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나는 실질 은퇴 연령이 53세 정도에 불과한 실정을 감안하면 정년 연장은 실로 가뭄에 단비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실질 은퇴 연령을 넘었거나 거기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던 베이비붐 세대들에겐 더욱 그러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이제 2년 반만 버티면 안정적으로 60세까지 일할 수 있다는 현실을 생각하며 손을 불끈 쥐기도 했다. 이미 은퇴한 선배들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행운아라며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인생 100세 시대에 정년 연장은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기간을 늘려 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 기간을 연장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정년 연장과 관련해서는 이런 희망의 무지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려의 목소리 역시 만만찮았다. 하나는 가뜩이나 어려운 청년 취업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청년 일자리와 고령자 일자리는 기본적으로 그 속성이 다르다는 논리에 묻혀 법안 통과를 저지하는 힘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다른 하나의 목소리는 정년 연장이 오히려 베이비붐 세대에겐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법안이 시행되기 전에 고임금의 고령 노동력을 정리하는 방향으로 정년 연장의 칼날이 잘못 겨누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입직원 채용을 최소화해 온 기업의 인력 구조는 역피라드미형을 띠게 됐다. 차·부장급은 늘었는데, 이들을 뒷받침해야 할 과장 이하의 직원은 사내에서 희소자원으로 여겨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년 연장은 비정상적인 인력 구조의 해소를 더욱 어렵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정년 연장이 구조적으로 양날의 칼일 수밖에 없는 신뢰할 만한 근거다.
정년 연장이 희망과 우려의 교차로에서 어느 곳으로 방향을 틀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기업의 구조조정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업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경영 환경의 악화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일까, 아니면 정년 연장에 대한 기업의 선제대응 측면일까. 선뜻 한쪽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은 문제다. 이는 두 측면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올해 들어 기업 구조조정의 핵으로 등장한 KT와 주요 금융회사의 사례는 두 측면이 혼재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정년 60세의 역설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년 60세의 역설…기업 구조조정 여파로 퇴직연금 유출 자금 규모 커
정년 60세의 역설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반영되고 있는 분야는 퇴직연금 시장이다. 퇴직연금은 2005년 12월에 도입된 이후 매년 급속한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다 최근 들어 다소 주춤하는 모습이다. 가파른 고갯길을 숨 가쁘게 오르던 사람이 한숨을 고르며 쉬고 있는 형국이다. 분기별 퇴직연금 적립금 순증 규모를 보면 매 분기마다 1조 원 이상씩 기록하다 2014년 1분기에는 9841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9.2% 하락한 수치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퇴직연금으로 유입되는 금액보다 밖으로 유출되는 자금의 규모가 더 크기 때문이다. 2014년 1분기에 퇴직연금 시장으로 유입된 금액(정기납입액·제도전환분·운용수익금 등)은 8조5861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0.2% 늘었다. 하지만 유출액(퇴직급여 지급액)은 7조6020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2.1%나 증가했다. 2013년 말 대비로는 유입액은 크게 줄어든 반면에 유출액은 아주 조금(?) 줄어들었다. 강한 계절성을 띠고 있는 퇴직연금 시장의 특성상 유입액이 전기 대비 줄어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유출액을 보면 계절성을 느끼기 힘들다. 기업 구조조정의 여파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문제는 2분기와 3분기다. 최근 한 경제신문에 따르면 구조조정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된 KT와 7개 금융회사의 퇴직 자금(퇴직금+위로금)은 2조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되며, 대상자는 1만 명을 넘는다. KT의 경우 총 1조6000억 원의 퇴직 자금 중 퇴직금은 4000억 원 정도라 한다. 그만큼 퇴직연금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금융회사의 경우 상대적으로 임금 수준이 높고, 구조조정의 주 대상이 고임금의 고직급자임을 감안하면 금융권에서만 유출되는 퇴직연금액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퇴직연금의 성장가도에 급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2분기에 퇴직연금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일부 사업자들의 월간 단위 적립금 추이가 감소세로 전환했다는 소리도 들려온다. 2분기와 3분기를 안심할 수 없는 이유다. 더욱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낮은 금리를 감안하면 운용 수익의 확대를 통한 성장의 추구도 쉽지 않다. 연말에 달성할 것으로 예상했던 퇴직연금 100조 시대의 기대는 염원에 그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정년 60세의 역설이 작용할 가능성이 큰 또 다른 분야는 화이트칼라 베이비부머다. 통계청에 따르면 경제활동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나라 베이비부머 중 약 54%는 화이트칼라(관리자, 전문가 및 관련 종사자, 사무직·서비스직·판매직 종사자 등) 계층이다.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 경우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이들이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 쉽게 대체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베이비부머는 개인적으로는 라이프사이클상 인생의 정점에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가족과 사회를 부양하는 버팀목이다. 이들의 반 이상이 구조조정 소문에 떨고 있다. 화이트칼라는 눈에 보이는 특별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 은퇴 후에 자신의 강점을 살린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들은 자영업에 뛰어든다. 우리나라에 자영업자가 많은 이유 중 하나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간혹 성공 신화를 쓰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긴 노후가 실로 암담해진다.
정년 60세 시행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간이 베이비붐 세대에겐 너무나 힘든 시기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후도 장담하기는 힘들다. 온갖 수법이 동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회적 지혜가 필요하다. “한 인간의 운명에 있어 창조적인 나이인 인생의 중반에 자기 필생의 과제를 찾아낸다는 것보다 더 큰 행운은 없다”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처럼 우리 베이비붐 세대들도 이 행운을 보듬을 수 있도록 개인과 사회 모두 심혈을 기울여야 할 때다.
손성동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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