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 사장의 인생이모작 성공 노하우

회생활을 하다보면 ‘밥상 차리는 사람 따로, 맛있게 먹는 사람 따로’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된다.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데…” 라는 영화배우 황정민의 모 영화제 수상 소감이 대중들의 정서를 울린 것도 그래서일 게다. 빛도 나지 않는 궂은일은 늘 저평가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은 결국 빛나게 돼 있다.박상우 씨에이피사이언스 사장(45)은 자신의 대기업 샐러리맨 생활을 ‘밥상론’에 빗대어 “밥상을 직접 차려야 끼니를 먹는 팔자”였다고 말한다. 시스템에 올라타 내 역할만 열심히 하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게 최대 장점인 대기업(LG그룹) 시절에도 그는 밥 짓고 반찬 만들고 밥상 차려 자신과 동료들의 끼니를 해결했다. 어찌 보면 대기업 사원답지 않은 10년이었다.박 사장이 LG그룹에 입사한 것은 1985년. 배치받은 곳은 그룹의 유통부문 계열사인 희성산업이었다. 당시 LG유통부문이라고 해 봐야 ‘럭키슈퍼’가 전부였다. ‘유통=시장’일 정도로 유통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때론 생선도 팔고, 야채도 팔면서 판매영업 지원에 나서야 하는 허드렛일은 대기업 엘리트 사원들의 기피 대상 1호였다. 4년제 대졸 공채 직원이 유통부문에 배치되는 일 자체가 드물 정도였다. 카투사(KATUSA·주한미군지원병)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박 사장은 좀 달랐다. 군 시절 병참 업무를 맡으면서 미국의 선진화한 유통 시스템을 맛 본 터였다. 더욱이 매년 5명씩 선발하는 ‘모범 사병’으로 뽑혀 1개월 간 미국 연수를 한 덕에 월마트 등의 유통 혁명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미래 산업의 꽃은 유통업’이라는 이미지가 심어진 상태였다. 박 사장은 LG유통부문에 배치받은 지 얼마 안 돼 ‘블루오션’을 발견했다. 바로 ‘판촉물’ 기획 사업. LG그룹 각 계열사에서는 각양각색의 신상품이 쏟아져 나온다. 그때마다 제품의 초기 인지도를 높이고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판촉물이 기획된다. LG는 당시까지 그 모든 판촉물 기획 및 유통을 외주에 맡겨온 것. 그것을 통합해 효율적으로 관리하면 판촉물의 품질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데다 그로 인한 판촉효과 극대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박 사장의 제안으로 회사에 그룹사 판촉물 특판기념품 담당 파트가 생겼다. 직원은 총 3명. 주임급 파트장과 사원 박상우, 그리고 동료 1명이 전부였다. 속칭 ‘맨땅의 헤딩’ 여정의 출발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판촉 파트는 박 사장이 퇴직하던 1996년 매출 700억~800억원에 순익 60억원 이상 올리는 직원 25명의 팀으로 커졌다. LG그룹 계열사뿐 아니라 BC카드 등 다른 기업들까지 고객으로 끌어들여 명실상부한 하나의 사업으로 틀을 잡은 것이다. 덕분에 박 사장은 초고속 승진 가도를 달렸다. 동기들이 8~10년은 돼야 달 수 있는 과장을 5년 만에 달았다. 그로부터 5년 후에는 부장 명함도 찍었다. 박 사장은 책상머리에서 판촉물 기획만 한 것이 아니다. 판촉물을 만들어 납품하는 영세업체들 중 실력 있고 성실한 업체를 발굴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기획력, 품질, 가격 경쟁력, 납기 준수 등 다양한 항목별로 업체들의 성적을 매겨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우수 납품업체들 중 일시적인 자금난에 몰린 경우에는 평가 기록을 총동원해 본사를 설득, 선지급금을 지원해 준 사례도 적지 않았다. 판촉물 제조업체들과의 신뢰는 돈독했고, 그 인맥은 창업 후 그의 최대 자산이 됐다. 하지만 초고속 승진의 박 사장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견제는 그를 지치게 했다. 사내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는 한번쯤 내 사업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사직서로 분출됐다. 서른다섯, 아직은 ‘청년’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나이였다. 사무실은 서울 여의도 라이프콤비 빌딩 4층에 차렸다. 30평짜리에 직원은 달랑 3명. 박 사장과 잡일을 맡을 직원, 그리고 둘째 누나 박영옥 씨에이피니트니스 사장(47)이었다. 당시 박 사장이 누나에게 한 말은 “와서 전화를 받아 달라”는 게 전부였다. 두 자녀를 둔 주부 박영옥 사장은 그렇게 합류해 10년 넘게 최고의 사업 파트너로 회사를 함께 키우고 있다. “당시 누나와 합쳐서 1억원을 들고 시작했어요. 임대보증금이 7000만원이었으니 필요한 사무용 집기 사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었어요.” 1996년 6월말 회사를 차린 직후부터 박 사장이 대기업 시절 쌓은 ‘신뢰의 잔고’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제조업체들과 거래하면서 어음의 문제점을 많이 느꼈어요. 어음 가계수표 당좌수표 등을 돌리다가 자금이 꼬이면 장사를 아무리 잘 해도 작은 기업은 끝장나죠. 그걸 알았기 때문에 절대 어음이나 수표는 안 쓴다는 원칙을 처음부터 세웠습니다. 하지만 선급금을 줄만한 자본은 없고….”그가 샐러리맨 시절 친분을 쌓고 거래를 지속하던 업체가 50여 곳을 넘었다. 박 사장이 독립했다는 말에 “2억~3억원어치씩 물건을 미리 갖다 쓰라”고 나서는 업체들만 20여 곳에 이르렀다. 그는 이런 납품업체들의 믿음 덕에 10년 노하우를 바탕으로 고객사 개척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회사 차리고 석 달 만에 맞은 추석 대목. 박 사장은 전력투구했다. 그 결과 추석이 낀 9월 한 달에만 5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창업 후 연말까지 6개월 간 총 매출은 70억원에 달했다. 제조업체에서 물건을 받아 주문 업체에 넘겨주는 중간 유통업이라는 점에서 이 액수를 제조업의 매출과 같은 기준으로 볼 수는 없다. 그래도 창업 첫해 반년 만에 70억원어치의 판촉물을 기획해 공급했다는 것은 대단한 실적이었다. 창업 이듬해 IMF외환위기를 맞았으나 ‘판촉물 끼워주기’처럼 알뜰 심리를 겨냥한 소규모 마케팅 이벤트는 오히려 활발해진 덕분이다. 게다가 ‘어음사절’ 원칙은 연쇄부도의 방탄조끼가 돼 줬다. 창업 초기 2~3년 간은 아무래도 LG그룹이 전체 매출의 50%를 넘게 차지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친정에만 기댈 순 없었다. 유니레버 CJ홈쇼핑 등 다양한 업종의 대기업으로 고객을 넓혀가면서 LG계열사 비중을 10% 아래로 줄였다. 현재는 5% 미만. 2000년. 창업 4년 만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판촉물 제조업체들이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대거 옮기자 박 사장도 하는 수 없이 보따리를 쌌다. 상하이에 지사를 세우고 현지 법인 씨에이피차이나를 설립했다. 판촉물 유통업체의 첫 중국 진출이었다. 박 사장은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다시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칭다오에 봉제공장을 차려 수요가 많고 디자인력이 뛰어난 파우치(소형 가방) 중심의 직접 제조를 시작했다. 국내에는 디자인 센터를 세웠다. 판촉물 회사가 디자인 센터를 회사 내부에 두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세련된 디자인을 뽑아내 칭다오 공장을 돌려 물건을 생산했다. 그렇게 만든 물건은 판촉물뿐 아니라 일본의 ‘100엔숍’에도 납품된다. 유럽 등에 수출도 시작했다. 씨에이피는 중국법인을 포함, 총 4개 계열사를 합쳐 연간 매출 730억원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박 사장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유통과 무역은 해 볼 만큼 했으니 본격적인 제조 업체로 변신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기준은 두 가지. 첫째, 모든 구매의 80~90%를 좌우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할 것. 둘째, 경기에 민감하지 않은 생필품일 것. 그러던 와중에 박 사장에게 전환점이 다시 찾아온 것은 중국법인을 차린 지 또 다시 4년만인 지난 2004년이었다. 모 화장품 업체에 ‘한방 생리대’를 판촉물로 납품할 기회가 생겼다. 계약 물량은 1억원어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반응이 워낙 뜨거워 원래 주문량보다 2배 많은 2억원어치가 추가 납품된 것. 박 사장은 눈이 번쩍 뜨였다. 박 사장은 틈새를 공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피부 트러블이 전혀 없는 신소재를 개발한 한양대 섬유공학부를 비롯해 한약재는 예한의원, 피부는 아름다운 나라 피부과, 여성 질환은 호산 산부인과 등 각 분야별 전문가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공동 연구개발에 착수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허밍스’라는 프리미엄 생리대가 탄생했다. 2개월 간 착용 테스트 결과 제품 만족도는 3.92점. 경쟁사 A제품(3.2점), B제품(2.9점)에 압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4월말부터 출시되는 허밍스의 첫 해 매출목표는 450억원이다. 박 사장은 자신의 성공비결을 ‘열정’이라고 말한다. 열정은 ‘어떻게 하면 더 잘할까’의 고민으로 이어져 ‘1%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남들이 맛있는 반찬만 골라먹느라 정신없을 때 그는 1%의 차이를 만들기 위해 밥상을 통째로 차리는 ‘수지 맞지 않는’ 고생도 감수한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1%의 차이는 결국 100%의 우위가 돼 돌아왔다. 그것이 박 사장의 30대였고, 지금 40대의 도전이기도 하다. 맡은 일에 최고가 되고 성실한 인맥 갖춰라첫째, 맡은 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돼라. ‘최소한 내 분야에서는 사내 1등’이라는 자신감이 있어야 회사의 그늘을 벗어나 생존할 수 있다. 상황과 기여도를 냉정히 따져 나 혼자 올린 실적은 과연 얼마인지 평가해 가며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과거 직장 동료 중 창업해 성공한 경우를 곰곰 되씹어보면, 다들 그 자리에서는 최고였다고 박 사장은 말한다. 둘째, 성실하게 인맥을 쌓아라. 여기서 인맥이란, 친분에 기댄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컨대 속칭 ‘을’ 관계에 놓인 납품 업체도 실력 중심으로 평가하고 정중하게 대하면서 인간적 신뢰감을 쌓는 것이 최대의 창업 종자돈이 된다. 각 분야의 파트너와 ‘제로섬’이 아니라 ‘시너지’ 관계를 형성하면 결국 성공으로 이어진다. 셋째, 직장에서 멘토를 만들어라. 박 사장에게는 판촉물 파트장이었던 상사가 멘토였다. ‘너무 한곳에만 매달리지 말고 넓게 보라’는 상사의 조언은 그의 커리어에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 당시 영업에만 매달리던 박 사장은 상사의 조언과 리더십 덕분에 관리 분야에도 관심을 갖고 노하우를 키울 수 있었다. 박 사장은 현재 씨에이피에서도 디자인과 영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고객사와의 판촉물 기획 미팅 때는 반드시 디자이너와 영업맨이 짝을 이뤄 참석한다. 시장과 고객을 모르는 디자인은 팔리기 힘들고, 디자인 감각이 없는 영업맨은 물건을 파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넷째, 1%의 차이를 느끼면서 생활하라. 모든 경쟁력 우위는 미세한 차이를 만드느냐 여부에서 출발한다. ‘한방에’ 뭔가가 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포장 하나, 보고서 작성 하나를 할 때도 ‘뭔가 차이를 만들 수 없을까’를 고민하는 생활 태도가 결국은 성패를 좌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