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이상봉-이청청 부자

이상봉. 디자이너 혹은 여성복 브랜드 이상봉(LIE SANG BONG)의 대표로 그의 이름은 입지전적이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들 이청청(37)은 국내외에서 주목하는 신예 디자이너이자 이상봉의 하우스 브랜드 라이(LIE)의 대표다. 아들이 자신의 명성을 뛰어넘는 디자이너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브랜드 이상봉을 세계적인 패션 가문으로 키우고자 하는 아들, 이들 부자(父子)가 바꿔놓을 한국 패션계의 내일이 자못 기대된다.
[SUCCESSOR] “제냐 같은 패션 가문 한국에서도 나와야죠”
“1%의 가능성만 있다면 도전하라! 그것이 곧 열정이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이상봉 부티크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걸린 커다란 문구가 눈에 띄었다. 뻔한 글귀가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만든 사훈이라면 조금 더 ‘유니크’하거나 ‘아방가르드’할 것이라 기대했던 터였다. 오는 9월에 있을 뉴욕컬렉션 준비로 분주한 이상봉 디자이너를 대신해 아들 이청청 디자이너가 먼저 취재진을 맞았다.

“선생님께서는 평생 옷을 만들어 오셨지만 아직도 패션쇼에 오르기 전 무섭도록 열정을 쏟으십니다. 스스로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끝없는 노력만이 살길이라 여기시는 거죠. 선생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예요.”

이상봉(LIE SANG BONG)의 팀장과 라이(LIE)의 대표 겸 크리에이티브디렉터(CD)를 겸하고 있는 이청청 디자이너는 말끝마다 이상봉을 ‘선생님’이라고 칭했다. 함께 작업하면서 호칭이 입에 붙은 이유도 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그에게 이상봉은 ‘아버지’였던 적보다 유명 디자이너였던 적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어린 이청청의 눈에 너무 일만 알았던 아버지는 때론 원망의 대상이었다.


‘아버지’ 아닌 ‘디자이너’였던 이상봉
평범한 삶 원했지만 결국 패션계 입문 운명

“아빠들은 원래 그렇게 다 바쁜 줄 알았어요. 그 시대(1970년대)의 가장들이 으레 가정보다는 일터에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저희 아버지는 직업상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보다 가족과 보낸 시간이 더 적었던 것 같아요. 어쩌다 제 졸업식장을 찾은 아버지의 모습은 자랑스럽기보다는 창피했습니다. 밀리터리 무늬 롱 코트에 독특한 머리 스타일(민머리)까지 아버지와 있으면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거든요.(웃음)”

스스로 의지와 상관없이 평범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낸 탓에 ‘절대적 평범’을 삶의 모토로 삼은 그였다. 그러나 이청청은 어느 순간 아버지의 옷장을 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등학생 때는 독특한 스타일의 아버지 정장을 입고 밖에 나가기도 했다. 아버지의 패션쇼를 보면서 남몰래 키워 온 디자이너에 대한 열망이 조금씩 분출되고 있었다.

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공부하던 그는 결국 진로를 틀어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영국 센트럴세인트마틴스예술대에서 아트디자인을 전공했다. 잠시 한국에 왔다가 2006년 29세의 나이에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남성 패션을 공부했다. 꽤 늦은 나이에 시작한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첫 발걸음이었지만 이청청은 꽤나 승승장구했다. 런던 유명 백화점이 선정하는 젊은 디자이너 유망주에 이름을 올렸고, 2007 봄·여름(SS) 런던컬렉션에 참가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영국에서 계속 활동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2010년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상봉의 아들’이 아닌 ‘디자이너 이청청’으로 국내에서 정면 승부를 펼치고 싶어서다.

“영국에서 활동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한국으로 돌아온 건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혼자 힘으로 성공하고 싶어 영국에서 3년 동안 이 악물고 견뎠거든요. 난방도 안 들어오는 지하 스튜디오에 침낭 하나 깔아 놓고 씻고 먹고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헝그리 정신으로 3년을 버텼어요. 그러면서 (유명 디자이너의 아들로서 갖는) 자격지심도, 부담감도 다 떨쳤습니다.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되, 장점을 극대화시켜서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법을 고민하고 있죠.”

올 초 이청청은 2014 가을·겨울(FW) 서울패션위크 제너레이션넥스트에 라이(LIE)라는 이름으로 첫 출전해 성공적으로 무대를 꾸몄다. 2012년 론칭한 그의 야심작 ‘라이’는 여성복 ‘이상봉’의 하우스 브랜드이지만, ‘이상봉’과는 법인도 대표도 다른 완전히 독립된 브랜드다. 그동안 해외 비즈니스를 위주로 해 왔으며, 오는 9월 1일 국내 단독 매장 오픈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왜 브랜드 이름을 ‘이청청’으로 짓지 않았을까. 그는 “내 이름이 맑을 청(淸)에 푸를 청(靑)인데 브랜드 네임으로 특이하긴 하지만 멋이 없다. 사실 ‘이상봉’도 그다지 멋있는 브랜드 네임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며 웃었다.


아버지는 전위적 패션, 아들은 댄디 스타일
디자이너 2세들 똘똘 뭉쳐 가업 이어 나가야

이청청의 독특한 ‘이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상봉 디자이너가 인터뷰가 진행 중인 매장으로 내려왔다. 아들이 네이비 셔츠와 팬츠로 클래식하고 댄디하게 꾸민 데 반해 아버지는 화이트 셔츠에 배기팬츠(승마바지), 발목까지 올라오는 스니커즈를 매치해 오히려 개성 넘치는 패션을 완성했다. 이청청이 “패션에 관한 한 선생님께서 훨씬 자유분방하다”고 귀띔하자 이를 들은 이상봉은 “너도 좀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맞받았다.

이상봉은 “세월이 갈수록 아들이 인생의 동반자가 돼 가는 것 같다”고 했다. 옆자리에 앉은 이청청에게 보내는 지긋한 눈빛에는 대견함과 고마움 등 여러 감정이 뒤섞여 보였다. 그는 한번도 자녀들에게 “디자이너가 돼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지만 내심 가업을 이어주었으면 했다. 그랬던 아들이 직원이자 동료 디자이너로 함께 일하고 있으니 든든할 법도 하지만, 그는 어떤 제자들보다 이청청을 혹독하게 가르친다. 아들이 앞으로 더욱 우뚝 서야 하기 때문이다.
[SUCCESSOR] “제냐 같은 패션 가문 한국에서도 나와야죠”
“보통 2세들이 홀로서기에 실패하는 건 세간의 시선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누구 아들인데 이 정도는 하겠지’ 하는 기대들 있잖아요. 부모 세대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부담감을 견뎌내고 부단히 단련해야 합니다. 우리 때는 먹고 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했죠. 그 치열함이 지금의 ‘이상봉’을 만들었고요. 요즘 세대들은 즐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전에 죽느냐 사느냐의 간절함을 지녀야 한다고 봐요. 그런 정신이 패션 브랜드 이상봉의 제2의 도약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이상봉)

아버지가 패션 디자이너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이청청은 가업을 이어 ‘이상봉’을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시키고자 한다. 그는 “선생님은 뛰어난 아티스트이지만 비즈니스에 있어서는 내가 더 오픈 마인드”라며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 나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경영 전략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청청은 패션업체를 경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브랜딩’을 꼽았다.

“제품의 품질이나 디자인은 기본이에요. 소비자들이 브랜드 로열티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 중요하죠. 흔히 명품들은 원가가 저렴한 티셔츠 한 장도 비싼 가격에 팔잖아요. 소비자들은 브랜드의 가치를 인정해 기꺼이 지갑을 열고요. 패션 피플들은 앞으로 이러한 소비를 더 추구할 것이라고 보고 우리도 제품의 품질과 브랜드 가치를 동시에 높이는 데 주력하고자 합니다.”(이청청)

디자인에 스토리를 불어넣는 작업도 계속할 예정이다. 여성복 이상봉은 그동안 한글이나 나비 문양, 단청 등 동양적인 소재들을 디자인과 접목시켜 브랜드를 세계에 알려 왔다. 앞으로도 외국 사람들이 신선하게 여기고 호기심을 가질 만한 한국적인 요소들을 꾸준히 선보일 계획이다.

이상봉은 “우리나라에서도 ‘펜디’나 ‘제냐’처럼 몇 대에 걸쳐 성공적인 가족경영을 해 오는 패션 가문이 나와야 할 때”라고 말했다. 중견 디자이너 설윤형의 딸 이주영, 김동순 디자이너의 딸 송자인, 문영희 디자이너의 아들 김무홍 등 부모의 뒤를 잇는 패션 디자이너 2세들의 종횡무진 활약이 이어지고 있어 업계의 분위기가 좋다.

“20년 전만 해도 예술 하는 사람들을 천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디자이너들이 자녀에게 직업을 대물림하지 않으려 했죠. 그러면서 브랜드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가업이 단절된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패션이 하나의 예술 산업으로 인정받는 창조경제 시대엔 우리나라에서도 대를 잇는 디자이너가 얼마든 나올 수 있죠.”(이상봉)

그는 “내가 이상봉을 만들어 30년을 끌어 왔고, 청청이가 이어받아 확장시켜 가면 반세기가 넘어간다”며 “그다음 세대로 가업이 넘어간다면 100년 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눈빛을 반짝였다.

“아비를 뛰어넘는 디자이너가 되거라. 훗날 내 무덤에 와서 네가 만들어 온 것을 멋지게 포장해서 이야기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겠다”고 말하는 이상봉에게 이청청은 “수백 년 후에도 ‘이상봉’이 역사적인 브랜드이자 디자이너로 남을 수 있게 잘 키워가겠다”고 화답했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