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존재감, 피아니스트 김정원

‘음악과 사람은 같이 간다.’ 그를 만난 후 든 생각은 단적으로 그랬다. ‘최연소’,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았던 천재 피아니스트는 겸손으로 무장해 있었고, 피아노를 대하는 마음은 훨씬 더 뜨거워져 있었다. 사람이 감동이니 어찌 음악이 감동이 아닐 수 있으랴.
[BREAK FOR MUSIC] ‘젊은 거장’의 소박한 고백 “피아노는 선물이자 축복”
피아니스트 김정원에 대한 ‘일방적인’ 기억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던 2001년, 그는 이미 전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으며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지만, 당시 클래식에 별반 관심 없던 기자에게 각인된 건 한 매체에 소개된, 유명 TV 드라마 작가인 어머니 이금림 씨와 주고받은 편지의 한 구절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느냐보다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는 청년의 고백이 피아니스트 이전에 인간 김정원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고나 할까.

이후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젊은 거장’이 됐고, 그만큼 이름값에 뒤따르는 것들도 많아졌을 터. 그래서 더 궁금했다. 지금 이 지점에서도 그 생각은 변함없는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그 발언에는 약간 ‘포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확실히 그렇다고. 아닌 게 아니라 인터뷰의 처음과 끝은 피아노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과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열정, 피아니스트로서의 행복감을 대변하는 것들이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음악 전문가들이 피아니스트 김정원을 평가할 때 ‘깊이 있는 해석’, ‘섬세하고 다채로운 음색’,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빠뜨리지 않는데, 그를 만나본 기자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어졌다. 피아노 선율처럼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피아노 때문에 외로웠지만 피아노가 있어 외롭지 않다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라도 김정원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는 최초, 최연소라는 타이틀이 일상이었던 피아노 천재였다. 남들 유치원 갈 나이에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그는 예원학교에 진학, 국내 음악 콩쿠르를 휩쓸며 재능을 인정받았고, 15세 때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 최연소 수석 합격자로 입학한 지 2년 만에 빈에서 열린 ‘엘레나 롬브로 슈테파노프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빈 국립음대 최우수 졸업과 함께 프랑스 파리 고등국립음악원 최고 연주자 과정에 한국인 최초로 피아노과에 입학, 거장 자크 루비에에게 발탁되는 행운을 얻었고, 1997년에는 뵈젠도르퍼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해 입지를 다져 나갔다.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 경험을 쌓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건 한국인 최초로 2차 예선까지 올랐다가 3차에서 고배를 마신 2000년 폴란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였다. 콩쿠르 후 폴란드 음악협회가 주최하는 쇼팽 콩쿠르 우승자 초청연주에 이례적으로 수상자 대신 김정원이 초대된 것.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유럽 무대에 본격 진출했고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주자로 자리매김해 왔다.

국내와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그는 2009년부터 경희대 음대 피아노과 교수직을 맡아 5년째 후학 양성에도 매진하고 있다. 그를 만난 곳도 다름 아닌 교수 연구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공교롭게도 대학원 면접이 있었는데, 연구실 문을 열고 서너 명의 학생들이 빠져나온 뒤 비로소 보인 그의 모습은 학생인지 교수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국내 클래식 음악계에서 ‘오빠 부대의 원조’라 불리는 한 가지 이유가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얼마 전에 ‘김정원과 친구들 2014’ 공연을 했죠. 어땠나요.
“‘김정원과 친구들’은 매번 다른 클래식 연주자들과 함께해 온 공연인데 벌써 9년째로 자리를 잘 잡은 것 같아요. 사실 공연이란 게 매번 힘들긴 하지만 특히 이번은 암울했던 봄을 보내며 공연계 역시 큰 타격을 받다 보니 티켓 판매가 어려웠던 점도 있어요. 하지만 음악의 기본 역할이 ‘위로’라는 생각을 가진 제게는 어떤 면에서 가장 필요한 시기에 공연을 했다는 성취감이 있었어요. 이번 공연에선 모차르트의 곡들을 선곡했는데 공교롭게도 전반엔 밝은 곡을, 후반엔 장송곡 분위기가 느껴지는 어두운 곡들로 배치가 됐어요.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지기 전에 정해진 것이었는데, 아픔을 치유하는 곡들로 꾸며져 보신 분들이 많은 힘을 얻었다고 평을 해 줬죠.”


바이올리니스트 김수빈, 비올리스트 김상진, 첼리스트 송영훈 씨와 함께 앙상블 ‘MIK(Made In Korea)’로도 활동하는 등 프로젝트성 기획을 많이 하는데, 의도가 있나요.
“음악 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피아니스트는 외로워요. 연습도 혼자, 무대도 혼자죠. 그러니 저처럼 사람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에겐 힘든 직업이에요. 어떨 땐 차라리 현악기를 해서 오케스트라를 했더라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하죠. 그래서 뭔가 같이 할 수 있는 걸 찾다 보니 앙상블에 관심을 갖게 된 거였어요. 처음엔 함께 하는 즐거움이 컸다면, 하다 보니 클래식이 가진 어쩔 수 없는 벽을 낮춰 일반인들이 더 찾아오기 쉽게 하기 위한 의미로 확장됐죠. 개인적으로도 독주회는 초긴장 상태에서 하는데 앙상블은 좀 더 편한 자세와 마음으로 할 수 있으니 좋아요.”
[BREAK FOR MUSIC] ‘젊은 거장’의 소박한 고백 “피아노는 선물이자 축복”
공연을 많이 하는 편이죠. 공연장을 가리지 않는다는 인상도 받았어요.
“화가 에곤 실레가 그런 말을 했어요. ‘그림 그리는 걸 멈출 수가 없다’고. 그 말이 참 와 닿아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도 그랬어요. 리히터는 어릴 때 제 마음 속 신과 같은 연주자로 음반으로만 접하다가 빈 유학 중 그분의 공연을 봤어요. 당시 80세가 넘어 거의 마지막 리사이틀이나 다름없었는데, 젊은 시절 라흐마니노프 연주를 막힘없이 했던 분이 하이든의 간단한 연주도 제대로 못하더군요. 열일곱 살이던 저는 충격을 넘어 인생의 방향이 흔들릴 정도였어요. 그런데 다음 날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리히터는 이렇게 말했죠. ‘자신이 이렇게 늙은 몸으로 연주를 하고 다니면 쌓아놓은 명성을 떨어뜨린다는 걸 잘 안다’며 ‘하지만 설사 평생의 명성을 갉아먹더라도 연주를 멈출 수가 없다’고. 그 말을 듣고 비로소 혼란이 풀렸죠. 같은 맥락에서 제가 연주를 많이 하는 건 어떤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무대에 중독돼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제안이 오는 공연은 다 하고 싶어요. 사실 공연 가기 전엔 저렇게 조그만 홀에서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때도 있는데 막상 가서 관객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 잘했구나 싶죠.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어요.”
[BREAK FOR MUSIC] ‘젊은 거장’의 소박한 고백 “피아노는 선물이자 축복”
피아노 자체에 대한 후회도 한 적이 없나요. 외롭다면서요.
“다른 인생을 살아 봤더라면 명확한 답을 했겠지만 간접 경험을 해 보니 나이 들면 다 외롭더라고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외로움은 있었지만, 지금은 피아노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음악을 하다 보니 외로움을 그냥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음악이 제 성격을 많이 바꿔놓았어요. 타고난 DNA는 친화적이고 사람을 좋아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한데 음악을 하는 과정에서 완벽주의나 편집증, 정리벽이 자꾸 생겨요. 그러다 보니 점점 보통의 아내들이 싫어하는 성격으로 바뀌죠.(웃음) 뭔가 막히면 옷장을 뒤집어엎는다든가, 냉장고 청소를 한다든가 하는. 그러면서 처음엔 외로움으로 고통스럽더니 그 외로움에 익숙해지니 사회성이 없어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 가면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BREAK FOR MUSIC] ‘젊은 거장’의 소박한 고백 “피아노는 선물이자 축복”
지금쯤이면 여유가 생길 만도 한데, 알아갈수록 피아노가 어려운, 뭐 그런 건가요.
“정말 그래요.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연습을 많이 하는 시긴데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는 것 같아요. 연습을 안 하고는 무대에 설 수가 없는 거예요. 물리적으로도 몸은 점점 노화돼 가니 40대에 30대처럼 연습하면 손이 느려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나이 들수록 점점 더 많이 연습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죠. 그런데도 예전엔 무대에 자신 있게 올라갔는데 지금은 자신감이 20대 때보다 더 줄었어요. 예전의 긴장감이 ‘틀리면 어떡하지’였다면, 지금은 ‘내 이야기를 다하고 내려올 수 있을까’ 하는 나와의 싸움이죠. 그래서 학생들이 떨린다고 말할 때마다 제가 그래요. 네가 못 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냐고 말이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감성 DNA, 꾸준한 연주자가 되고 싶은 바람
완벽주의 성향은 가르치는 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연주자와 교육자 두 가지의 삶을 병행하려면 그만큼 물리적인 시간과 열성을 ‘합리적으로’ 분할해서 살아야 하는데, 성격적으로 불가능하니 개인의 삶이 고달플 수밖에. 다행인 건 가르치는 일의 보람과 성취감이 크다는 사실이다. 5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별다른 취미 없이 살아도 지금은 그 두 가지에서 얻는 행복감이 너무도 크다고 했다.


연주자와 교육자로서 균형감을 어떻게 유지하나요.
“친구 중에 치과의사가 있는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살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죠. 의사여서 좋은 건지, 환자를 보는 시간 자체가 행복한 건지. 친구가 그러더군요. ‘다른 사람 입 속을 들여다보는 게 뭐가 행복하겠냐’고. 그 친구가 말한 행복은 ‘대가’에서 오는 것이었죠.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무대에서 박수를 받는 것도 좋았지만, 혼자 연습을 해 가는 과정, 음악과 뒤범벅이 된 과정 자체가 행복했기 때문에 내 인생이 그 친구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죠. 그래서 생각했어요. ‘일 자체가 선물이고, 축복이니 돈을 못 벌어도 억울해하지 말아야겠구나’라고. 30대 중반까지 연주자로서만 살던 그때는 그랬는데 가르치는 일을 해 보니 이건 또 이것대로 좋은 겁니다. 음악은 과정이 주는 행복이라면, 후학 양성은 과정은 힘들지만 결과물이 주는 성취감이 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해요. 그러니 지금은 연주도 가르치는 일도 포기할 수 없어서 그 대신 저 개인을 혹사하죠.(웃음)”


‘돈을 못 벌어도’라고 했는데, 김정원 씨만 한 티켓 파워도 없지 않나요.(웃음)
“아, 감사할 만큼 충분한 것 같아요.(웃음) 더불어서 국내 음악계에 설 무대가 많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죠.”


국내 음악계 수준이 진짜 높아졌어요.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훌륭한 아티스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대해 유럽 사람들이 정말 의아해할 정도예요. 심지어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참가자들을 금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말까지 나와요. 성악은 이미 금지된 대회도 있고요. 이제 곧 있으면 외국 아이들이 우리나라에 유학을 올지도 모르는 일이죠. 어머니들의 교육열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그 교육으로 인해 좋은 선생이 배출됐을 테고요. 한국인의 정서나 감성 자체도 예술적 감성에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김정원 씨도 부모님으로부터 감성적 혜택을 물려받았죠.
“그 부분은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예술의 시작이 문학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국문과 교수인 아버지와 드라마 작가인 어머니 모두 문학을 하셨으니, 환경 자체가 좀 달랐겠죠. 게다가 아버지는 책 읽기를 거의 강제화하셨어요. 다행히 형도 저도 책을 좋아했는데, 특히 저는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을 좋아했어요.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칠 때 물리적인 레슨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부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편이죠.”


아내 김지애 씨도 피아니스트인데, 함께 공연하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이 나이 들수록 좋은 친구이자 동료라고 한다면 같은 일을 하는 게 축복인 것 같아요.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어쩌다 약해질 때 옆에서 용기를 주고 격려해 주니 엄청난 힘이 되기도 하고요. 근데 공연을 함께 하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 부부도 정식 공연을 딱 한 번 했는데 완성도가 높아지는 반면, 사이가 나빠지더라고요.(웃음).”


올해로 마흔이 됐죠. 인생에서 지금은 어떤 지점인가요.
“음악도, 사람과의 관계도 처음부터 어디를 향해 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더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겠다라든가 하는 욕심이 부질없게 느껴져요. 제일 어려운 건 꾸준한 거죠. ‘나이가 들어서도 지금 같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긴장돼요. ‘음악에 대한 애정도 똑같아야 할 텐데’, ‘그러려면 건강 유지도 잘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들을 하죠. 리히터처럼 마지막까지 무대 위에서 멈출 수 없어 연주하는 것도 좋겠지만, 저는 마지막까지 감동을 주는 연주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 성격상 아마 리히터처럼은 못할 것 같아요.”


그럼 지금 욕심내는 건 뭔가요.
“레퍼토리 욕심이 제일 많아요. 피아노를 해서 가장 좋은 게 바로 무궁무진한 레퍼토리거든요. 피아노를 하겠다고 인생에서 많은 걸 포기했는데 그렇다면 레퍼토리는 다 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실천의 일환으로 그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및 레코딩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이가 손꼽힐 정도라니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짐작되고도 남는 부분. 최소 3년 이상은 걸린다는데 그래도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행복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곡이라니, 그의 음악이 왜 위로이고 기쁨인지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어 보인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