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Monet
그림과 꽃 이 외에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가 칠십이 넘은 노구에 햇살이 연못에 반짝이는 지베르니의 정원을 바라보며 한 말이다. 화가의 어록 가운데 참으로 멋진 말이다. 모네는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자연과 벗한 화가이자 인상파 화가의 정점이었고 동시에 20세기 추상 미술의 선구자였다.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어딜까.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곧 천국이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천국은 아무도 모른다. 천국은 ‘참된 신자가 죽은 후 그 영혼이 가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장소’라고 한다. 철따라 수많은 빛깔의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흐르고, 온갖 종류의 새가 노래하며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풍요와 사랑이 넘치는 낙원의 땅 천국은 성경 속의 다음세상이요 꿈의 이상향이다. 천국은 낙원의 동의어일까.지난 5월 초, 나는 아침 일찍 지베르니를 찾았다. 지베르니는 파리 서쪽 약 80km 떨어진 일 드 프랑스와 노르망디의 경계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세느강이 흐르고 강변 포플러나무가 오월의 미풍에 흔들린다. 지베르니에 모네가 살지 않았다면 프랑스 시골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마을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위대한 화가가 경영한 아름다운 정원은 전 세계 미술애호가와 화가들의 부러움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아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수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문화의 명소가 되었다.[클로드 모네, <수련> 1916-1922년경 캔버스에 유화.]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은 크게 꽃밭과 연못으로 나누어진다. 마을 언덕 정원의 북쪽 끝자락에 화실을 두고 남쪽으로 꽃밭을 격하여 연못을 두었다. 모네는 유럽과 일본 정원의 장점을 모아 하나로 통합하여 정원의 경계를 허물었다.1883년 5월, 모네는 경제적인 이유와 그림 때문에 파리, 아르장퇴유, 베테유, 푸아시 등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지베르니에 정원이 딸린 평범하지만 커다란 집을 빌려 가족과 함께 정착한다. 집 앞에는 사과와 자두, 복숭아 그리고 체리나무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다.모네가 지베르니에서 몇 년을 지낸 1880년대 후반, 드디어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하고 그림이 고가에 팔리면서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1887년 모네작품 딜러인 파리의 화상 뒤랑 뤼엘이 뉴욕에 화랑을 열고 모네의 작품을 전시하여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1889년 파리의 조르주 프티에서 로댕(1840~1917)과의 합동전시회 역시 대성공이었다. 이제 부와 명성을 함께 갖게 된 모네는 자신의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1883년부터 빌려 살고 있던 지베르니의 집과 과수원을 1890년 11월 정식으로 구입하여 모네의 완전한 소유물이 된 것이다.모네의 정원. 튤립이며 팬지 붓꽃 모란 장미 양귀비 등 형형색색의 꽃이 눈부시게 피어있다. 꽃 색감이 서울과 다르다. 기후와 토양의 차이리라. CANON EOS 5D, CANON LENS EF 1:2.8 L 24-70mm DIGITAL 최선호ⓒ1891년 봄부터 모네는 드디어 자신의 꿈의 정원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신의 절친한 친구로부터 소개 받은 정원사 펠릭스와 함께 일을 시작해 나중에는 정원사가 모두 6명으로 늘어났다. 1892년 린덴나무 숲 가까이 온실을 만들고 어린 꽃나무 묘목과 초본구근을 키웠다.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내어 다섯 명의 정원사와 꽃을 심고 화단을 만들어 정원을 만들어 나갔다. 정원에는 프랑스의 조경수와 네덜란드, 영국의 튤립, 장미 등 화사한 꽃도 심었지만, 일본의 창포와 붓꽃 등 진귀한 화초와 등나무와 대나무 같은 나무도 구해 심었다.1897년 모네는 지베르니에 커다란 2층 벽돌집을 지었다. 2층에는 화실 겸 응접실이 달린 침실을 두고 아래층에 주방과 식당을 만들었다. 집안은 일본 목판화를 가득 장식하였고, 화려한 가구와 고급 그랜드피아노가 거실 한편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사교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대목이다. 창문에는 녹색을 칠하고 담쟁이 넝쿨과 장미로 화사하고 고풍스러운 맛을 내었다. 1층 주방엔 아라비아 풍 타일이 바닥에 깔렸고 노란색을 칠한 벽에는 순동의 다양한 조리기구가 벽에 빼곡히 걸려 있다.모네의 2층 화실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니 꽃밭에 꽃들이 가득, 그야말로 꽃 천지다. 붓꽃 장미 튤립 모란 작약 팬지며 등꽃 수선화 양귀비 해당화 아카시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꽃들이 다투어 피어있다. 꽃과 나무가 정원의 오솔길 사이로 흐트러짐 하나 없이 질서정연하다.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고 새들이 노래한다. 정원 모퉁이에는 한낮에 목청껏 울어대는 수탉의 웃음소리가 한적한 시골의 정서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정원 길 건너 숲이 우거진 곳이 연못이다. 꽃에서 연못으로 이어진 감동은 등꽃이 흐드러지게 핀 무지개다리에서 감탄으로 바뀌었다. 멋과 풍류가 한껏 어우러진다. 모네는 후세의 예술가와 대중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상하는 법’을 이 정원에 남겨놓고 갔다. 모네의 정원은 진정 그의 그림만큼이나 위대한 유산이다.모네가 꽃밭 정원을 만들다보니 일본풍 연못정원이 그리웠다. 일본은 인상파 화가들이 가장 동경하는 나라로 당시 파리화단에 일본 문화와 목판화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모노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일본가구로 장식하고 일본도자기를 감상하며 일본문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 파리 사교계의 유행이었다. 모네는 자기 부인에게 기모노를 입혀 일본부채를 들고 교태를 부리는 인물화를 그려 인상파전람회에 출품,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빈센트 반 고흐는 아예 일본의 우끼요에(浮世繪)작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1797~1858)의 목판화를 그대로 베껴 유화로 그려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여인>이라든지, 로트렉의 <무랭루즈에서 춤추는 여인>, 혹은 호쿠사이의 <부악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의 이미지를 차용한 피에르 보나르의 <칼라 리도그라피>와 에드워드 마네의 <일본부채가 있는 인물화>, 제임스 티솟의<일본잠옷을 걸친 여인상> 등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화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심지어 세잔조차 그의 액상프로방스 화실에 일본부채와 옷 칠과 나전의 머리빗 그리고 일본직물 소품들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마음으로 일본문화를 동경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와 일본은 서로 열애 중이었고, 지금도 그 문화애정은 각별하다. 파리 시내 세느 강변에 자리한 팔레 드 도쿄나 일본서점가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프랑스 관련 서적과 일본미술관의 수준 높은 인상파 컬렉션이 그 실상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모네는 일본식 정원을 만들어 수련도 키우고 일본 무지개다리도 만들고 싶었다. 마침내 모네는 자신의 집 아래쪽 철길근처의 목초지 7500㎡를 구입해 작은 수로를 만들어 연못을 파고 연못가에 버드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다. 나중에 연못과 수련만 담당하는 정원사를 따로 고용했다. 1895년 모네는 히로시게가 죽기 1년 전 에도 풍경을 그려낸 목판화 <명소강호백경>(名所江戶百景) 중 하나인 <가메이도의 물 위에 핀 등나무 꽃>을 모델로 삼아 지베르니 연못에 무지개다리를 만들고 보라색 등꽃나무를 심었다. 연못가 자투리땅에 꽃을 심고 남은 터는 일본 전통정원처럼 잔디를 깔고 섬돌을 두었다. 모네는 일본미감의 이상주의자였다. 완벽한 일본정원이 완성된 셈이다.모네는 연못이 완성되자 여름 동트기 전 일찍 일어나 배불리 아침식사를 하고 화구를 챙겨 수련연못으로 나갔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수련은 마치 진주조개의 속살을 보는 듯 신비롭고 영롱했다. 바람이 살짝 불어 물결이 일면 수련 잎이 버드나무 이파리와 함께 출렁거렸다. 모네는 평생 담아온 빛의 인상을 캔버스로 옮겼다. 때로는 재빠르게, 때로는 한참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기곤 하다가 한낮의 해가 중천에 올라서야 붓을 놓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른 점심을 하고 다시 오후의 햇빛을 놓치지 않고 그려나갔다. 화면 위로는 햇살이 출렁이고 색이 살아 있었다. 모네의 수련은 파리의 애호가 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1908년부터 백내장으로 시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음을 안 모네는 오랫동안 주저하다가 두 번의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1911년 부인의 죽음과 3년 뒤 장남의 사망은 모네에게 우울증과 깊은 영혼의 상처를 주었다. 1919년 자신의 오랜 친구인 르누아르가 세상을 떠났다. 늙은 화가는 연못가에 홀로 남았다. 자신의 마지막 대작을 준비했다. 모네는 수련 연작을 위해 길이 24m, 너비 12m의 대형 작업실을 새로 지었다. 모네는 방 하나를 수련 작품으로 장식하여, 끝없는 통일체라는 환상을 창출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한 상태로 명상에 잠기게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모네는 1916부터 1926년까지 10년에 걸친 <수련, 아침>연작을 완성했다. 이 거대한 작업은 모네가 죽은 후 프랑스정부에 기증됐고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영구 전시됐다. 화가이자 판화가인 앙드레 마송(1896~1987)은 모네의 <수련>이 걸린 오랑주리 미술관을 ‘인상주의의 시스티나 성당’이라 불렀다. 모네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모네가 지베르니에 꽃과 연못의 낙원을 만든 해가 1890년. 그해는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해였다. 고흐는 살아서 따뜻한 사랑 한번 해보지 못하고 광기와 우울증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과 확신으로 생의 마지막까지 예술 혼을 불태웠다. 1890년 지베르니 정원을 만들고부터 1926년 죽기까지 36년간(빈센트는 37년 내내 처절한 삶) 살아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모네는 죽어서도 지베르니 성당 양지바른 묘역에 철마다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석분에 누워있지만, 지척의 거리에서 동시대를 살다간 고흐는 오베르공동묘지에 동생 테오와 나란히 누워 아이비 넝쿨로 조촐하게 덮여 있다. 고흐는 죽어서도 가난했다. 동시대 화가이자 이 시대 최고의 명성을 날리는 두 화가의 삶이 극과 극이다. 모네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왜 고흐 생각이 날까. 생각하면 가슴이 시릴 뿐이다.모네의 정원, 꽃과 자연이 어우러진 지상의 낙원이다. 꽃이 어찌나 많고 화려한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Leica M6, SUMMICRON-M 1:2 / 35mm PROVIA 100F 최선호ⓒ지베르니 모네의 집과 정원. 외관이 모네의 집답게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했다. 실내는 일본목판화와 가구로 최상의 호사를 부렸다. 정원의 꽃향기가 2층 화실에 가득하다. Leica M6, SUMMICRON-M 1:2 / 35mm PROVIA 100F 최선호ⓒ 111w111@hanmail.net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뉴욕대학교(NYU)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 SADI 교수 및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역임, 현재 전업 작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글·사진 최선호(화가)©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