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태국 음식점에 가서 크게 들숨을 쉬어 본 적이 있는가.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대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국적인 향취 속에 배어 든, 짜고 맵고 시고 달짝지근한 향신료의 조화를. 이 오묘한 맛의 어우러짐을 즐길 줄 아는 미식가들이 우글거리는 곳. 태국이 중국, 프랑스와 함께 세계 3대 국물 요리를 배출한 나라의 반열에 오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앞쪽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세계 3대 수프에 속하는 얌꿍, 파인애플을 넣어 만든 볶음밥 카오팟, 태국식 해산물 쌀국수 샐러드 얌운센, 그린 파파야 샐러드 솜땀.
앞쪽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세계 3대 수프에 속하는 얌꿍, 파인애플을 넣어 만든 볶음밥 카오팟, 태국식 해산물 쌀국수 샐러드 얌운센, 그린 파파야 샐러드 솜땀.
“한번 먹으면 모릅니다. 딱 다섯 숟갈만 떠먹어 보세요. 처음에는 시고, 두 번째는 맵고, 세 번째는 짜고, 네 번째는 달 겁니다. 그리고 다섯 번 먹으면 그 맛을 모두 느낄 수 있죠.”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정통 태국음식점‘ 소이22’의 난 셰프가 갓 끓인 얌꿍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숟가락을 내밀었다. 세상의 어떤 음식에도 기꺼이 도전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기자이건만, 어쩐지 선 뜻 손이 가지 않았다. 몇 해 전 태국에서 고수가 듬뿍 올라간 얌꿍을 먹다가 호되게 당했던(?) 경험이 있어선지 등줄기에 땀방울까지 흘러내렸다. 강렬한 향에 색깔마저 공격적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얌꿍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입 속에서 반전의 맛이 펼쳐졌다. 혀끝에 감도는 라임 향은 상큼했고, 끝 맛은 담백했다. 얼얼하게 매우면서도 시원하기까지 한 국물은 그야말로 중독성이 있었다. 마치 입 속에서 갖가지 향신료 폭죽이 터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대여섯 번 쯤 음미한 깊은 맛의 육수는 가슴 속까지 따뜻하게 채우는 그런 감동을 주었다.


세계 3대 수프 얌꿍, 태국인의 보양식이자 솔푸드
태국식 새우수프인 얌꿍은 프랑스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즐겨 먹는 생선수프 부야베스, 중국의 상어지느러미로 만든 샥스핀과 함께 세계 3대 수프로 통한다. 원조는 태국이지만 라오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도 이 요리를 즐긴다. 배고프던 시절, 가난한 태국인들이 집에서 먹다 남은 양념과 향신료를 모두 넣고 섞어서 국을 끓여 먹은 데서 유래한 음식이지만, 지금은 태국에서도 일상적으로 먹을 수 없는 고급 음식이 됐다.

똠은‘ 삶는다’는 말이며, 얌은‘ 맵고, 신 샐러드’를 뜻하고,‘꿍’은 왕새우를 일컬으니, 뜻을 풀이하면 새우가 들어간 맵고, 신 수프가 바로 얌꿍이다.

난 셰프는 냄비 뚜껑을 열어 닭 육수에 왕새우와 레몬그라스, 대파, 쥐똥고추, 갈랑갈(생강의 일종) 등 각종 향신료를 넣어 우린 국물을 보여 주며“ 이걸 5~6시간 중불에 푹 끓였기 때문에 깊은 맛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생선소스, 고추 등의 조미료와 라임 과즙으로 간을 맞춰야 얌꿍 특유의 맵고 신맛이 골고루 난다.
청담동 정통 태국 음식점‘ 소이22’의 실내 모습.
청담동 정통 태국 음식점‘ 소이22’의 실내 모습.
태국 사람들은 특별한 모임이 있을 때 얌꿍을 신선로처럼 생긴 냄비에 끓여 나눠 먹는다. 몸살 기운이 있을 때, 타국에서 고향의 맛이 그리울 때도 어김없이 얌꿍을 한 냄비 끓인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치유하고 영혼을 위로해 주는 맛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재밌는 것은, 우리가 감기를 심하게 앓을 때 콩나물국과 고춧가루 탄 소주를 마시는 것처럼 태국에서도 얌꿍 국물 한 숟갈 먹고 럼주를 들이키는 것이 민간요법이라고 한다. 알코올이 섞이면 향신료의 오묘한맛이 극대화되는데, 그 또한 미식가들에게는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이처럼 한 가지 음식 안에서도 복합적인 맛을 즐기는 태국 사람들은 주식인 쌀국수를 먹을 때도 가만히있지 못한다. 설탕이나 땅콩가루를 넣어 달고 고소한 맛을, 식초를 첨가해 신맛을, 피시소스를 뿌려 짠맛을 가미한다. 태국 파타야에 10년 넘게 거주하다 최근 홍익대 주변에 타이 음식점‘ 콘타이’를 오픈한 최영규 대표는 식당에 이러한 태국인들의 취향을 그대로 가져왔다. 땅콩가루와 식초, 고춧가루, 피시소스를 테이블에 올려 두고 입맛대로 조제해(?) 먹으라는 뜻이다. 최 대표는“ 태국은 날씨가 덥다 보니 사람들이 밋밋한 맛을 선천적으로 싫어한다”며“ 모든 음식이 맵거나 달거나 짜거나 신 것은 향신료의 자극적인 맛을 제대로 즐길 줄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이22’의 태국인 셰프 난 씨. 그는“ 얌꿍은 국물을 다섯 번 떠먹어 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소이22’의 태국인 셰프 난 씨. 그는“ 얌꿍은 국물을 다섯 번 떠먹어 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집밥 No! 식사부터 군것질까지 길거리 음식 즐겨
태국은 길거리 음식의 천국이다. 반대로‘ 집밥’이라는 개념이 없다.
방콕의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노점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집에서 주로 밥을 먹는 우리와 달리 외식 문화가 발달했다. 가정에는 부엌이 아예 없거나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더운 날씨 탓에 불 앞에 서서 요리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사먹는 것이 훨씬 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퇴근길, 노점상에서 산 음식담은 비닐봉지를 손에 든 채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태국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워낙 식재료가 다양해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의 종류만도 수십 가지에 달한다. 그린 파파야 샐러드‘ 솜땀’, 닭고기나 해물을 넣은 볶음밥 ‘카오팟’, 볶음 쌀국수‘ 팟타이’, 코코넛과 바질을 넣어서 끓인 카레 ‘캥 파나엥’ 등 노점상에서 사 온 음식들을 집에서 펼쳐 놓고 가족들과 함께 나눠 먹는다. 이들은 과식하지 않고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는 편인데, 많게는 하루에 7번도 식사를 한다는 게 성 대표의 얘기다. 특히 군것질을 워낙 좋아해 각종 꼬치나 튀김, 망고스틴, 람부탄, 리치 같은 열대과일을 비롯해 달짝지근한 디저트 카놈완 등을 수시로 먹는다.

이러한 태국인들에게 의식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아마 먹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고단한 하루를 견디는 데 있어 음식은 가장 큰 동력일 것이다. 수백 가지 신선한 식재료들이 있고, 수천 종에 달하는 향신료가 있으니 태국 음식의 영역은 아마 무한대일 터.‘ 신의 미각’으로 그것들을 모두 음미할 수 있음은 진정 행운이다.

[TASTE THE WORLD|THAILAND] 국물 속 향신료 폭죽, 그 묘한 맛의 어우러짐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