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없는 물건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다. 금맥이나 유전을 발견하거나 신제품을 발명한 사람에게 전매권이나 특허권을 주는 것은 ‘먼저 발견하고, 먼저 손 댄’ 개척정신을 존중하는 오랜 전통이다. 부자들의 DNA 속에는 이러한 ‘용기’와 ‘개척정신’이라는 독특한 인자가 특히 많이 있다. 기원전 11세기에 헤레몬 오네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북 유럽 노르만(바이킹)족의 해적이었던 오네일은 경쟁자와 동시에 배를 띄워 새 영토에 먼저 손이 닿는 사람이 그 섬을 차지하기로 약속했다. 섬 가까이 오자 오네일의 배가 조금 뒤져 새 영토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을 때 돌연 그는 오른 손을 칼로 잘랐다. 오네일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목을 뭍으로 힘차게 던졌다. 그러자 경쟁자보다 한 순간 앞서 그의 손이 육지에 닿았다. 그는 북아일랜드 얼스터 지방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 가문의 문장(紋章)에는 <방패 속에 손>이 그려져 있다.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러한 ‘피 묻은 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던져지고 있다. 신기술을 선점하려고 연구실, 실험실, 거래의 밀실, 시장, 우주 혹은 사이버 공간에서까지 피나는 경쟁을 하며 미지의 주인 없는 부의 섬으로 피 묻은 야망의 손을 던지는 개척정신은 오늘도 감행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위험이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보상은 커진다. 야망이 큰 사람일수록 더욱 위험한 일에 과감히 도전하고 무수한 실패를 딛고 성공한 사람은 엄청난 부를 얻고 존경을 받게 된다. 여불위의 무서운 꿈과 욕망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꿈과 욕망을 가진 사람은 단연코 여불위라 할 수 있다. 그가 일찍이 거상인 아버지와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는 너무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농사를 지으면 몇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10배를 얻을 수 있다.보석 장사를 하면 몇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100배는 얻을 수 있다.그렇다면 돈으로 나라의 임금을 사면 몇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그건 이루 헤아릴 수 없다.이 대화에서 이미 여불위의 엄청난 야망을 읽을 수 있다.중국 전국시대 말 진나라 소양왕의 손자 이인(異人)은 조나라의 인질로 보내졌다. 이때 여불위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인을 만나고, ‘이것은 기이한 물건이니 사둘 만하다(此奇貨 可居)’고 생각하고 원대하고 엄청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여불위는 진왕의 태자 안국군이 가장 총애하지만 아들이 없는 화양 부인을 주목하고 온갖 금은보화로 공작해 이인을 태자로 삼도록 안국군을 녹이도록 했다. 자초(子楚)라고 이름을 고친 이인에게 여불위는 조희라는 미인으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했으며, 자초는 조희와 결혼해 1년이 못 돼 아들을 낳았는데 조나라에서 태어났기에 조정(趙政)이라 이름 지었다. 이 아이가 훗날 중국 천하를 통일한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으로, 사실은 조희와 여불위의 자식으로서 자초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잉태했던 것이다.효문왕이 죽자 아들 자초가 왕으로 즉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13세의 조정이 드디어 왕이 됐다. 여불위는 조정의 어머니 조희와 둘이만 아는 이 비밀을 숨겼고, 여불위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는 법. 여불위와 조희의 불륜은 곧 소문이 났고 여불위는 이 사실이 아들 조정의 귀에 들어갈까 봐 태후를 피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여불위는 여기서 또 하나의 엄청난 계책을 꾸며 노애라는 사람을 환관으로 위장시켜 자신을 대신해 조희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도록 태후의 방에 들였다. 노애는 곧 태후의 마음을 사로잡자 엉뚱하게도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앉히려고 야망을 키우다 실수로 모든 것이 발각돼 죽고, 태후는 귀양 보내지고 여불위는 관직을 박탈당했으며 결국에는 자살하고 말았다. 분서갱유를 비롯한 진시황의 잔인한 성격도 결국 이러한 그의 출생 및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불위의 꿈. 그것은 차마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무서운 꿈으로, 정치를 이용한 갖은 계략으로 천하의 권력과 부귀를 누렸지만 그의 행동 근원이 의(義)를 떠났기 때문에 비극적인 일개 정상배라는 평가를 면할 수 없으며, 정경유착(중국에서는 관상일체(官商一體)라고 불렀다)의 헛된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값진 교훈을 남겼다. 오늘날도 ‘여불위 드림’은 이어지고 있다. 민주사회가 된 지금도 정치의 힘은 막강하기에 권력에 편승해 특혜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밀실에서 음모의 자금을 대며 온갖 술수를 쓰고 있다. 경제나 정치나 모두 사람이 잘 살기 위한 수단이기에 완벽하게 분리될 수는 없다. 중국의 거상 호설암은 “작은 장사를 하려면 상황에 순응하면 되지만, 큰 장사를 하려면 먼저 나라를 도와 국면을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실제로 왕조시대의 거부는 대체로 왕족 혹은 그들과 밀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등 정보전달 수단의 발전으로 투명사회가 전개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비윤리적으로 정치와 결탁한 사업은 일시적으로 크게 일으킬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모든 비밀이 드러나고 그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함은 허망한 ‘여불위 드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만고의 진리다. ‘도땅의 주공’ 범려의 의로운 부추악한 ‘여불위 드림’과는 반대로 ‘의(義)로운 부’로 중국 역사에서 상성(商聖)으로 추앙받는 현자는 바로 ‘범려’로 흔히 도주공이라 불리는 사람이다.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한 뒤에 범려는 그 공로로 상장군에 임명됐다. 범려는 월왕 구천의 관상이 ‘목이 길고 입이 새 주둥이 같이 생긴 장경조훼형(長頸鳥喙型)’임을 알고 이러한 사람은 ‘환난은 같이 겪을 수 있어도 부귀는 함께 누리지 못할 것’을 예견했다.또 범려는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잡아 먹고, 새가 보이지 않으면 좋은 활도 쓸모가 없으며, 적국이 망하면 모신의 운명도 끝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벼슬과 함께 모든 가산을 미련 없이 버리고 제(齊)나라로 달아나 해변에 정착, 황무지를 개간해 5년 동안 농사를 지어 만석꾼의 부호가 되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제왕 정공이 승상을 맡도록 부탁해 3년간 직책을 수행하고 나서 과감히 다시 사퇴하고 제나라를 떠나 도나라로 도망가 버렸다. 범려는 여기서도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해 몇 년 만에 다시 큰 부자가 되었다. 범려는 19년 동안 세 차례나 천금의 부를 이루었고, 여러 차례 곤궁한 백성을 위해 재물을 풀었으며, 그의 자손들도 부친의 사업을 계승 발전시켜 재산은 천금에서 만금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도(陶) 땅의 주공’이라고 불렀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범려야말로 예지를 가진 사람으로 세상의 원리와 분수를 알고, 의(義)가 이(利)보다 소중함을 알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할 줄 알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정한 부자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