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최초 파커포인트 100점, 이희상 회장의 와인 사랑

[CEO 인터뷰] “와인업계 삼성전자, 이제부터 시작 한국의 안티노리 만들고파”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미치지(狂) 않으면 목표에 도달할(及)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말대로 어느 분야에서건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꽂힌’ 분야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몰입하는 성향을 보여준다.

와인부터 국악까지 동서양을 넘나드는 문화 전반에 대한 깊이가 거의 전문가 수준인 이희상 운산그룹 회장도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그리고 이제 그는 취미로 시작한 와인 제조를 어엿한 업(業)으로 일구었다.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이 회장이 만든 와인 다나(Dana) 2007 빈티지에 100점 만점을 준 것은 그 시작이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인 최초의 쾌거다.

지난 5월 17일 끝난 미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벨 마이크로 클래식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세리의 모자에는 ‘온다 도로(Onda d’Oro)’라는 생소한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데뷔 이후 줄 곳 삼성, CJ 등 국내 대기업의 후원을 받았던 박세리가 생소한 브랜드의 모자를 착용한 모습은 또 다른 화젯거리가 됐다.

이탈리아어로 ‘황금빛 물결’이라는 뜻의 온다 도로는 이 회장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나파밸리에 세운 와이너리 다나 에스테이트에서 만든 와인이다. 비록 이탈리아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흡사 ‘도로(다시) 온다’라는 뉘앙스를 더 풍긴다.

이 회장과 박세리의 인연은 지난 1995년에 시작됐다. 이 회장은 박세리가 LPGA 무대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줬고 미국 진출 후에도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올해부터 메인 스폰서가 없던 박세리가 온다 도로를 달고 모든 경기에 출전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동안 묵묵히 자신을 믿고 도와준 이 회장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CEO 인터뷰] “와인업계 삼성전자, 이제부터 시작 한국의 안티노리 만들고파”
“처음에는 그냥 같은 충청도 출신이라고 해서 도와주기 시작했어요(박세리의 고향은 대전, 이 회장은 충남 논산 출신이다). 그게 1994년 무렵이죠. 그게 인연이 돼 세리도 제게 ‘큰아빠’라고 부르고, 저도 막내딸처럼 여기는 사이가 됐어요.

지난 3년간 슬럼프를 겪을 때도 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어요. 워낙 정신력이 강한 애인 데다, 사실 이룰 건 다 이뤘잖습니까. 이젠 시집가야죠. (하하)”

운산그룹은 일반인에겐 그다지 알려진 기업이 아니다. 주력이 제분업인데 대부분 소매판매보다는 농심, 오리온 등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라면, 과자, 빵 등 상당수가 운산그룹에서 생산하는 밀가루로 만들어진다.

운산그룹 계열의 한국제분과 동아원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26%다. 현재 당진, 부산, 인천 등지에 대규모 공장을 건립해 가동 중이며 앞으로는 소매사업 쪽 비중을 늘린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요즘 이 회장이 가장 애착을 갖는 사업은 단연 와인 비즈니스다. 그는 소비자에게 저렴하게 와인을 공급하고자 지난 1997년 와인 수입업체 나라식품을 설립했다. 이어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와인 숍 ‘와인타임’과 와인 레스토랑 ‘뱅가’를 오픈했다.

지난 2005년엔 세계적인 와인 전문가 인증 프로그램인 WSET을 도입해 와인 마스터, 소믈리에 등 전문가와 일반인 과정을 운영 중이다. 이밖에도 운산그룹은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50년 전통의 요리학교 츠지조그룹과 공동으로 츠지원 요리아카데미도 개설했다. 이 아카데미는 와인타임, 뱅가가 위치한 포도플라자 내에 있다.

이 회장이 와인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유는 국내 판매되는 와인 가격의 거품 때문이었다.
“사실 외국에서 와인은 물 대신 마시는 음료에 가까워요. 때문에 값이 싸죠. 근데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와인 값이 너무 비싸더군요. 그래서 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값이 저렴하면서 질 좋은 와인을 내 손으로 소비자에게 전해주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회장의 와인 수입 기준은 간단하다. 바로 ‘값 싸고 질 좋은’ 와인이다. 지난 1997년 수입 이래 지금까지 300만 병 이상 팔린 칠레 와인의 대명사 몬테스가 대표 제품이다.

아우렐리오 몬테스, 더글라스 머레이 등 4명이 힘을 모아 1988년 만든 몬테스는 지난 2002년 FIFA 월드컵 조 추첨 리셉션, 2005년 APEC 정상 만찬 테이블에 오르며 유명세를 탔다.

이 공로로 그는 칠레 정부로부터 순수 민간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코멘다도르(Bernardo O’Higgins Comendador)’를 받았다.

최근 이 회장의 관심은 단연 미국 나파밸리에 위치한 와이너리 ‘다나 에스테이트’다. 자신의 호(단하)에서 이름을 따와 지난 2005년 설립한 다나 에스테이트는 현재 온다 도로, 바소, 다나 등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 회장이 다나 에스테이트에 들이는 공은 상상 이상이다.

작년만 해도 1년의 반 이상을 와이너리에서 보내며 수확, 병입, 판매 등 와인 생산 전 과정을 직접 챙겼다.

“와인을 그냥 좋아한다는 것과 직접 재배, 생산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예요. 와인을 직접 만들다 보니 한 방울 한 방울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어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옛 어르신들이 쌀 한 톨에 담긴 농부의 땀, 뭐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딱 그 식이에요.”

그가 전하는 와인 생산 과정을 들으니 와인 한 병이 얼마나 여러 사람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 만들어지는지가 절로 느껴졌다.
로버트 파커가 100점을 준 다나와인.
로버트 파커가 100점을 준 다나와인.
“저희 와이너리가 있는 캘리포니아 나파밸리는 3월까지만 비가 오고 그 다음부터는 건기예요. 그런데 수확 전이나 도중에 비가 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럼 그날로 그해 농사는 끝납니다.

수확하는 건 얼마나 복잡한지 아세요. 하루 만에 수확할 수 있는 양을 일주일에 걸쳐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잘 영근 포도알맹이만 추려내야 하기 때문에, 극도의 인내가 필요해요.

그나저나 올해는 이상저온 현상으로 5월까지 비가 와서 걱정입니다. 작황이 그다지 좋을 것 같지는 않아요. 제 요즘 취미가 미국 날씨 프로그램 보기입니다. (하하)”

그는 와인의 매력을 인재 양성에 비유해 설명했다. 하나의 평범한 광석이 혹독한 연마 과정을 거쳐 보석으로 태어나듯 와인도 마찬가지라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물을 주더라도 고작 몇 방울 남짓이다.

그 와중에 작황이 좋지 않은 포도알맹이는 즉시 잘라내 버린다. 그래야 다른 알맹이들에 땅 속 좋은 영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같은 포도송이라고 해서 맛이 똑같은 건 아니에요. 햇볕을 잘 받은 포도는 빨갛고, 그렇지 못한 포도 알갱이는 검은데, 이럴 때는 검은 알맹이를 과감하게 잘라내 버려야 해요.

이렇게 질 좋은 포도로만 만들어야 하는데, 단순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접근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다나 에스테이트 와이너리 전경.
다나 에스테이트 와이너리 전경.
다나 에스테이트는 지난해 세계 와인 시장에서 큰 사고(?)를 쳤다. 세계적인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다나 에스테이트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와인 ‘다나’에 100점 만점을 준 것이다.

로버트 파커가 누군가. 가장 정확하게 와인을 평가해 와인업계에서 그의 평론은 법 그 자체다. 그가 100점이라고 하면 그 와인은 그날부터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수집 리스트에 오른다.

참고로 지난해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받은 와인은 전 세계 18개 제품에 불과했다. 미국 내에서는 4개 와인 브랜드만이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이 회장의 작품이다.

파커의 평가 이후 다나 에스테이트는 세계 와인업계의 신데렐라로 급부상했다. ‘그저 와인을 좋아하는 동양의 사업가겠지’라고 생각하던 주위의 시선이 180도 달라졌다. 경계 대상이자 부러움의 대상이 돼 버린 것이다.

지난 5월 미 럭셔리 잡지 ‘랍 리포트’는 4페이지를 할애해 다나 에스테이트의 돌풍 요인을 분석한 기사를 내보냈다. 8월에는 미국 경제방송 블룸버그와의 인터뷰가 예정돼 있다.

파커로부터 100점 만점을 받은 ‘다나’는 연 출하량이 불과 5000병 남짓이다. 워낙 소량 생산되다 보니 미국에서만 판매 중이다. 일본, 유럽 등지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지만 생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거절하기 일쑤다.

이 회장이 이 와이너리를 구입한 것은 지난 2005년 무렵. 다나 에스테이트는 원래 1883년 미국인 사업가 헬름(Helm)이 개간한 곳으로 지난 130여 년간 파커 포인트 기준 80~90점 정도의 와인을 생산했었다.

“사실상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했어요. 컬트와인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필립 멜카를 와인마스터로 영입한 것은 물론 와이너리 건립 자체를 전문가에게 맡겼어요. 이렇게 해도 10년 이상은 돼야 자리를 잡는데, 우리는 이를 5년으로 앞당겼죠.”

90점 와인이 100점으로 탈바꿈한 비결이 무엇일까. ‘10점 차 비결’을 이 회장에게 물었다.

“와인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사업입니다. 이렇게 해도 손익분기점을 맞추려면 3~4년 정도 더 있어야 해요. 10년 이상 꾸준하게 투자한다는 것은 일반 기업에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대신 우리는 한국의 장점인 정보기술(IT)을 와인 생산에 접목시켰어요.

각 포도나무마다 전자 장비를 달아 작황 상태를 데이터로 분석해 봤어요. 병에 IC회로 칩을 부착해 생산부터 유통까지 모든 것을 전산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다른 와이너리와 다른 점이죠. 하지만 그래도 역시 와인은 땅이 좋아야 해요.”

동아원이 지난 5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공동으로 ‘스마트 와이너리’ 솔루션 개발에 진출키로 한 것은 다나 에스테이트의 성공이 큰 힘이 됐다.

유비쿼터스 센서 네트워크(USN) 기술을 활용해 포도 등 식물 생장과 숙성 상태를 분석하고 생장환경을 최적화하는 등 재배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농업 IT 융합기술이 바로 이 솔루션의 기본 골자다.

동아원은 오는 2103년까지 총 51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며 이 중 연 12억 원은 정부 지원금으로 충당한다.

“삼성전자가 국내에서 만든 제품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우리는 와인 본고장에서 인정받아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줄 겁니다. ‘와인업계의 삼성전자’인 셈이죠.

그러기 위해선 와인 비즈니스가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게 중요해요. 잘돼서 한국의 ‘안티노리’나 ‘로트칠드’로 커지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바람일 뿐이죠. (하하)”
페라리, 마세라티 판매도 이 회장이 공을 들이고 있는 분야다. 현재 운산그룹 산하 FMK는 이들 차량의 국내 독점 수입권을 갖고 있다.
페라리, 마세라티 판매도 이 회장이 공을 들이고 있는 분야다. 현재 운산그룹 산하 FMK는 이들 차량의 국내 독점 수입권을 갖고 있다.
페라리, 마세라티 판매도 이 회장이 공을 들이고 있는 분야다. 현재 운산그룹 계열FMK는 이들 차량의 국내 독점 수입권을 갖고 있다.

“페라리 독점 딜러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해외 비즈니스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해외 바이어에게 한국 내 밀가루 시장점유율이 몇 퍼센트라고 해봤자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페라리, 마세라티를 판매하고 있다고 말하면 표정부터가 달라집니다. 또 우리 그룹이 추구하는 방향이 페라리와 같은 ‘작지만 강한 회사’거든요.

추사 김정희 선생이 말한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작은 창에 햇빛이 밝아 나로 하여금 그 앞에 오래 앉아 있게 한다)’처럼 내실 있는 기업이 되는 것이 운산그룹의 목표입니다.”

이 회장은 국내 국악 문화 보급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이를 위해 남승우 풀무원홀딩스 회장, 박진선 샘표식품 대표, 김윤 삼양사 회장 등과 함께 ‘국악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국생사)’을 결성했다.

지난 2004년부터 매년 봄 정기 음악회를 열고 있으며 올해 정기연주회는 지난 4월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렸다. 이 공연은 황준연 서울대 국악과 교수가 기획하고 국악 작곡가이자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현장 해설을 맡았다.

“원래 ‘와생사(와인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출발했어요. 2000년 초 광주 의재미술관에서 모여 와인을 마시며 대금연주를 듣고 있는데, 누군가 해설을 곁들인 국악연주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게 지금까지 왔네요.”

우리 문화에 대한 이 회장의 사랑은 각별하다.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항아리’라는 뜻의 바소 라벨에는 달 항아리가 그려져 있다. 온다 도로에는 동양 전통의 태극문양, 다나의 라벨에는 태양을 동양적으로 그린 문양이 그려져 있다.

와인, 밀가루 외에도 운산그룹은 유기농 친환경 식품을 판매하는 해가온, 축산물을 수입사인 동아푸드를 비롯해 사료, 애완동물 식품 부분을 책임지는 동아원 사료BU, ANF대산물산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해외 식량 시장 개척을 위해 중국 칭다오(靑島)에 코도(KODO) 푸드, SCF 캄보디아, 코지드(KOGID) 캄보디아 등을 설립, 운영 중이며 바이오산업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캄보디아 바탐방에 10헥타르 규모의 곡물 건조장 시설을 건설해 연간 4만 톤가량의 사료용 옥수수를 국내로 들여올 계획이다.

“우리 그룹 내 계열사를 연결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바로 ‘즐거움’이에요. 자동차, 밀가루, 육류, 와인 모두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죠. 우리가 앞으로 추구하는 비즈니스 영역도 바로 이 ‘즐거움’일 겁니다.”

이 회장과 점심식사를 겸한 인터뷰는 4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사이 화이트·레드 와인을 각각 한 병씩 말끔하게 비웠다. 이날 메인 와인으로 식탁에 오른 것은 바소.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바소는 최근 국내 와인 애호가 사이 “바소 맛 바소(봤어요)”라는 우스갯소리로 화제를 몰고 있다.

이 회장의 권유에 한 모금 마셔본 바소의 첫 맛은 프랑스 카베르네 소비뇽과는 다르게 구조가 단단하면서도 아로마 향 여운이 더 긴 느낌이다. 그 첫 느낌을 못 잊어 점심식사 치고는 꽤 많은 양의 와인을 마셨다. 농부의 수고와 포도나무의 산고가 이토록 아름다운 천상의 맛을 낸다는 것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면서.


이희상

운산그룹 회장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한국제분공업협회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중견기업위원회 위원장

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