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대 청춘을 호주에서 누렸다.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후 1995년 서울에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내가 내릴 버스 정류장에 재대로 내리지도 못할 정도로 호주의 ‘slow’한 라이프 스타일에 익숙해 있었다. 90년대 초, 당시 호주에서는 제3세계의 음식이 한창 유행이어서 태국과 베트남 음식 내지는 유러피언과 아시안 퀴진의 퓨전이 인기였다. 세상에 와인이라고는 화이트와 레드 두 종류로만 인식하던 나에게 이러한 호주의 음식 문화는 맛에 대한 다양성과 와인과 아시안 퀴진의 융통성 있는 궁합을 가르쳐 주었다. 얼마 전 이사를 하고 집들이를 할 때도 나는 샴페인과 호주 와인을 준비했다. 편육을 사이드 디시로 함께 준비했는데 레드 와인 살리스버리(호주 악센트로는 Salisbury ‘셀리스버리’가 아니라 ‘살리스버리’다) 2003년산 카버네 쉬라즈는 초대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로 한국 음식에 잘 어울렸다. 프랑스 등 유럽 정착민이 재배 시작이처럼 기대 이상으로 내 지인들에게 열화와 같은 지지를 얻고 있는 호주의 와인 역사는 의외로 생각보다 길다. 그 시작은 1820년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유럽에서 온 정착민들이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678종의 다양한 포도나무를 들여와 심으면서 남부 호주 전역에 걸쳐 영역을 넓혀 갔다. 이렇게 생산된 호주 와인은 1960년대까지 가정에서 마시거나 영국에 수출하기 위해 만든 포트와 같은 알코올 강화 와인(Fortified wine)이 대부분이었으나 1970년 이후 유럽 국가에서 온 전후 이주민들이 테이블 와인의 맛을 전파시키면서 호주 와인 산업은 본격적인 성장을 했다. 호주는 실제로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와인 대국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와인 생산량은 400만 헥토리터(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와인 생산량의 30%, 세계 생산량의 2%)이고 이 중 40%를 영국에 수출하고 있다. 호주의 국내 와인 소비량은 일인당 18리터이며, 이는 미국의 2배에 이르는 엄청난 양이다. 그렇다면 과연 호주 와인 산업은 어떻게 이리도 짧은 시간에 급성장했을까? 그 요인은 아마도 호주인들의 피나는 노력을 통한 품질 향상, 저렴한 토지, 고도의 최신식 양조 기술 개발, 양조장 규모의 경제성, 세계 시장을 겨냥한 와인 산업의 통합 등 복합적 요인이 아닐까 싶다. 호주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지역은 주로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중남부 지역이고 이 지역에서 전체 생산량의 50% 정도가 나오며 필자가 오래 살았던 시드니가 있는 ‘뉴 사우스 웨일스’지역에서 약 27%, 그 남쪽인 ‘빅토리아’지역에서 약 14%가 생산된다. 그러니까 호주 와인의 90% 이상이 호주 대륙의 남동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셈이다. 코르크 마개 대신 스크루 캡 사용호주 와인은 두 가지 이상의 품종이 섞여 있는 와인을 상표로 사용할 경우 함량이 많은 순으로 표시한다. 하지만 블렌딩을 하는 과정에서 호주산 와인은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을 완전히 깨고 어떤 나라에서도 하지 않고 있는 새로운 호주식 와인 혼합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쉬라즈(Shiraz)에 카버네 소비뇽을 혼합하거나 세미용(Semillon)에 샤도네이(Chardonnay)를 혼합하는 것과 같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혼합 방식을 호주 와인 메이커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그래서 두 종의 포도 품종을 혼합해 만든 호주 와인의 라벨에는 언제나 이 두 가지를 혼합한 포도 품종을 함량이 많은 순서대로 명기한다. 뿐만 아니라, 서부 호주 지역의 에번스 앤 테이트 (Evans & Tate) 와인 중에는 최고급 와인들이 코르크 마개 대신에 스크루 캡으로 마감돼 있는 게 특징이다. 이는 외부의 저항으로부터 가장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장치로서 와인이 담고 있는 땅의 기운인 ‘테르와’를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와인 메이킹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호주만의 독특한 와인 ‘쉬라즈’ 탄생호주 사람들은 기후가 더운 탓인지 대부분 화이트 와인을 많이 즐기는 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음식을 만들면서는 식전주로 화이트를 주로 마시며 식사를 하면서는 레드를 함께 마신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주로 재배하는 화이트 포도 품종은 리슬링, 샤도네이, 트라미너, 뮈스카, 세미용, 트레비아노, 소비뇽 블랑 등이며 레드 와인용으로는 쉬라즈, 카버네 소비뇽, 멀벡 등이 있다. 이들 포도 품종은 유럽에서 건너 왔으나 호주의 자연환경에 융화돼 독특한 개성을 지닌 새로운 품종으로 재탄생했다. 예를 들어 호주산 리슬링은 독일산과는 매우 다른, 세계에서도 정상급에 속하는 호주 고유의 특성을 가진 포도 품종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쉬라즈는 프랑스 론(Rhone)의 쉬라(Syrah) 품종에서 파생한 것으로 호주에서는 카버네 소비뇽과 더불어 레드 와인 품종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호주 특유의 와인을 만들 때 가장 적합한 포도 품종은 쉬라즈(Shiraz:다른 포도 생산국에서는 시라(Syrah)라고 부르는 바로 그 품종)라는 포도다. 이 쉬라즈로 생산하는 레드 와인은 아주 진한 적갈색(카버네 소비뇽보다 더욱 진한 색)을 띠고 있으며 향도 아주 강하고 자극적이다. 호주 전 지역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품질이 들쭉날쭉하지만, 헨시케(Henschke)의 힐 오브 그레이스(Hill of Grace), 펜폴즈(Penfolds)사의 그란지(Grange) 등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와인이 생산돼 이 품종의 매력을 한껏 드러내 주기도 한다. 한국인 입맛에도 딱맞는 ‘와인천국’지역별로 호주 와인의 매력은 각기 다르지만, 나는 올 여름, 남부와 서부 호주 지역의 와인에 푹 빠져 있다.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지역에서는 지중해 기후가 그러하듯 올리브 밀감 아몬드 아보카도 배나무 포도가 왕성하게 잘 자란다. 이 지역에서는 호주 와인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는 헨시케의 힐 오브 그레이스와 펜폴즈사의 그란지라는 와인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한데 유럽에서 온 최고의 와인들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독특함과 풍부함이 존재한다. 이 밖에도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지역의 고급 와인으로 유명한 브랜드에는 울프블라스(Wolf Blass), 그렉 노먼(Greg Norman-세계적 골퍼의 이름을 딴 와인) 등이 인상적이다. 대중적이면서도 가격 대비 높은 품질로 각광받는 대표적 브랜드인 얄룸바(Yalumba), 살트램(Saltram) 등이 여름에 잃었던 식욕을 되찾아 줄지도 모른다. 서부 호주의 와인 산업은 남부보다 몇 년 앞서 시작됐다. 1829년, 토머스 워터스(Thomas Waters)가 당시 올리브 농장 예정지였던 20에이커의 땅을 매입해 포도원을 조성한 것이 그 시작이다. 서호주를 대표하는 와인으로는 마가렛 리버의 특성을 잘 반영하며 호주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인기와 좋은 평가를 받는 에번스 앤 테이트를 들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해양의 영향을 받은 기후 때문에 레드 와인 품종과 섞은 샤도네이와 보르도 스타일 블렌드의 화이트 와인이 특히 성공적이다. 이 지역은 과일의 풍미가 담긴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과 카버네 소비뇽, 쉬라즈로 유명해졌다. 특히 서호주의 쉬라즈는 에번스 앤 테이트가 2000년 런던 국제와인대회에서 ‘최우수 레드 와인상’을 받으면서 세계 무대에 진출했으며 한국인의 입맛에도 아주 잘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