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타마 아바디 서영률 대표

난 8월1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외곽 세르퐁에 있는 프라타마 아바디(Pratama Abadi) 본사 건물. 오후 2시30분이 되자 한가로웠던 회사 입구가 갑자기 북적이기 시작했다. 새벽에 출근했던 7000여 명의 근로자들이 퇴근을 하기 위해 일시에 쏟아져 나온 것. 본관에서 회사 입구에 이르는 길이 150m, 폭 15m의 도로는 금세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근로자들의 귀가행렬로 가득 차는 장관을 연출했다. 이 회사의 서영률 사장은 “2교대로 일하는 공장 근로자들이 모두 1만4000여 명”이라며 “출·퇴근 시간이 되면 회사 부근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말했다. 프라타마 아바디는 인도네시아 2위의 신발제조 공장이다. 주로 세계적인 브랜드인 나이키에 신발을 공급한다. 이 회사가 만드는 신발은 한 달에 약 100만 켤레. 세계시장에서 판매되는 나이키 신발 20켤레 중 1켤레는 이곳에서 나온다. 프라타마 아바디는 1996∼1999년 4년간 연속으로 세계 약 50개에 이르는 나이키 협력업체 중 최우수 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이키와의 관계가 워낙 탄탄해 내년부터는 생산량도 월 120만 켤레로 더 늘어난다. 프라타마 아바디는 샌들 공장, 플라스틱 사출업체, 금형 제조업체, 증권회사, 팜오일업체 등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다. 한국의 코스닥상장사인 에너지솔루션즈도 관계회사다. 이들 계열사를 모두 합치면 연 매출이 2억3000만 달러에 달한다. 그래서 프라타마 아바디의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서영률 사장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한인 기업인으로 꼽힌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한인 기업은 코린도이지만 이 회사는 한국의 동화그룹과 특수관계 회사다. 가진 것 없이 맨주먹으로 회사를 일구었다는 점에서 서 사장은 단연 돋보인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이뤘지만 젊은 시절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고난의 세월은 적극적이고 활달했던 그의 성격을 과묵하고 신중한 모습으로 바꿔놓았다. 서 사장은 청주 토박이다. 청주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1969년 그는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이때까지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친구에게조차 지고는 못사는 그의 성격과 젊은 시절의 혈기는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았다. 서 사장은 대학입학 후 한 달 만에 휴학계를 내고 낙향했다. 당시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절친한 친구를 보면서 서울대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그의 재수를 반대하자 “내가 벌어서 알아서 살겠다”며 느닷없이 세무공무원 시험을 쳤다. 그는 시험성적이 잘 나와 서울지방국세청으로 발령받았고 4년 가까이 세무공무원 생활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자기 또래의 친구들이 행정고시에 합격해 사무관으로 오는 모습을 보면서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결국 그는 대학은 마쳐야 한다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설득으로 세무공무원을 그만두고 1977년 늦깎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입학 후 8년만이었다. 대학에서 그는 행정고시를 준비하다가 공인회계사로 진로를 바꿨다. 그러나 졸업할 때까지 결국 합격을 못하고 취직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당시 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 나이 제한은 1952년생이었는데 저는 1950년생이어서 지원조차 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대부분의 대기업에 원서를 냈지요.”결과는 참담했다. 모든 기업의 서류전형에서 탈락한 것이다. 서 사장이 실의에 빠져있을 때 대성목재라는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대성목재는 효성에 인수됐었는데 효성공채에서 탈락한 응시자 중에서 몇 명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한 것이다. 어렵게 다시 시작한 직장생활에서 서 사장은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자금 업무를 담당했는데 세무공무원 경험과 회계지식을 이용해 탁월한 업무능력을 보였다. 회사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그의 생활은 어려웠다. 당시 그는 단칸방 월세를 살면서 쪼들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벌어놓은 돈을 학교 다니면서 쓴데다 부인이 하던 사업도 순탄치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이 방안에서 뛰어놀다가 아래층 주인에게 혼난 일을 계기로 그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회사를 그만둔다. 그는 사우디로 가기 위해 럭키개발(현 GS건설)에 경력사원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인도네시아 한상기업인 코린도로 옮겼다. 당시 코린도는 국내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회사였지만 월급이 1270달러나 됐다. 럭키개발의 38만 원에 비하면 2배가 넘는 돈이었다. 그가 코린도에 근무할 때의 일화 한 가지. 그는 코린도에서 초창기에 칼리마탄(보루네오섬)에 있는 합판공장에서 경리과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기업의 회계연도 마감은 3월 31일이었다. 또 매월 1일은 근로자들의 봉급날이었다. 그런데 1983년 3월이 되자 인도네시아 루피화의 디밸류에이션(Devaluation)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소문이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루피화의 환율은 달러당 520루피아로 원화의 달러당 580원보다 강세였다. 한국의 경제수준을 생각하면 루피화의 가치가 지나치게 높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본사에서는 디밸류에이션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3월30일 토요일에 그는 결국 혼자 결단을 내렸다. 보유하고 있는 루피화를 모두 달러로 바꾸기로 했다. 근로자들의 봉급과 회사 유동자금으로 족히 35만 달러가 넘는 금액이었다. 디밸류에이션이 사실이 아닐 경우 환차손으로 약 6000달러 정도를 손해 볼 수 있었다. 그에게는 5달치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지만 일이 잘못되면 물어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업무를 마치고 테니스를 즐기고 있던 은행지점장을 찾아가 달러 교환을 요구했다. 다음날 인도네시아 정부는 디밸류에이션을 발표했다. 달러에 대한 루피아 환율은 하루아침에 520루피아에서 930루피아로 뛰었다. 회사는 서 사장의 결정으로 약 3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는 이 공로로 본사로 발령이 났고 가족들도 인도네시아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서 사장은 1986년에 태화고무가 인도네시아에 신발공장을 짓는 일을 맡으면서 신발산업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미 코린도에서 제지공장을 지은 경험이 있었던 그를 태화고무가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건설업자에게 맡기지 않고 각 분야의 기술자들을 뽑아서 직접 공장을 설립했다. 그 후 그는 2년 정도 이 회사의 임원으로 근무했다. 태화고무의 공장설립을 눈여겨 본 한국의 한 신발업자가 1988년께 그에게 신발공장 설립을 제안했다. 프라타마 아바디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 회사의 초기 설립을 도맡았다. 자본금이 100만 달러에 불과한 회사였지만 서 사장은 은행에서 무려 1500만 달러를 대출받아 공장을 지었다. 공장부지도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 직접 지주들과 협상해 사들였다. 회사 이름도 그가 만들었다. 평소 삼성의 제일주의를 흠모하던 그는 영원한 1등 기업이 되라는 의미로 프라타마 아바디로 지었다. 프라타마는 1등, 최고라는 뜻이고 아바디는 영원하다는 의미다. 회사 로고도 삼성과 유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공장설립 후 프라타마 아바디의 대표는 그가 아니었다. 그는 지분도 전혀 없었다. 그에게 맡겨진 직책은 감사였다. 결국 그는 다른 한국업체의 골판지 제조공장을 짓는 일을 맡으면서 프라타마 아바디와 소원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1994년 어느 날 서 사장은 프라타마 아바디 대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회사가 부도났으니 수습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회사를 찾아가 재무제표를 보니 자본잠식에 부채만 3000만 달러가 있었다. 대표는 이미 직원들에게 모든 권리를 위임하고 출국한 뒤였다. 더구나 부도난 뒤 일주일도 안 돼 홍수가 났다. 인근 강이 범람하면서 공장이 1. 5m나 잠겼다.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서 사장은 “비록 내 돈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직접 땅 사고 공장 짓고 이름까지 지었던 회사라고 생각하니 살려놔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을 찾아가 주문 물량을 생산하기 위해 500만 달러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은행장은 “이 돈은 프라타마 아바디가 아니라 당신에게 주는 돈”이라며 2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과거 경영진이 회사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6개월 내에 투자자를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서 사장은 프라타마 아바디의 대표로 취임했고 스스로 300만 달러를 투자해 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 명실상부한 프라타마 아바디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는 대표를 맡자마자 짐을 싸들고 회사로 들어와 살았다. 그 다음부터는 그의 말대로 죽기 살기로 회사에 매달렸다. 가능한 모든 수주를 받아서 일요일도 쉬지 않고 공장을 돌렸다. 조직 생산 관리 등 회사의 모든 부문을 뜯어고치며 비용을 줄여나갔다. 서 대표는 “이 회사야말로 정말 내 회사라는 생각에 지금 같으면 다시 할 수 없을 정도로 후회 없이 일했다”고 회고했다. 회사는 완벽하게 살아났다. 나이키는 이 회사에 기술대학을 만들어 각 국의 협력업체에서 30여명을 선발해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부도를 맞았던 회사가 3년 만에 최고의 회사로 변신한 것이다. 서 사장은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졌다고 하듯이 그냥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내가 맡은 일을 최고로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다 보니 실적이 따라왔다”고 겸손해 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1998년 경제위기와 함께 30여 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해온 수하르토 정권이 붕괴됐다. 자카르타는 내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혼란 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나이키는 전세기를 동원해 자사 직원들을 싱가포르로 대피시켰고 인도네시아에서의 주문을 크게 줄여버렸다. 세계의 신발공장이 인도네시아에서 중국 베트남 태국 등으로 분산된 것도 이때였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나이키 제품을 생산하던 공장이 19개나 됐지만 지금은 단 3개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서 사장은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주문량이 급감하는데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노후 설비를 모두 신기계로 대체했다.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니다”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서 사장은 “나이키가 생산기지의 다양화 차원에서 인도네시아를 떠나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며 “그래서 경쟁업체를 누르기 위해 일부러 투자를 늘렸다”고 말했다. 서 사장의 노력은 인도네시아 정국이 안정되면서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2004년에 나이키는 프라타마 아바디에 주문물량을 크게 늘렸다. 서 사장은 신발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OEM방식의 생산공장만으로는 사업에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대표적인 게 1998년의 동서-콜리빈도증권 인수다. 그는 당시 한국의 동서증권이 부도가 나자 현지합작법인인 동서-콜리빈도 증권 지분 100%를 사들였다. 현재 이 회사는 인도네시아에서 10위권의 중견증권사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는 에너지솔루션즈에 투자해 최대주주가 됐다.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코스닥시장에 상장됐다. 서 사장은 최근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수마트라 섬에 1만7400ha 땅의 개발권을 가진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서 사장은 이곳에 팜 나무를 심어 오일을 생산할 계획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대기업들이 대부분 팜 오일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서 사장은 “팜 오일을 생산하는데 시기적으로는 5년 정도 걸린다”며 “총 투자비용이 5000만 달러 정도 투입돼야 하기 때문에 자금조달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팜 오일의 가격은 지난해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었을 때 톤당 1200달러까지 치솟았다가 최근에는 600달러대에서 움직이고 있다. 서 사장은 팜 오일 가격이 톤당 400달러만 유지해도 수익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에서의 사업 확장도 서 사장의 관심이다. 그는 “굳이 찾아 나서지는 않겠지만 국내에 좋은 회사가 있으면 언제든지 인수할 생각이 있다”며 “개인적으로는 건설회사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 수년 전 그는 이름을 대면 알만한 중견 건설업체를 인수할 뻔도 했었다. 서 사장은 “아무리 인도네시아에서 성공을 했지만 내 고향은 대한민국”이라며 “3년 정도 후에는 프라타마 아바디를 후계자에게 맡기고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해보겠다”고 말했다.서영률프라타마 아바디 대표청주고등학교고려대 경영학과대성목재, 럭키개발, 코린도 근무프라타마 아바디 감사글 김태완·사진 이승재 기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