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을 열광케 하는 그들만의 콘텐츠_네 번째

남성성이 퇴색하고 있는 시대라지만, 유전자 속에 숨은 마초 기질은 어쩔 수 없는 법. 캐릭터도, 스케일도, 그리고 스토리가 품고 있는 메시지도 남자들을 제대로 자극하니, 이제 해적선에 승선하시라.
[MEN`S CONTENTS] 해적과 현대인의 완벽한 평행이론, 미드 ‘검은 해적’
대개의 영화는 투자적인 마인드로 제작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다소 과감한 비용을 투입하거나 파격적인 소재를 택할 때가 많다. 반면 TV 드라마는 안정적인 것을 추구한다. 대략의 제작비가 미리 정해진 상태인 데다 주 시청자마저 크게 다르지 않다 보니 자칫 파격을 택했다가는 처참한 시청률을 받아들기 십상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해적들의 이야기는 TV 드라마로 만나기 참으로 어려운 소재다. 한두 번도 아니고 거대한 파도와 전투 신을 어떻게 만들어 내겠는가. 러브라인은 또 어떻고. 거칠고 지저분한 상남자들만 득실대니 막장은 고사하고 드라마의 필수적인 흥행 코드라 할 애절한 사랑 타령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선택을 한 이가 있다. 그는 바로 영화 ‘트랜스포머’로 잘 알려진 마이클 베이 감독이다. 영화판을 고집하던 그가 TV 드라마에 첫발을 들이면서 내놓은 ‘검은 해적’은 소설 ‘보물섬’의 프리퀄(prequel·전편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다룬 속편) 시나리오로 원작의 20년 전 상황을 다룬다. 그래서 소설은 외다리 존 실버가 플린트 선장이 숨긴 보물을 찾아다니는 이야기인 데 반해 드라마는 플린트 선장을 중심으로 한 해적들의 소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존 실버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지가 사뭇 다르다. 외다리도 아니고 서슴없이 목숨을 앗아가던 악마 같은 모습도 없다. 그저 약삭빠른 눈치로 목숨을 이어나갈 뿐이다.

스토리 언급을 좀 더 하자면 이 드라마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플린트 선장’이다. 소설을 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그를 악명 높은 전설의 해적으로 묘사했지만 마이클 베이 감독은 그를 번뇌에 찬 인물로 새로이 탄생시켰다. 친구의 아내를 넘본 죄로 해군 장교복을 벗어야만 했던 남자. 사랑의 도피로 인해 군인의 명예 대신 약탈을 일삼으며 살아가고 있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해적들의 이야기? 우리들의 자화상!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 플린트 선장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무모하다는 걸 알지만 돌진해야 하고, 손해인 게 빤히 보여도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만 하는 모습이 생활전선에 내몰린 가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플린트 선장은 자신의 통솔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데 그 모습이 흡사 무한경쟁에 내몰린 현대인의 모습과도 같다. 또한 내부 동요를 막고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거짓말로 ‘보물지도’를 손에 넣었다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돌파구를 찾아야만 하는 외로운 리더의 그늘진 얼굴이 보였다. 전투를 마친 뒤 아내를 찾아가 몸을 기댈 때에도 마찬가지.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직장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18세기 카리브 해역을 누비던 무법자들에게서 발견하는 문명사회의 서글픔, 마치 평행이론을 보는 듯하다.

인물들 간에 깔려 있는 관계만 놓고 봐도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보물지도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고 남몰래 추적해 온 ‘플린트’ 선장, 그보다 한발 앞서 우연히 지도를 손에 쥔 ‘실버’, 그리고 집안의 후광을 업고서 해적들의 약탈물을 처분해 주는 젊은 거상 ‘엘리너 거스리’와 호시탐탐 플린트 선장의 자리를 넘보는 ‘베인’ 선장. 이들은 서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치적인 계산을 주고받는다.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감정이입이 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시라.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언제 도덕적인 기준으로 편을 갈랐던가? 내게 득이 되면 내 편이고 나를 이기려 들면 적이었지.

우리는 흔히 조직을 배에 비유하곤 한다. 리더는 선장으로 구성원들은 선원에 빗대어 각자의 책임과 역할을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라면 누구나 이 드라마를 통해 희열을 만끽할 수 있다. 어떤 위치에 있든 동질감을 느끼며 힐링을 얻을 수 있다.

남자는 남자다. 제아무리 남성성을 죽이고 사는 시대라지만 해적 못지않은 마초 기질은 누구나 하나쯤 유전자 속에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아내를 위해 앞치마 두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필자도 ‘검은 해적’이 방송되는 월요일 밤이면 케이블 채널을 돌려 해적선에 조용히 승선한다.


김상명 시나리오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