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죽음 사이 존재하는 와인 ‘샤토 마르고’

인적으로 몇 년 전부터 안고 가고 있는 독서의 주제는 ‘죽음’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사가 쓴 죽음에 관한 여러 책들을 시작으로 5월부터 천천히 읽어가고 있던 책은 <티벳 사자의 서>였다. 올해 상반기에는 유독 이 주제에 대해 더욱 묵상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졌다. 2월 김수환 추기경 선종을 시작으로 오랜 논란 끝에 대법원은 5월 21일, 드디어 존엄사를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더니 바로 이틀 뒤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은 삼십 몇 년 전 내가 세상에 나온 날이었고, 이날을 기념해 보자고 친한 친구와 함께 떠난 나들이 길이었다.예정되었던 뒤풀이 저녁 식사 자리에는 지인이 특별히 준비해 놓은 샴페인이 맛있는 온도로 세팅 되어 있었지만 이날 이 와인의 마개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대신 무얼 마실까, 어떤 와인이면 좋겠니?’ 라는 물음을 눈으로 주고 받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입 밖으로 낸 와인이 ‘샤토 마르고(Chateau Margaux)’였다.샤토 마르고는 보르도 1등급 와인 5개 중에서 이상하리만큼 ‘죽음’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많은 사연을 갖고 있는 와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일본의 의사 출신 소설가 와타나베 준이치는 그의 소설 <실락원>에서 불륜의 사랑에 빠진 남녀 주인공을 자살로 이끌며 그 순간 샤토 마르고를 함께 등장시켰다.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꿰찬 덕에 그 인기가 치솟아 일본에서 한때 이 와인의 매출도 수직 상승했다.일본에서 샤토 마르고는 이미 <실락원> 이전에 대단한 신고식을 치른 와인이다. 사연인 즉, 아직 일본에 와인이 적극적으로 소개되기도 전인 70년대 말, 도쿄에 위치한 미쓰비시 은행에 강도가 침입했다. 수세에 몰리자 강도는 30명의 목숨을 담보로 한 인질극을 벌였다. 경찰과 대치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인질범은 경찰에 저녁 식사를 요청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메뉴 리스트에 샤토 마르고가 있었다고 한다. 굳이 그 순간에 마르고를 원했던 이유는 인질범이 사살되면서 끝내 밝혀질 순 없었지만 30명의 목숨과 인질범을 겨냥한 백 개가 넘는 총구 사이에 놓여 있었던 건 어찌되었든 샤토 마르고였다.직접적인 죽음의 사유와 맞물리는 건 아니지만, 또 다른 관련 이야기 주인공은 어네스트 헤밍웨이다. ‘와인과 유명인’을 언급하는 글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헤밍웨이와 샤토 마르고의 관계는 특별했다. 그런 헤밍웨이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할아버지의 각별한 샤토 마르고 사랑 덕에 이름을 마르고로 갖게 된 손녀 역시 스스로 삶을 놓아버렸다. 한때 모델 및 영화배우로도 활발히 활동하면서 샤토 마르고와 같이 우아하면서도 매력적인 여성으로 우뚝 서는 듯 했다. 하지만 2번의 이혼과 계속되는 불행을 겪으며 과도하게 약에 의존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녀가 죽은 그날이 하필 꼭 35년 전 헤밍웨이가 자살한 날과 같았다고 하니 애잔한 마음이 더하다.‘당신이라면 마지막 순간에 어떤 와인을 마실 것 같으냐?’는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나마 여러 와인을 떠올려 보기도 했고, 올해 초 미국에서 들려온 릿지 빈야드(Ridge Vinyards) CEO자살에 대해서도 얘기를 주고받는 등 그날 저녁 늦도록 ‘죽음’ 주위를 맴돌았다.마지막 잔을 비워야 했던 순간, 별 말이 없던 지인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엥겔스 있잖아, 공산당 선언 쓴… 누군가 그에게 물었데. 당신에게 행복이냐고 무엇이냐고. 그이 답이 뭐 였는 줄 아니? ‘샤토 마르고’.”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 땅에 행복을 묻는 질문에 엥겔스처럼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각자의 답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을 나는 믿는다.1. 24년째 샤토 마르고와 삶을 같이해 온 샤토 마르고 와이너리 소유주 코린 멘젤로풀로(좌)와 와인 메이커 폴 퐁탈리에2. 토마스 제퍼슨 사인이 새겨진 1784년산 샤토 마르고3. 샤토 마르고 건물 전경4. 샤토 마르고의 지하저장고(까브)의 모습.5. 가을의 색감이 인상적인 샤토 마르고의 포도원. 192.7에이커에 까베르네 쇼비뇽 75%, 메를로 20%, 까베르네 프랑과 프티 베르도가 5%를 차지한다.1헥타르당 1만 그루의 나무가 있다.글 김혜주 알덴테북스 대표·사진 알덴테북스, 와인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