 100위 안에 들기도 했다.
“원래 그림 잘 그리고 만드는 데 손재주가 있어 공대에 가려고 했죠. 그런데 아버지께서 ‘우리 집에 의사가 없으니 넌 의대를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동경공예전문대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의학과 과학, 예술의 조합이랄 수 있는 다빈치식 교육을 지향하셨죠.
대학 들어가서는 연극반에 들어갔는데, 무대에는 한 번도 못 서보고 6년간 조명담당만 했어요. 역시 심한 사투리 때문이었죠. 무의촌 진료를 다닐 때도 전기 안 들어오는 시골에 가면 디젤 발전기 빌려다가 전기 공급을 하곤 했죠. 제 별명이 ‘의대 공돌이’였어요. 하하하.”
아버지의 뜻을 좆아 의대에 갔지만 ‘공돌이’ 꼬리를 뗄 수 없었던 그에게 ‘영상의학과(당시 방사선과)’는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기계 많은 방사선과에 들어선 순간, ‘이거다’ 하고 쾌재를 불렀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훗날 의사로서 ‘X-레이 아티스트’가 될 자신의 모습을 X-레이 필름에 투영하진 못했다.
초기에 정 교수는 자기 작품의 영역에서 자화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평소 와인을 좋아하던 터라 와인을 마시는 순간 향취가 머리로 치밀어 오르는 광경을 X-레이 영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우연(偶然)’이 ‘운명(運命)’으로
언젠가부터 정 교수는 ‘X-레이 아티스트’로 불리기 시작했다. 2007년 봄부터 현재까지 개인전만도 다섯 번을 가졌다. 1995년 우연히 찍게 된 가족 ‘해골 사진’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그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예술 분야를 개척한 주인공이 됐다.
장미, 라일락, 꽃잎, 조개껍데기 등 다양한 오브제가 X-레이 촬영에 동원됐고,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X-레이 촬영의 묘미에 점차 자신도, 주변 사람들도 빠져들었다.
물론 본업인 의사도 포기하지 않았다. 병원 근무와 강의, 논문 집필과 연구, 거기에 병행하는 ‘예술 활동’은 그러나 그리 녹록한 작업은 아니다. 절대 시간의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 그래서 영상아트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는 집도 병원에서 10분 거리로 옮겼다.
“1995년이었죠. 미국 대학에 교환교수로 다녀온 뒤 가장으로서 가족들한테 해 준 게 없는 것 같아 네 식구가 X-레이 해골 사진을 찍었어요. 그 탓에 ‘해골 가족’이다, ‘ET 가족’이다 하는 놀림을 많이 받아 그 이후로는 가족들이 사진 촬영을 안 하려 해요. (웃음) MBC TV 드라마 <뉴하트>에서 박광정 씨가 연기한 의사의 모델이 저예요.
그 드라마에서도 박광정 씨 가족 해골 사진이 나오는데, 그 사진도 제가 찍었죠. 2006년 말에
그 사진을 보고 모 일간지 기자가 요청을 해 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 기자가 대뜸 ‘전시회는 언제 하실 건가요’ 하고 묻더라고요. 그때 얼떨결에 ‘내년 봄쯤 하죠’ 했는데 뱉어놓고 나니 부담이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속도를 내서 찍기 시작했죠.
그런데 전시회를 하려면 장소가 필요하잖아요. 포트폴리오를 들고 다니면서 갤러리에서 쫓겨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갤러리 정’이라는 곳에서 무슨 마음에서였는지 단체전 작가에 저를 끼워주더라고요. (웃음)”
듣도 보도 못한 ‘X-레이 아트’ 작품을 걸어준 갤러리 덕에 그는 의사가 아닌, 아티스트로 데뷔를 하게 됐다. 물꼬가 터지니 다음은 순조로웠다. ‘X-레이 아트’ 하는 의사는 신문 기사로 대서특필 됐고, 작품을 걸 수 있는 공간도 자연스럽게 확보됐다.
지금은 기다렸다 작품을 사들이는 컬렉터까지 있을 정도다. 컬렉터는 대부분 의사들과 사업가들이라고. 지난해 10월 인사아트센터에서 가진 개인전에서는 30개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전시작보다 많은 31개의 작품이 판매될 정도로 호응을 크게 받았다.
“꽃과 나뭇잎 등이 X-레이로 찍기엔 가장 무난한 소재랄 수 있어요. 의사이다 보니 사람을 많이 찍고 싶지만, 사람을 주제로 한 작품은 보는 사람들에게 한편으로는 섬뜩한 감을 주기도 해서 사실은 꽃이 가장 반응이 좋은 편이에요.
동물은 말을 안 들어서 불가능해요. X-레이는 찍는 순간엔 가만히 있어야 하거든요. (웃음) X-레이란 게 전문지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어 사실상 의사가 아니면 시도하기가 어려운 분야입니다.
최근엔 비보이가 춤추는 장면을 찍기도 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병원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직원이 있어 한 번 찍어봤는데 연주할 때 인간의 미세한 근육 움직임이 아주 재미있게 나오더라고요. 의사이기 때문에 캐치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
X-레이 아트로 국경을 넘다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소장된 작품. 카라가 꽃밭에 나열된 모습을 X-레이 영상으로 촬영, 묘사했다.3. <튜울립 꽃밭 2009A>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소장된 작품으로 튤립이 꽃밭에 가지런히 나열된 모습을 X-레이 영상으로 표현했다. 꽃송이 채색이 감각적이다.">인터뷰 중에 그의 넥타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과학 관련 문양이 있는 디자인, 미술작품이 들어간 타이 등 지금껏 수집한 타이가 500여 개에 달한다지만, 그날의 타이는 유독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넥타이를 모으기만 하다가 한 회사에서 제 X-레이 작품을 보고 넥타이와 스카프 디자인으로 활용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 왔어요. 몇 가지 샘플을 만들어봤는데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계약을 했는데, 곧 외국으로 수출될 예정이에요.”
그런데 ‘수출’은 비단 넥타이뿐만이 아니다. 내년에는 프랑스 파리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가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
“한국에서는 제가 유일하고, 외국에 한두 명 정도 활동하고 있는데 작품 세계가 저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아무래도 저는 의사이다 보니 작품 속에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죠.
간혹 X-레이 아트가 과연 아트냐며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올해 제 작품이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소개됐어요.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소장되기도 하면서 연구 프로젝트 지원금도 받아 본격적으로 연구 활동을 벌이는 중이에요.” X-레이 아트를 두고 이는 예술성 논란에 대한 그의 섭섭함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가장 큰 사이즈의 가슴사진 필름 70~80장을 찍어 이어야 완성될 수 있다는 대형 작품을 유심히 보니 단순한 흑백의 X-레이 사진은 아니다. 무채색 사이를 오묘하게 오가는 은은한 색채를 보니 과연 그림 좀 그렸다는 소싯적 이력이 배어나오는 듯했다.
“지금은 아티스트보다는 의사에 가깝죠. 9년 후에 정년퇴직을 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아티스트로 살 계획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제 작품이 소장돼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유명 미술관에도 작품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죠. (웃음) 계속 올라가야만 하는 ‘계단’이 남아 있다는 얘기니까 즐겁습니다.”
“지식은 쌓아야 맛”이라는 그에게 컬렉션은 모으는 것이, 도전은 즐기는 것이 제 맛일 듯하다. ‘극한도전’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그는 연구실을 나서는 필자에게 세 살배기 아들이 좋아할 만한 현란하면서도 음악 소리가 요란스러운 빔(beam) 장난감을 하나 쥐어주었다.
57세의 한국 남성이 구입했을 리 만무한 장난감에 의아해하자 그는 책상 아래 ‘보물창고’에 여러 개가 더 있다고 했다. 어린 아이가 있는 손님에게 선물 하나 꼭 쥐어 보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도 아마 그것이 아닐까 싶다. 마음을 열면 느낄 수 있는 따스한 인간애(人間愛) 말이다.
전시
2008 ‘X-ray Photo Art’ @닥터박갤러리
2009 인사아트센터
2010 ‘X-레이로 봄을 보다’ @아트스페이스
2010 ‘X-레이 아트’ @금산갤러리
2019 'X선의 향연‘ @아트힐갤러리 등의 개인전 외에 다수의 단체전, 아트페어 참여 작가
2010년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꽃의 빅뱅’ 등재
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 c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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