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세계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한 부자 가문이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예부터 부자를 칭찬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만큼 부자가 존경받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부자가 존경을 받으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그 재산을 모으는 방법에서 정당성이 있어야 하며, 둘째 그 재산을 행사하고 지킴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며, 그 재산을 처분함에서 사회적으로 유익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10대 300년간 만석꾼의 부를 지켜 오면서 수많은 이웃과 함께 ‘나눔’을 실천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된 ‘경주 최 부자’는 바로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킨 사람이다.최근에 ‘유산 안 남기기 운동’도 있지만, 단지 재산을 오래 지켰다고 반드시 존경할 일은 아니긴 하지만 대체로 정당한 방법으로 옳게 벌고, 옳게 지키고, 옳게 쓰지 않으면 결코 그 재산을 오래 지킬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옳게 벌었다경주 최 부자는 조선시대 1600년대 초부터 경주 지방에서 가문을 일으킨 정무공 최진립에서부터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한 최준에 이르는 12대간의 한 가문을 말한다. 임진왜란 때(1592) 스물다섯 살이었던 최진립은 무명으로 참전해 공을 세우고 곧 무과에 급제해 정유재란 때 다시 큰 공을 세워 여러 벼슬을 하다가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가기도 했고, 복권돼 마지막으로 병자호란 때 공주 영장을 지내며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장렬히 전사한 영웅이었다.정무란 시호를 받은 최진립이 자손에게 남긴 유훈은 ‘가거십훈’과 ‘진사는 하되 벼슬은 하지 마라’는 값진 가훈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선조의 이러한 유훈을 지키려고 무진 노력했다. 벼슬 할 생각은 전혀 없음에도 오로지 조상의 유훈을 받들기 위해서 만석꾼 부자가 58세의 고령에 갖은 고초 끝에 진사시에 합격한 최언경의 노력은 참으로 훌륭하다. 최 부자들은 이렇게 정치와 멀찌감치 거리를 둠으로써 정쟁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최 부자는 벼슬을 포기한 선비로서 농사를 지어 재산을 일구는 데도 지식인다운 독특한 방법을 취했다. 그들은 하천의 제방을 구축하고 수리시설을 만들었으며 당시로는 새로운 농사 기법인 이앙법을 도입했다. 또 병작반수제를 과감히 도입해 소작인들로 하여금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 선진 농법을 과감히 들여와 생산성을 높였다. 그들은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마름을 두지 않고 부하를 가족처럼 사랑했다. 최진립의 충직한 노복인 옥동과 기별을 후손들이 제사지내준 것이나 불망비를 세워준 사실은 노비를 천시하던 당시의 상황으로선 놀랍도록 선진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주인은 부하를 가족처럼 사랑하고 부하는 주인을 어버이처럼 모시는 모습은 공동체적 노사관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그들은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는 또 다른 가훈에 따라 남의 약점을 이용해 재물을 축적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4년마다 한 차례 꼴로 흉년이 들었고 이때는 땅을 내놓는 소농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을 사지 않고 오히려 양식을 꾸어주었다. 남의 약점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적대적 M&A(인수합병)가 횡횡하고 있는 오늘의 사례를 볼 때 이는 참으로 본받을 윤리경영의 한 측면이라 하겠다. 옳게 지켰다 경주 최 부자, 그들은 재물을 지키는 데도 남달랐다. 그들은 또 하나의 가훈인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는 유훈에 따라 1년의 소작료를 만 석 이상 받지 않았다. 경주지방 항간의 이야기로 ‘경주 최 부자는 2만석 맞잡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경주 최 부자가 병작반수로 소작료를 거두면 2만석은 족히 거둘 수 있는데 실제로는 1만석밖에 안 걷었다는 말이다. ‘가진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만 부자가 더욱 철저하게 따지고 챙기는 것이 보통의 경우인데 이렇게 적절하게 욕심의 한계를 정하고 가득 채우지 않고 지킨 것은 참으로 놀라운 지혜요 인내라 할 수 있으며 노환공의 ‘의기’를 떠올린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공자가 노환공(魯桓公)의 묘에 있는 ‘의기’(倚器:한 쪽으로 기운 그릇)를 보고 묘지기에게 물었다.“이것은 무엇이오?”“이것은 유좌(宥坐:앉는 걸 돕는)라는 그릇입니다.”“내가 듣건대 이 그릇은 속이 비면 기울게 되고, 중간쯤을 채워 놓으면 반듯하게 되고, 가득 차면 뒤집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현명한 임금은 이것을 지극한 교훈으로 삼아서 늘 좌석 옆에 둔다고 했다.”이렇게 말하며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면서 ‘물을 부어 보라’고 말했다. 제자가 물을 붓자 과연 중간 정도를 채웠을 때 그릇이 바르게 서고, 가득 채웠을 때 그릇이 뒤집어졌다. 공자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아아! 세상에 어떤 물건을 막론하고 가득 차고서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경주 최 부자는 2만석을 받을 수 있음에도 1만석만 걷어 가득 채우지 않음으로써 재물에서 이러한 신기한 그릇의 원리에 따른 중용의 도를 실천한 사람이라 하겠다. 최 부자의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적게 내는 덕분에 누구나 최 부자가 더 많은 땅을 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들은 만석꾼 부자로서 한 도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한 부자였다. 그러나 그 집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에는 무명옷만 입도록’ 해 근검절약을 몸에 배도록 하였으니 만석꾼 며느리가 이럴진대 그 집 노비나 이웃은 감히 사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러나 이러한 절약 가운데서도 ‘과객을 후히 대접’하고, ‘사방 백 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여 이웃과 함께 ‘나눔’의 정신을 실천해 존경의 대상이 됐다. 옳게 썼다경주 최 부자는 300년 동안 부를 지켜오다가 최준(1884~1970)에 이르러 마감한다. 나라가 망하는 불우한 시대를 살았던 마지막 최 부자 문파 최준은 망한 나라에서 어떻게 돈을 써야 좋을지를 여러 모로 검토해봤다. 그는 부산에서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돈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그 결과 회사는 어려워지고 부채를 몽땅 자신이 떠안는다. 일제는 여러 벼슬을 제시하며 갖은 방법으로 최준을 유혹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버티면서 해방을 맞았다. 그는 나라가 망한 것이 부족한 교육 때문임을 깊이 깨닫고 300년 묵은 그의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대학(영남대 전신 대구대)을 설립했다. 경주 최 부자는 결코 망하지 않았다. 다만 대학의 주춧돌로 변신했을 뿐이다. 최 부자의 손때 묻은 서적 5000여권이 현재 영남대 도서관 문파문고에 남아 있고, 그가 살던 아흔아홉 칸 집은 이제 새롭게 단장돼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다. 이것이야 말로 재물을 옳게 쓴 표본이 아닐까.경주 최 부자의 이러한 훌륭한 선행의 뿌리는 독특한 ‘가훈’에서 볼 수 있는 ‘의(義)와 중용(中庸)’의 철학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가훈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매우 구체적이어서 실천할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철학이라도 후손들이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고 싶은 벼슬을 참고, 하고 싶은 사치를 참고, 하고 싶은 외입을 참고,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묵묵히 조상의 뜻을 지키며 실천한 후손들의 노력 또한 잊어서는 안 될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