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 체어맨 W와 함께 달리는 오늘의 리더③ - 이동기 변호사

<프로필>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서울남부지방검찰청 검사장대검찰청 형사부장사법연수원 교수난 2005년은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의 절정기였다. 당시 투기 세력이 판을 치면서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저금리에 유동성이 넘쳐나 정부의 고강도 대책도 시장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노무현 정권의 기반마저 흔들릴 정도였다.이때 검찰이 칼을 빼들고 나섰다. 부동산 투기에 검찰이 나선 것은 이례적이었지만 그만큼 사안이 심각했었다. 그해 6월 검찰은 경찰 국세청 건교부(현 국토해양부)와 함께 ‘부동산 투기 사범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투기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무려 2만여 명을 단속했고 455명을 구속했다. 개발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소위 ‘기획부동산’들은 자취를 감췄고 부동산 가격은 모처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당시 대검찰청 형사부장으로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을 맡았던 이동기 변호사는 지금도 이 사건을 25년 검찰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꼽는다. 이 변호사는 “당시에는 집값 안정이 가장 큰 화두였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 단속은 마약이나 조직 폭력 같은 강력 사건 단속 못지않게 중요했다”며 “검찰의 존재 이유가 국민들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부동산 투기에 대한 검찰권의 적극적인 행사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이 변호사는 이후 서울남부지검 검사장과 수원지검 검사장 등을 거친 후 지난해 3월 변호사로 변신했다. 이 변호사처럼 검찰 고위직을 거친 인사들은 보통 대형 로펌의 영입 0순위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사직을 하자마자 바로 개인사무소를 냈다. 25년간 검찰 공무원으로 지내는 동안 변변한 휴가도 가보지 못한 그가 사표를 낸 지 1주일도 채 안 돼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대형 로펌들이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지만 그는 “이미 개업했다”며 거절했다. 다행히 그는 개인 변호사로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해 검찰 생활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올 들어서는 정부 인사 개편 때마다 고위 공직자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기도 하다.이 변호사는 검사 시절 ‘국민과 함께하는 검찰상’을 확립하는 데 노력해 온 인물로 꼽힌다.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는 그의 부드러운 인상도 이런 그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서울 남부지검장으로 있을 때는 주말에 검찰 청사를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견학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청사 내 테니스장을 주민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수원지검장 시절에도 사랑봉사단 활동, 1사1촌 자매결연 행사, 검사장 1일 민원 전담관 근무 등으로 검찰의 문턱을 낮추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검찰은 국민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며 “검찰권 행사 역시 법에 따른 기계적 적용보다 피의자의 인권과 정황 등을 감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가 검사 재직 중 겪은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 그가 창원지청 차장검사로 재직하던 2002년의 일이었다. 후배 검사가 한 젊은이를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하겠다고 보고를 해 왔다. 여자 친구에게 차인 젊은 남자가 술을 마시고 홧김에 생면부지인 여학생을 쫓아가 상해를 입힌 사건이었다. 정황을 살펴보니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고 피해자의 피해 정도도 미미했다. 더구나 남자의 아버지는 시청 청소부, 어머니는 파출부생활을 해서 어렵게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는데 아들은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여자 친구에게 결별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이 젊은이가 재판에 넘겨지면 강간치상죄로 최소 7년 이상의 징역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이 변호사는 문득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젊은이가 기소되면 온갖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그 젊은이를 대학생으로 키운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를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고민 끝에 후배 검사를 불렀다.“당신이 그를 법대로 기소하는 것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도 합의했고 큰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가 살아온 인생과 그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감안해 검찰권을 행사하는 게 어떠냐.” 결국 후배 검사는 이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 젊은이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항상 남을 배려하는 그의 이런 마음은 변호사로 변신한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가장 유능한 변호사는 의뢰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할 수 있는 변호사”라고 말한다. “검사 시절 대화할 때는 상대방에게 ‘항상 빨리 요점만 말하라’고 다그쳤죠. 그러나 요즘 의뢰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이 답답함을 푸는 것을 보면서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소외된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도 오랫동안 그의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수년째 가정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을 후원해 오고 있으며 로타리클럽에도 가입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 변호사는 “한국 사회에서 검찰이나 변호사는 사회적 신분을 감안하면 당연히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남에게 더 많은 덕을 베풀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게 변호사로서의 꿈”이라고 말했다.이 변호사는 거의 매일 새벽 108배를 하고 있다. 지난 2002년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시작했으니 벌써 8년째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삼성동 봉은사에서 108배를 하고 집 근처 헬스센터에서 운동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처음에 108배를 시작했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힘들었다”며 그러나 “이제는 15분이면 108배를 마칠 정도로 몸도 가뿐해졌다”고 말했다. 그가 매일 108배를 하고 있는 사연도 재미있다. 이 변호사는 “그동안 숱하게 ‘이제는 그만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오체투지’의 저자이자 뇌성마비 환자인 한경혜 씨를 만난 후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 씨는 돌이 갓 지난 어린나이에 뇌성마비에 걸렸지만 일곱 살 때부터 35세인 지금까지 매일 1000배를 해오고 있다. 건강도 회복돼 홍익대 미대 박사과정까지 졸업했다. 이 변호사는 한 씨를 만난 후부터는 지인들에게 ‘오체투지’ 책을 사서 나눠주고 있다.그는 검사 시절 판소리 검사로 유명했었다. 전주지검장으로 근무할 때 인간문화재로부터 판소리를 배운 이 변호사는 한가할 때는 ‘사철가’와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국악에 심취했었다. 지금도 그의 서초동 사무실 한쪽에는 판소리로 유명한 ‘국창’ 조상현 씨로부터 받은 북이 놓여 있다. 이 변호사는 “집에서 북을 치면 소리가 울려 이웃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노래를 못한 지 꽤 됐다”며 “그러나 지금도 차 안에서 판소리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스트레스도 풀린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부터는 판소리보존회의 고문으로 위촉돼 활동하고 있다.이렇게 부드럽고 관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변호사도 차는 오랫동안 체어맨W를 고집하고 있다. 그는 “검사장으로 승진한 후부터 줄곧 체어맨을 타왔는데 마음에 쏙 들었다”며 “그래서 지난해 3월 변호사 개업을 결심하면서 바로 체어맨W를 주문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주문이 밀려 실제 차를 타는 데는 2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이변호사는 “체어맨W는 산뜻한 외모에 중후함까지 갖춰 중년의 나이에 올라선 사람들에게는 차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차”라며 “충분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차량 내부도 값비싼 외제차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고 승차감도 좋아 장거리 여행에도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또 “쌍용차가 파업을 할 때도 애프터서비스(AS)를 신청했는데 바로 달려와 해결해 주더라”며 “모든 면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차”라고 격찬했다.글 김태완 ·사진 이승재 기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