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모임이 있었다. 같이 자리를 한 친구들 중에 한 명은 공돌이(우리는 공무원을 이렇게 부른다)였다. 중앙 부처의 꽤 높은 직위에 있는 그 친구는 요즘 자기의 고민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공무원으로서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론적으로야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이 곧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일하는 것과 같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가 보다.친구들 중에는 항상 우리 모두 지금 죽어도 호상이라고 주장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우리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위험을 헤치며 목숨을 유지했고, 더구나 가끔은 좋은 친구들을 만나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으므로 지금 죽어도 호상이며,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나머지 인생은 덤이라는 것이다. 그 친구는 공무원 친구에게 고민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충고했다. 그 친구는 유명한 문학가 버나드 쇼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말을 남기며 죽어갔다고 했다. 버나드 쇼는 매일 내일을 위해 준비하고 오늘을 참고 기다리다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미 죽음 앞에 와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죽어갔단다. 따라서 내일은 오늘보다 의미가 없으며, 지금에 충실한 것이 삶을 잘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다른 친구는 공무원 친구에게 교활하고 약삭빠르게 살라고 충고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항상 꿈과 야망, 그리고 광기를 강조하던 친구의 충고였다. 네가 공무원이 되기로 했을 때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위치에 오를 때까지, 소위 말하는 출세를 할 때까지 참고 버티며 약삭빠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게 충고의 요지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두 충고가 표면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모두 내일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표면적으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내일이 올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친구의 충고는 올 가능성이 적은 내일에 집착하기보다는 오늘에 충실하라는 충고이고, 두 번째 친구의 충고는 올 가능성이 많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고 희생하라는 충고이다. 그러나 내일이 올 가능성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일이 와서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왜 그 무엇이 되려고 하는지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길 꿈꾼다. 자신이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부터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부자가 될 수 있을 확률 계산까지, 그리고 얼마나 돈이 많으면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어려운 수학 문제까지 수많은 상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내일의 부자가 되기 위해 오늘을 희생하기도 하고, 가족을 포함해 부자가 되는 것 외의 다른 가치를 희생하기도 하며, 때로는 부자가 되기 위해 비열하고 비굴해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왜 부자가 되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부자가 되려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거창한 의미를 실천에 옮겨야 할 필요는 없다. 모두 부자가 되어 기부와 희생으로 상생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모두 상이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인생의 목적이 모든 사람에게 다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부자가 되고 싶은 이유 없이 그저 부자 자체가 목적인 사람이라면, 나중에 객관적으로는 부자가 되더라도 그는 인생의 부자는 아닐 것이다. 부자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물어본다. 왜 부자가 되려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