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만달러의 원초적 질주

스 피터 마틴(Hans-peter Martin)과 헤럴드 슈만(Harald Schumann)은 20세기 말에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을 통해 20 대 80의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진행될수록 자본주의의 특성상 상위 20% 사람들이 부를 독차지하고 나머지 80%는 20%가 부를 축적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다. 그런 그의 예견은 너무나 정확히 맞아떨어져 오늘날 세계는 바로 그 ‘세계화의 덫’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정작 자신도 20% 안에 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라고 하면 의식주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그 의식주를 해결하는 방식과 추구하는 방식에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 그로 인해 개개인의 원초적 본능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처한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62억 인구의 얼굴이 모두 다른 만큼 그들이 꿈꾸는 것도 그만큼 다르다는 얘기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나만이 그리던 집, 그러니까 저택을 사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원하는 집의 형태는 모두가 다를 것이다. 추위에 시달렸던 사람은 난방이 가장 중요할 것이고, 반대로 더위로 고생한 사람은 쾌적한 냉방시설을 갖춘 집을 원할 것이다. 어쨌거나 영화 속에서나 보았음직한 아늑하면서도 호화롭고, 그야말로 꿈의 궁전 같은 집을 갖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리고 집 다음으로는 나만의 이동공간인 자동차로 눈길이 간다고 한다. 물론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이미 좋다는 자동차는 모두 가져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남부러울 것 없는 재산에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 하는 고급 세단을 가졌다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무언가 색다른 걸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 그 욕심의 근원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욕심은 결코 탓할 것이 못된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세계적인 프리미엄 브랜드 메르세데스-벤츠가 내놓은 차가 SLR 맥라렌이라는 모델이다. 지난 5월 초 2005 서울모터쇼를 통해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선보인 바 있는 SLR 맥라렌은 2004년 여름 출시됐다. 물론 한국시장 시판 계획은 없다. 이 차의 미국시장 판매가는 45만2500달러. 그전까지 미국시장에서 판매된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가 모델은 AMG라는 튜닝카사가 S클래스를 베이스로 만든 S55AMG라는 슈퍼 스포츠카 모델로 16만9000달러. 메르세데스는 최근 AMG가 만든 고성능 모델들을 많이 내놓고 있다. 작년 미국시장에서 메르세데스-벤츠 판매 대수의 5%가량인 1만1000대가 AMG 모델이었다. SLR 맥라렌은 그 세 배에 달하는 가격표가 붙은 셈이다. 그럼에도 이 초고가 모델은 출시와 동시에 2년치 주문이 끝나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것도 200명에 가까운 구매자가 5만달러의 예탁금을 주고 주문을 완료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앞으로 7년 동안 연간 500대씩, 그러니까 모두 3500대의 SLR를 생산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중 미국시장에 배정된 대수는 연간 100~120대가량으로 최대의 소비처가 미국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일부 차량은 실제 소비자의 손에 넘어갔으며 국내에도 중고차로 3대 정도 들어와 도로를 누비고 있다. 사실 국내에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감이 있지만 첫번째 SLR는 2004년 1월 뉴욕에서 실시된 자선 경매에서 무려 210만달러라는 거액에 판매됐다. 이 차를 구입한 사람은 뉴욕 로슬린에 있는 랠리모터스 사장 줄리어나 테리안. 첫 번째 SLR 맥라렌은 신차가격 45만2500달러를 거액이라고 하는 게 무색할 정도로 그 4배가량의 경매가, 정확히 말하면 중고차 가격으로 되팔린 것이다.그렇다. SLR 맥라렌은 부동산보다 더한 가치를 가진 투자상품인 것이다. SLR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운전하기 위해 차를 산 것이 아니다. 수집용으로 구입해 수익을 남기고 되팔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이 차가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딜러들은 공급량보다 많은 주문을 받아놓고 있다. 고가차를 많이 판매하는 딜러도 올해 2 대, 내년에 3대, 2007년에 2대 하는 식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SLR는 포뮬러 원 레이싱 파트너인 맥라렌과 공동으로 개발한 모델로 벤츠의 전속 튜닝 업체인 AMG에서 정교하게 튜닝한 V8기통 5500cc 626마력의 슈퍼차저 엔진을 얹어 최고시속 334km까지 낼 수 있다. 정지상태에서 3.8초 만에 시속 100km에 도달할 수 있다. 카본파이버 충격흡수식 차체 구조를 가진 세계 최초의 양산차인 SLR 맥라렌은 승객의 안전을 위한 각종 첨단장치를 갖췄다. 세라믹 브레이크 시스템 등을 비롯한 많은 레이싱 테크놀로지를 채용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턱없이 비싼 가격에 판매하는 모델의 컨셉트를 1950년대 모델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1950년대 초 메르세데스-벤츠는 300SL이라는 걸윙 도어 형태의 걸출한 모델을 만들어 시대를 풍미하고 있었고, 그 위세를 바탕으로 레이싱카 300SLR를 개발했다. 당시 300SLR는 데뷔하자마자 레이싱 서킷을 휩쓸었다. 그 명성이 21세기에 새로운 형태로 부활한 것이다. 양산차로서는 최초로 걸윙 도어를 달고 도로와 서킷에서 명성을 날렸던 50년대 벤츠의 명차 300SL의 혈통 속에 잠자고 있는 야성적인 스피드를 되살리기 위해 F1의 명장 맥라렌 팀과 손잡고 만들어낸 것이 바로 2004년에 등장한 21세기형 ‘벤츠 SLR 맥라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