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 대표의 책임 건축

주거와 상업 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여 온 김종호 디자인스튜디오 대표는 건축을 논할 때마다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강조한다. 책임이라는 이 무거운 단어가 건축에서 발휘하는 힘은 의외로 크다. 특히나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주거 공간이라면 더더욱. 그런 면에서 보면 김 대표는 건축가 혹은 공간 디자이너를 넘어 라이프스타일 메이커다.
[BEYOND ARCHITECTURE] 공간을 넘어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하다
건축의 과정은 몇 가지로 나뉜다. 어떤 경우엔 건축가가 외형적인 매스에서부터 내부 디자인까지 총괄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건축가와 실내건축가가 협업해 작업이 이뤄지기도 한다. 앞의 두 경우보다는 드물지만 실내건축가가 전체 설계부터 내부 디자인까지 맡기도 한다. 김종호 디자인스튜디오 대표는 내부 공간을 디자인하는 실내건축가이지만, 때로 내·외부를 총괄 설계 및 디자인하기도 한다. 요즘처럼 공간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선 김 대표 같은 실내건축가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특히 주거 공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의 삶을 투영하고, 라이프스타일을 좌우하는 곳이니 어떤 철학을 가진 디자이너의 공간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은 천차만별이 될 수도 있을 터. 국내외를 막론하고 내로라하는 공간에서 김 대표의 이름을 만날 수 있는 건 그래서 다행이고 당연하다.

1989년과 1990년 뉴욕 설계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1990년 전미 설계공모전에서 특별상을 받았으며, 2004년에는 전미인테리어디자이너협회(ASID)가 발간하는 ‘세계의 뛰어난 디자이너들(Great Designers of the World)’이라는 책에 한국인 최초로 소개되는 등 화려한 이력으로도 눈길을 끄는 그이지만, 무엇보다 포트폴리오만큼 그를 잘 설명해 주는 건 없다. 베트남 인터콘티넨탈 호텔, 서울 강남역 GT타워, 삼성동 아이파크 펜트하우스, 현대산업개발 삼성동 사옥, 호텔 파크하얏트 서울·부산 등 그 결과물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 하우징, 오피스, 갤러리, 호텔 등 주거와 상업 공간을 넘나들며 디자인을 하고 있는 그이지만, 공간 성격에 상관없이 일관된 철학이 있으니 바로 디자이너의 도덕적, 사회적 책임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한남동 주택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재질의 매스를 흐르듯 연결한 외형으로 돼 있다.
한남동 주택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재질의 매스를 흐르듯 연결한 외형으로 돼 있다.
“클라이언트를 이용해 디자이너가 하고 싶은 걸 하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특히나 주택 같은 경우는 더 그래요. 여러 번 만나 공감대를 형성하고 건축주의 시각에서 완성해 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클라이언트의 잘못된 생각을 설득하기도 하지만, 한복과 된장찌개를 좋아하는 이에게 양복에 양식을 강요하면 안 되죠. 상업 공간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분들에게 최소한의 돈을 투자하라고 말합니다. 승부는 ‘기본’과 ‘본질’로 하는 거지, 공간으로 하는 게 아니거든요. 모든 건축주가 최고를 만들고 싶어 하는데, 최대한 편하고 적합한 공간이 진짜 좋은 공간이에요.”

같은 맥락에서 김 대표는 건축이나 공간 디자인은 결코 작품이 돼서는 안 된다는 주의다. 김 대표가 작업한 공간들이 예술적, 디자인적 요소에서도 눈에 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배치되는 말 같기도 하지만, 미적 기준은 어디까지나 공간의 기본에 충실한 과정에서 얻어진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건축주 부부가 거주하는 4층의 침실. 내부 디자인뿐만 아니라 침대 조명, 패브릭까지 김종호 대표의 손을 거치면서 완전한 라이프스타일이 완성됐다.
건축주 부부가 거주하는 4층의 침실. 내부 디자인뿐만 아니라 침대 조명, 패브릭까지 김종호 대표의 손을 거치면서 완전한 라이프스타일이 완성됐다.
“저는 미국에서 교육받고 일도 했는데, 한국에 돌아와 가장 이상했던 게 ‘작가’니 ‘작품’이니 하는 것들이었어요. 나는 디자이너고 우리가 하는 건 프로젝트인데 말이죠. 건축과 디자인은 어디까지나 특정 상대가 있고 그 상대에 맞춰서 하는 현실적 작업이에요. 철저히 서비스 중심이죠. 젊은 친구들 중엔 마치 예술 작품 만드는 작가가 된 듯 들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존경을 받는 건 좋지만 늘 겸손한 자세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대표는 자신이 만드는 공간을 완성시키는 건 그곳에 머무는 혹은 거쳐 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가 늘 이야기하는 ‘생명력 있는 공간’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3층 현관 앞 유리 파티션이 있는 곳에 선큰 가든을 만들어 1~2층으로 빛을 끌어들였다.
3층 현관 앞 유리 파티션이 있는 곳에 선큰 가든을 만들어 1~2층으로 빛을 끌어들였다.
프라이빗하면서도 오픈된 이중적 라이프스타일
“주택은 침실, 거실, 주방, 욕실 등 다양한 기능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효율성을 갖고 만들어져야 해요. 거기다 세상에 딱 하나 있는, 자신만의 집을 요구하니 주택을 디자인할 때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할 때마다 새로운 도전이고 전쟁 같은 느낌이 들죠.”
[BEYOND ARCHITECTURE] 공간을 넘어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하다
온 가족이 모이는 공간인 3층은 아일랜드 식탁이 놓인 주방과 거실이 전부다.
온 가족이 모이는 공간인 3층은 아일랜드 식탁이 놓인 주방과 거실이 전부다.
모든 건축이 그렇지만 특히 주택을 지을 때 건축이 중요한가, 실내 디자인이 중요한가의 문제를 따지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주택만큼 내·외부가 밀접하게 연결된 건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삶이 이뤄지는 내면의 공간이 더 중요한 건 당연한 일.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건축주들은 일부러 김 대표를 찾아 실내 디자인을 맡긴다.

지난해 완공한 한남동 유엔빌리지 안에 위치한 4층짜리 단독주택도 그런 결과물 중 하나다. 고급주택이 많기로 유명한 유엔빌리지 안 2층짜리 주택에 살고 있던 건축주 부부는 3가구가 함께 살 수 있는 주택을 의뢰했다. 이미 결혼해서 분가한 두 딸과 모여 살되 서로 독립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때때로 한 공간에 모일 수도 있는 집을 원했던 것. 이 주택의 건축을 맡은 별도의 건축 팀이 있었지만, 건축주가 원하는 공간을 ‘까다로운’ 지형 조건에 맞춰 실현해 내야 하는 미션이 김 대표에게 주어졌다.
3층에 거주하는 딸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3층으로 가는 현관 동선을 아예 분리했다.
3층에 거주하는 딸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3층으로 가는 현관 동선을 아예 분리했다.
이 주택의 가장 큰 문제는 필지 자체의 경사였다. 길에서 보면 2층 주택으로 보이지만, 현관 출입구가 실제로는 3층일 정도로 심했다. 즉, 4층짜리 집의 1, 2층이 길가에서 보면 지하층이 되고, 그 반대편에서 보면 지상인 것. 상황이 이러하니 가장 먼저 신경 쓸 부분이 바로 3, 4층에 비해 빛의 유입량이 적을 수밖에 없는 1, 2층에 빛을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빛이 잘 드는 방향을 찾아 외부 창을 내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현관 앞쪽에 선큰 가든을 만드는 것으로 문제 해결. 또 하나의 중점 사항은 바람이었다. 사실 건축을 하면서 김 대표가 가장 신경 쓰는 요소가 바로 바람이다.
중정을 만들어 안으로 빛과 바람을 통하게 했다.
중정을 만들어 안으로 빛과 바람을 통하게 했다.
“빛은 창호 등이 좋아졌기 때문에 웬만하면 해결이 되는데 바람 즉 공기의 소통은 자연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주택에서 맞통풍은 정말 중요해요. 그게 안 되면 공기의 질이 안 좋아지니까요.”

1, 2층이 두 딸의 가족이 거주하는 프라이빗한 공간이라면 3층은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 개방적인 공간이다. 따라서 3층은 엘리베이터와 넓은 아일랜드 주방을 갖춘 거실이 공간의 전부. 건축주 부부가 거주하는 4층에는 작은 가족용 거실과 부부의 침실이 있는데, 거실에는 개방형으로 주방이 붙어 있는 구조다. 두 식구가 단출하게 사는 공간인 데다 번거로운 식사 준비가 이뤄지는 일이 많지 않다는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결과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 공간을 두었다. 높은 층고가 집을 더 넓어 보이게 한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 공간을 두었다. 높은 층고가 집을 더 넓어 보이게 한다.
건축주의 삶이 반영된 또 하나의 공간은 바로 4층 옥상. 사업상 알게 된 이들은 물론 지인들과 자주 파티를 여는 터라 옥상을 아예 파티 공간으로 만들었다. 남산과 한강 전망이 환상적인 옥상에는 파라솔과 테이블, 바비큐 그릴은 물론, 식자재를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와 싱크대 및 수도 시설을 별도로 두었고, 3층 현관에 게스트용 화장실과 4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두어 1~2층과 완벽히 분리했다. 각자의 사생활을 철저히 보호하면서도 외부인들이 드나드는 열린 공간의 기능까지 부족함 없이 갖춘 공간인 것이다.

“건축주 분들의 만족도가 높아요. 공간 설계도 설계지만 우리는 라이프스타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쓰고 맞춰 주는 편이라서 더 그렇죠. 이 주택의 건축주도 카메라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그 취미를 공간 디자인에 녹여 냈어요. 그렇다고 경제적 비용을 많이 들여서 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면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죠.”
건축주 가족이 거주하는 2층의 작은 거실. 소파 뒤 사진 작품은 등산을 좋아하는 건축주가 찍은 사진을 활용해 제작한 것이다.
건축주 가족이 거주하는 2층의 작은 거실. 소파 뒤 사진 작품은 등산을 좋아하는 건축주가 찍은 사진을 활용해 제작한 것이다.
트렌드가 없는 건축 트렌드, 건축주와의 스킨십이 중요
개방과 폐쇄를 동시에 작업해야 했던 또 하나의 공간은 이태원에 위치한 레이어드 가든이다. 말 그대로 여러 매스를 레이어드해서 만든 3층짜리 주택으로, 결혼한 딸 가족과 함께 두 가구가 거주하는 형태였다. 즉 1, 2층은 건축주 부부가 미혼의 자녀와 함께 거주하고 3층은 분가한 딸 가족이 사는 구조였던 것.

이 주택 또한 각 층의 공간 기능을 철저히 분리했다. 1층은 주차장에 리빙을 더한 존으로 주방과 거실을 두었고, 2층에는 침실과 또 하나의 거실을, 그리고 3층은 완벽히 분리된 별도의 집처럼 프라이버시에 방점을 두고 설계했다. 3층으로 가는 현관 동선을 아예 달리한 것. 각자 독립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지만 필요에 따라 공동의 공간에 모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주택은 한남동 주택과 묘하게 닮아 있다.

“큰 공간이라고 해도 이것저것 많이 넣지 않는 편이에요. 다만 개방 공간과 폐쇄 공간을 확실히 구분하고 필요할 땐 개방 공간을 공유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죠. 요즘 시대의 건축은 따로 트렌드가 없어요. 3~4년 전까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트렌드가 없는 게 트렌드죠. 다만 디자이너의 독창성과 프로젝트의 성향에 맞추는 게 더 중요한 시댑니다. 그러니 건축주와 최대한 스킨십을 하는 게 중요한 일이죠. 스킨십을 통해 그들의 삶을 파악하고 있어야 진짜 라이프스타일을 녹여 낸 공간이 나오는 법이니까요.”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인물) 기자, 디자인스튜디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