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rdan

때 온 세상이 중동에 렌즈를 들이대며 ‘전쟁’이야기를 들려줄 때 나는 그 중심에서 다른 프리즘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과 문화에 압도된 것도 사실이지만 서방세계에서 전해주는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흔적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흥미와 관심을 접고 속내를 들여다보듯 바라본 나라, 요르단.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탄성을 자아낼 만한 훌륭한 명소들이 즐비해서 문명세계의 그 어느 나라에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매혹적인 나라다.아시아 대륙 서쪽에 자리한 요르단은 기독교 성지와 인접해 있어 오래 전부터 성지순례 코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양문명의 양대 축인 헤브라이즘(기독교 문명)과 헬레니즘(그리스·로마문명)이 공존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고대 나바테아인들이 건설한 페트라(Petra)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폐허도시를 포함, 요르단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곳 여행의 매력을 두 가지 정도로 압축시킨다.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 모세 등을 코드로 하는 기독교 성지순례지로서의 명성, 두 번째는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옛 고대도시 로마의 식민지 흔적들이다. 물론 수도인 암만은 최근 중동전쟁의 발발로 인접국들의 국제적인 교류중심지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성경만한 요르단 여행의 길 안내자를 찾을 수 없고 눈으로 보이는 위대한 로마 건축물에서 시선을 비켜 요르단을 감상할 순 없을 것 같다. 물론 요르단엔 이외에도 독특한 명소들이 즐비하다. 우선 이스라엘과 경계에 있는 사해에서 즐기는 수영과 머드팩을 빼놓을 수 없고, 무려 50m 높이에서 떨어지는 온천폭포 등은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장소다. 특히 해발보다 200m나 낮은 지점에 위치한 마인 온천은 섭씨 50도의 온천물이 절벽에서 떨어지는가 하면 관절염과 피부병에 치유력이 있다고 알려져 요르단 국민들도 애지중지 아끼는 관광명소다.얼마 전까지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전 세계 외신기자들이 캠프를 치고 각국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정치적인 메카로 보여지고 있지만 무엇하나 급할 것 없는 느긋함으로 21세기를 맞은 평화로운 중동 국가의 모습은 요르단 전역 곳곳에서 느껴진다.요르단은 출애굽에 성공한 선지자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38년 동안 시간을 보낸 곳이다.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현장이기도 하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시리아와 함께 국경을 아우르는 가장 대표적인 기독교 성지순례지로 알려져 있다. 모세가 숨진 느보산, 예수가 세례를 받았던 베다니,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동굴, 세례요한의 순교지인 마케루스 하궁터 등이 대표적인 성지 명소들이다. 그래서 요르단을 여행하다 보면 성경에 언급된 지명들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여행자들을 맞는다. 현재 요르단엔 기독교 성지 외에도 고대 로마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당시 로마가 만든 데카폴리스(Decapolis)라는 이름의 10개 위성도시 중 3곳이 남아 있다. 제라쉬, 필라델피아(지금의 암만), 움 카이스 등이 그곳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곳들은 마치 이탈리아의 그것과 흡사하다. 성경의 지명 거라사로 알려진 제라쉬(Jerash)는 암만 북쪽 45km에 위치한 도시로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설되었다. 동양의 폼페이, 1000개의 기둥도시라고도 불린다. 로마 바티칸시티의 기둥광장과 흡사한 열주광장이 도시의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요르단 사람들은 허물어지는 모습이나 낡은 것을 표현할 때 ‘제라쉬 같다’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그 말처럼 곳곳에 흩어진 신전과 궁전, 경기장의 모습들은 고대의 숨겨진 내력을 담담히 전하고 있는 듯하다. 성지와 고대 로마도시 이야기 외에 요르단을 떠올리는 코드는 페트라다. 한동안 역사 속에 사라졌던 폐허도시, 페트라의 이야기는 19세기 초 캐러번 일행이 빈번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떻게 해서 문명세계에 이 유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지는 마치 빛바랜 흑백영화를 한 편 보는 듯하다. 페트라를 다시 찾아낸 사람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 카이로를 향해 여행을 하던 중 이 장엄한 폐허를 찾았다. 페트라는 북아라비아의 사막민족인 나바테아인의 근거지였다. 페트라는 바위를 뜻하는 페트로(petro)란 말에서 따왔다. 말 그대로 바위 도시다. 온통 붉은 빛이 감도는 화강암과 사암으로 이뤄진 이곳은 후에 왕국의 수도가 됐다. 나바테아인들, 특히 캐러번들은 고대에 인기있던 물품인 알로에, 계피, 유향 등을 남아라비아와 인도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운반했었고 기원전 4세기부터 전설적인 유향로(乳香路)의 북부를 장악할 정도로 세력이 컸다. 척박한 지역에서 물이 있는 몇 안되는 장소를 그들만이 알고 있었고 또 사막의 모래바람을 피할 요령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역을 통해 풍부해진 경제환경과 헬레니즘 문화와의 교류, 그리고 후일 로마문명과의 접촉으로 인해 천막에서 생활하던 주거환경이 급속히 변화했고, 오늘날 볼 수 있는 대형 석조 건축물까지 완성시킬 수 있게 됐다. 신과 죽은 이들을 위한 건축물의 집합체이긴 하지만 고대도시인 페트라에 접근하려면 영화‘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의 촬영장면을 떠올려야 한다. 주인공이 말을 타고 성배를 찾기 위해 들어서는 장면, 바로 수십 미터 높이의 수직 암벽으로 이뤄진 협곡 시크(siq)를 통해야 한다. 폭 4~5m의 협곡암벽에는 깊이 깎은 부조들이 새겨져 있다. 하늘이 언뜻언뜻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끝이 없는 이 길은 2km정도 이어진다. 암벽에 새겨진 부조들은 그 모습이 사각형이면 나바테아인의 주신인 돌 속에 숨은 신이라는 뜻의 ‘두샤라’를 뜻하고 오벨리스크 모양이면 죽은 이들을 추도하는 기념비를 가리킨다. 협곡을 빠져나가면서 차츰 시선을 메우는 화려한 건축물은 바로 파라오의 보물창고라 불리는 ‘카즈네 피라운’이다. 2층으로 된 원주 기둥, 깎아 만든 조각품 등과 함께 서서히 드러나는 자태는 주변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낙타몰이꾼의 모습과 어울려 완전히 다른 세상에 진입했음을 실감케 한다. 기원전 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왕릉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폭 30m. 높이 43m의 규모로 코린트 양식의 기둥 6개가 떠받치고 있다. 건축양식은 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헬레니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나바테아인의 선왕들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른 왕들의 무덤은 원래의 페트라 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그 아래로 욕탕과 학교, 광장, 원형극장 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고 포장된 도로가 고대 도시의 축임을 가늠하게 해준다. 바위 언덕을 그대로 파서 좌석을 만든 원형극장은 당시의 지도층이 문화적으로 고대의 무역상대국들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풍요로웠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106년 로마 시민이 된 후로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이곳의 자립은 끝났다. 마치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폐허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 것 같다. 페트라 유적은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깊게 각인된 것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 때문이었다. 성배를 찾기 위해 탐험일행이 찾아갈 만한 장소로 선택되었다는 것이 이 장소가 갖는 모든 의미를 설명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