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력의 공간 3, 게스트하우스 ‘모티프 원’ in 파주

근사한 풍경, 화려한 건축과 럭셔리한 인테리어를 찾는다면 이곳은 답이 아니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안에 자리 잡은 모티프 원은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지만, 그 안에 쉼과 치유, 그리고 배움과 성장이 공존하고 있다. 가장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만난 뒤 인생의 모티프를 얻어 가는 곳, 이 공간의 능력은 머물면서 비로소 그 진가가 발현된다.
[SPECIAL REPORT] ‘진짜 나’를 마주한 뒤의 배움과 성장
[SPECIAL REPORT] ‘진짜 나’를 마주한 뒤의 배움과 성장
특별한 릴레이션십이 이뤄지는 글로벌 인생학교
넓은 마당을 가진 평범한 집. 건물 외벽을 둘러싼 담쟁이넝쿨이 물리적 시간을 말해주는 집. 안으로 통하는 세 개의 문이 이곳의 ‘오픈 마인드’를 대변하고 있긴 했지만, 건축미로만 따지면 멋진 집들이 널리고 널린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발견한 게스트하우스 ‘모티프 원’의 첫인상은 그리 특별할 것 없었다. 그러나 국적을 불문하고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언급했던 ‘생명력 넘치는 에너지’의 비밀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인도 없는 집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낡아 보이기까지 하는 거실이 먼저 객을 맞았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잡지들, 낡은 피아노 한 대, 그리고 주인장의 타이틀을 말해 주는 솟대와 사진 작품들이 잔잔히 흐르는 클래식 선율과 어우러져 다소 이국적인 느낌마저 자아냈다. 거실에서 두세 계단 오르니 ‘비우고 왔다가 채워서 가는 곳’이라는 뜻이 담긴 ‘라이브러리 제로’와 만났다.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1만2000여 권의 장서가 두서없이 마구 꽂혀 있는 ‘현실적인’ 모습은 규모를 제외하고 흔히 볼 수 있는 누군가의 집 서재 같았다. 처음에는 종류별로 정리돼 있었던 책들이 사람 손을 타면서 흐트러진 모습은 그 자체로 이 집의 역사고 스토리다.
‘모티프 원’의 이용자들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 제로. 차를 마시며 책장에 꽂힌 책을 마음껏 빌려 읽을 수 있으며, 세미나나 워크숍, 스터디 등 다양한 성격의 문화공간으로도 활용 가능하다.
‘모티프 원’의 이용자들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 제로. 차를 마시며 책장에 꽂힌 책을 마음껏 빌려 읽을 수 있으며, 세미나나 워크숍, 스터디 등 다양한 성격의 문화공간으로도 활용 가능하다.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는 사람들 혹은 헤이리 동네 사람들이 모여 일명 ‘하우스 렉처(lecture)’를 여는 1층 리빙룸과 서재가 공유의 공간이라면, 1층과 1.5층에 각각 두 개씩 위치한 룸과 2층의 스위트 룸 등 5개의 룸은 프라이빗한 공간이다. 필요 이상으로 넓지 않은 ‘합리적인’ 공간으로 설계됐다는 주인장의 말처럼 콤팩트하지만 일상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있는 그곳은 머무는 사람이 늘 바뀌는 여행자의 공간답지 않게 온기가 흘렀다. 물론 현재 가장 핫한 건축가로 최근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석 씨가 설계를 맡은 공간은 그 자체로도 개성이 있었지만, 공간을 완성하는 건 그렇듯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흔적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인생의 경험들. ‘모티프 원’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깨달음이 되는 ‘글로벌 인생학교’인 셈이었다.
라이브러리 제로의 발코니. 위로는 스틸 그레이팅으로 된 슈페리어 우드 룸의 발코니와 연결된다.
라이브러리 제로의 발코니. 위로는 스틸 그레이팅으로 된 슈페리어 우드 룸의 발코니와 연결된다.
공간 리뉴얼 대신 ‘주인장을 리뉴얼’하는 이상한 곳
‘모티프 원’의 이 특별한 공간 능력은 8할이 주인장 덕분이다. 솟대 작품을 만들고 사진 작업을 하기도 하는 이안수 작가는 단순한 게스트하우스 운영자가 아니다. 여행자들이 문의 전화를 걸어와 “몇 월 몇 일에 방이 있느냐”고 묻는 대신 “그날 작가님이 계시느냐”고 묻는 것만 봐도 이 작가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세련되고 편안한 공간을 콘셉트로 한 스튜디오 미러 룸. 침대 쪽은 2m, 나머지 부분은 4m로 층고가 다른 게 특징이며, 옷장 전면이 거울로 돼 있어 마치 발레 스튜디오를 연상케 한다. 코너 창 쪽으로 배치된 긴 원목 책상에 앉으면 자연을 눈앞에 두고 독서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세련되고 편안한 공간을 콘셉트로 한 스튜디오 미러 룸. 침대 쪽은 2m, 나머지 부분은 4m로 층고가 다른 게 특징이며, 옷장 전면이 거울로 돼 있어 마치 발레 스튜디오를 연상케 한다. 코너 창 쪽으로 배치된 긴 원목 책상에 앉으면 자연을 눈앞에 두고 독서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사실 ‘모티프 원’의 공간 능력은 철저히 이 작가의 기획에 의해 탄생했다. 30여 년간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여행지에서의 밤을 누구와 보내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은 그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화두’를 던지기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저녁 시간, 여행자와 마주앉은 이 작가의 역할은 하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스스로 삶의 ‘모티프’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곳을 다녀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책에선 볼 수 없는 생생한 인생 교과서가 된다.
모던과 건강을 추구하는 슈페리어 우드 룸. 통유리로 된 정원 쪽은 버드나무와 자작나무를 마주하고 있으며, 침대 헤드 쪽에도 잣나무 판재로 마무리해 자연이 주는 건강함을 극대화했다.
모던과 건강을 추구하는 슈페리어 우드 룸. 통유리로 된 정원 쪽은 버드나무와 자작나무를 마주하고 있으며, 침대 헤드 쪽에도 잣나무 판재로 마무리해 자연이 주는 건강함을 극대화했다.
이처럼 ‘이곳을 다녀가기 전과 후의 인생은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 작가는 보이는 공간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의미를 부여했고, 실제로 ‘모티프 원’을 찾는 이들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자신의 가장 솔직한 내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식기세척기까지 빌트인 된 독립된 키친과 천창이 있는 거실이 딸린 스위트 블랙 룸. 바닥재를 검은색으로 마감해 미니멀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식기세척기까지 빌트인 된 독립된 키친과 천창이 있는 거실이 딸린 스위트 블랙 룸. 바닥재를 검은색으로 마감해 미니멀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공간의 성격이 이러하니 인테리어가 훌륭하다거나 호텔식 서비스를 하는 등 일반적인 여행지 숙소에서 내세우는 장점들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여행자들이 먹을 것을 비롯해 필요한 것들을 챙겨 와야 하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몇 년 터울로 하는 공간 리뉴얼 개념도 없다. 다만 주인장을 리뉴얼한다. 끊임없이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모티프 원’을 찾는 여행자들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 지난 7년간 1만8000여 명이 다녀가고, 그중에서도 수십 번씩 재방문할 정도로 충성 고객이 많은 데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더불어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들이 축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위트 블랙 이용자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갤러리K’. 작업과 독서, 명상 등이 가능한 백색의 공간은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국내외 수많은 예술가들의 추억이 어린 곳이기도 하다.
스위트 블랙 이용자가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갤러리K’. 작업과 독서, 명상 등이 가능한 백색의 공간은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국내외 수많은 예술가들의 추억이 어린 곳이기도 하다.
뭔가 부족하지만 완벽하고, 일상적이지만 일상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곳, ‘모티프 원’의 객관적 능력은 바로 거기 있었다.



공간 메이커, 이안수 작가 미니 인터뷰
[SPECIAL REPORT] ‘진짜 나’를 마주한 뒤의 배움과 성장
“공유와 공감 통해 삶의 지향점을 바꾸는 휴식”

‘모티프 원’의 출발은 어디였나요.
“30여 년간 꾸준히 외국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게 ‘밤 시간’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밤에 누구와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느냐는 그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현장을 가느냐 못 가느냐의 중대한 차이로 이어지죠. 같은 이유로, 이곳 헤이리에 작업실을 겸한 게스트하우스를 짓기로 결심하면서 제가 ‘그 밤’을 함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예술이란 삶을 위안하거나 지지하거나 개선하는 역할을 하는 건데, 그런 면에서 담 쌓고 하는 예술 작업보다 상호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예술 활동을 하면 더 많은 화두가 던져지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동안 많은 분들이 다녀갔다죠.
“7년 전 오픈한 후 1만8000명 정도가 왔다갔는데, 일반 여행자들을 비롯해 국내외 많은 예술가들이 머물다 갔어요. 그분들은 ‘지구의 풍경을 보는 또 다른 시선’을 갖게 됐다고들 이야기해요. 그만큼 자기 삶이 새로워진 거죠. 그 자체로도 보람이지만, 반대로 그분들이 제게 가르침을 주기도 해요. 이곳으로 많은 분들이 찾아와 진솔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니 그야말로 축복이죠. 물론 그 안엔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지만, 그로 인해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하며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이 된답니다.”


건축가 조민석 씨가 설계한 공간으로도 유명합니다.
“헤이리 예술마을 건축은 모던 건축만 허용돼 있고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건축가도 제한된 풀(pool)이 있었어요. 경제적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가 원하는 스타일과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기 위해서라도 소통이 잘 될 젊은 건축가를 원했고, 당시 막 해외에서 돌아온 조민석 씨에게 30여 장 분량의 리포트를 보냈죠. 공간의 목적이며 머무를 사람이며 또 어떤 게 좋고 싫은지를 아주 자세하게 적은 리포트였어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죠. ‘나는 모든 걸 가졌지만 없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돈’이다’라고요.(웃음) 조민석 씨는 자기 가치의 실현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해서 제 까다로운 요구 조건을 발전적으로 수용하면서 그야말로 불가능한 건축을 완성시켰죠.”


건축적으로 요구한 것들은 무엇이었나요.
“콘셉트는 명확했어요. ‘럭셔리’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이었죠. 한 명 이상이 합리적으로 머물 수 있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면서, 기능은 다양하게 전환할 수 있는 공간 말입니다. 실제로 폴딩 도어 등을 통해 공간을 열고 닫으면 새로운 공간이 되기도 해요. 1층과 2층의 양쪽 창을 통으로 낸 것도 자연과의 친교에 있어 머무는 이들이 결정권을 갖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사실 가장 큰 요구 사항은 ‘비용’이었어요.(웃음) 베란다를 지하철 환풍기에 쓰이는 스틸 그레이팅으로 한 것도 그 때문인데, 결과적으론 바람을 상하로 통하게 하면서 마치 공중 부양한 것 같은 아주 특별한 느낌을 주죠.”


‘모티프 원’의 가장 큰 능력을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진솔함이죠. 자신을 포장한 채 살면서 힘들었던 것을 내려놓게 하는 강한 힘이 있어요. 그러고 나면 행복의 비밀에 한층 가까워지죠.”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