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이후 우리 사회는 큰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사회를 지배하는 기본 가치가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한마디로 수천 년 동안 축적해 온 아시아적 가치의 변화를 강요받고 있다. 아시아적인 가치란 무엇인가? 인(仁), 의(義), 예(禮), 지(知)로 압축 표현되는 아시아의 유교적 가치는 한마디로 인정스럽고 의리가 있고, 예의와 지식의 함양을 중시하는 그런 가치다. 이런 가치는 무엇보다 사람 간의 관계를 중시한다. 즉, ‘합리’보다는 ‘의리’를 중시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계산적’인 것보다는 ‘인정’을 중시해왔다. ‘분석적’인 것보다는 ‘직관적’이며 무엇보다 ‘개인’에 앞서 ‘집단’을 중시해 왔다. 이런 아시아적인 가치의 징후는 도처에 산재해 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 ‘자장면으로 통일’이라는 구호가 상징하듯 한 개인의 개성과 특성보다는 집단의 일원으로서 조화와 예속을 중요시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동기생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능력에 관계없이 똑같은 월급을 받는 것을 오랫동안 너무나 당연히 생각해 왔으며, 회사를 옮기는 것을 의리 없는 것으로 비난해 왔고 종신고용제를 높은 가치로 지향해 왔다. 아는 사람끼리 적당히 봐주고, 적당히 거짓말해 주는 것을 부정부패라기보다 사람 간 인정의 당연한 도리요, 표현으로 생각해 왔다. 이러한 아시아적 가치에 비해 그렇다면 21세기 정보화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불행히도 대부분 아시아적 가치와 배치되는 것들이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는 무엇보다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한다. 빌 게이츠가 상징하듯,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는 개인의 창의와 이니셔티브에 의해 엄청난 부(富)가 창출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한마디로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살리는 게 돈 버는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또 정직과 투명성은 21세기 세계화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큰 가치의 하나다. 서양은 전통적으로 동양보다 ‘정직’에 더 큰 가치를 두어 왔다.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워싱턴 대통령의 벚꽃나무’라는 일화가 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벚꽃나무를 무참히 훼손시킨 아들이 그것을 정직하게 자백하자 이를 기뻐하며 용서해 줬다는 워싱턴 대통령의 아버지 이야기다. 이에 비해 동양의 유교 문화에서 정직이 가치 체계의 최상위권에 위치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친구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흠이 아니라 미덕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시장에서 정직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투명하고 정직하지 않은 사회에는 세계의 돈과 사람이 모이지 않고, 세계의 돈과 사람이 모이지 않고는 결코 경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21세기는 얽히고설킨 인간과 인간 간의 유대보다는, 즉 의리와 정보다는 실용과 합리를 요구하고 있다. 잘라야 할 때 냉정히 자르지 않고는 경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은 정과 의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가치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요구한다. 한마디로 인의예지로 표방되는 아시아의 유교적 가치 체계가 도처에서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인(仁)보다는 공평이라는 가치가 우선되고, 의(義)보다는 합리가, 예(禮)보다는 실용이, 지(知)보다는 창의가 더 경쟁력 있는 가치라는 당혹스러운 현실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해고, 연봉제, 헤드 헌터, 투명성, 적대적 M&A 등 우리가 요즘 듣고 있는 용어들은 이런 새로운 가치들의 표면적 징후들일 뿐이다. IMF 이후 우리 사회는 시대가 요구하는 이런 가치를 수용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다. 그리고 우리는 상당 부분 성공을 거두어 왔다. 그러나 이런 가치의 변화가 ‘우리 민족의 혼’을 훼손할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염려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혼은 무엇인가. 우리의 혼과 새로운 가치의 균형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제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