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460개 기업 소유…주식평가액만 13조원 규모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만석꾼의 재운을 타고난 사람.’중화권 사람들이 홍콩의 리카싱(李嘉誠·76)을 일컫는 말이다. 리카싱은 주식 평가액으로만 무려 13조원의 재산을 갖고 있다. 세계 랭킹은 22위(포브스 선정). 그의 이름은 거의 매일 홍콩 언론에 등장한다. 특히 경기 동향에 대해서 그가 던지는 말 한마디는 홍콩 정부나 유수 경제연구소보다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한다. 리카싱은 홍콩이 아시아 최고 물류 허브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세계 최대 항만터미널 사업가가 됐고, 정보기술(IT) 산업이 부상한 지금은 홍콩 최대 통신업체의 주인으로 변신했다. 청콩실업과 허치슨왐포아라는 지주회사를 통해 그가 거느리고 있는 기업은 무려 460개나 되고 이중 10개 상장사의 시가총액은 86조원(6520억 홍콩달러)으로 홍콩 상장 주식 총액의 12%를 차지한다. 홍콩 사람들은 허치슨텔레콤이 만든 통신망과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고, 발전회사 홍콩전등이 생산하는 전기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야경을 매일 밤 감상한다. 리카싱 자금은 홍콩뿐 아니라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파나마운하, 부산 광양항 터미널, 에어캐나다에까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이쯤 되면 거상(巨商)이 아니라 상신(商神)에 가깝다. 동양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재운을 타고 났다는 데 이견을 달지 않겠지만 일제 침략기에 쑥대밭이 된 고향을 등지고 아버지를 따라 홍콩으로 피난 나왔던 열한 살짜리 소년이 동아시아의 상신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리카싱 자신도 “살면서 기회도 점점 많이 생기고 지금은 운이 내 성공의 30~40%를 좌우하지만 창업 초기 성공은 100% 내 노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000만원을 굴려 2000만원을 만드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처음 1000만원을 벌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말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젖먹던 힘을 다해 죽도록 일했다”고 술회한다. 종자돈 1000만원을 만들기 위해 피말리는 노력을 기울였던 리카싱의 인생 역정을 더듬어 보자. 리카싱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중국 대륙 소개 작전을 벌이던 1928년 중국 광둥성 차오저우(潮州)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청조 말기 수재였고 아버지 리윈징(李雲經)은 소학교 교장이었다. 리카싱은 머리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학구열도 높아 다섯 살 때부터 학교 공부를 시작했다. 혼란한 세상에 집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교육자인 아버지 밑에서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은 결과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외지에 나가 장사를 하기도 했지만 이내 실패해서 고향에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 일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았으며, 동양의 전통적인 스승상을 그대로 간직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리카싱이 열한 살 되던 해 세상이 바뀌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리카싱의 아버지인 리윈징은 가족을 이끌고 홍콩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평생 공부만 하던 그에게 난세는 견디기 힘든 지옥이었다. 결국 그는 폐결핵을 얻어 1년여 만에 죽고 말았다. 3명의 동생과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일이 고스란히 장남인 그의 책임으로 돌아왔다. 리카싱은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생업에 뛰어들기 위해서다. 돈이 된다면 뭐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찻집 종업원에서 시작, 외삼촌 가게의 잔심부름, 금은방 가두 판매원 등으로 목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 하루 16~20시간을 쉬지 않고 일했다. 일찍 철이 들 수밖에. 그는 거친 시련이 닥쳐와도 좌절하지 않았고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워가며 장사꾼 기질을 키워 나갔다. 그의 성실함과 장사꾼으로서의 수완은 열네 살 때 취직한 플라스틱 업체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 약관 스무 살에 지배인에 오르는 것으로 입증된다. 스물세 살 되던 1950년에는 5만 홍콩달러(660만원)를 빌려 플라스틱 제조회사 청콩(長江)을 세워 세상에 처음 리카싱 깃발을 날렸다. 이때부터는 승승장구. 리카싱이 플라스틱사업에 손을 댄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였기도 했지만 2차대전 후 질기고 싼 이 신종 재료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카싱은 상황 판단에 능했고, 기회가 오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는 홍콩이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동시에 남태평양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요충지라고 판단, 땅 투자에 본격 뛰어들었다. 홍콩 경제가 본격적으로 도약하기 전에 싼 값에 부동산과 토지를 매점해 나갔다. 1958년에는 부동산개발회사 청콩실업을 세워 본격적으로 부동산 개발 업자로 변신한다. 그는 부동산에서 번 돈으로 1979년 운수회사 허치슨왐포아, 6년 후에는 발전회사 홍콩전등을 차례로 사들인다. 그의 사업은 부동산개발 호텔 증권투자 항만컨테이너 소매 제조 통신 에너지 인프라건설 등 ‘문어발식’으로 뻗어 나갔다. 40대에 그는 이미 홍콩 대표 기업가의 한 사람이 됐다. 리카싱은 거대 계열사를 어떻게 경영해 나갈까. “저는 회의를 열면 딱 45분만 합니다. 곤란한 문제가 있으면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해결책을 제시하고 나한테 그 방법이 최상이라고만 말해주시오’라고. 나는 사령관이지 총 쏘고 대포 쏘는 데는 소질이 없습니다.” 근면 성실하고 시류를 철저히 분석하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게 자타가 공인하는 리카싱의 성공 비결이다. 근면함과 추진력은 그의 천성이었고, 앞서가는 시세 판단은 타고난 머리와 노력의 합작품이다. 리카싱은 열두 살 이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지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중고교 교과 과정을 혼자 공부했다. 지금도 매일 한 시간씩 영어 뉴스를 듣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카싱은 자신의 공부 방법에 대해 “헌책을 구해 읽고, 다 읽은 후에는 그걸 팔아 또 다른 중고책을 샀다”고 말한다. 리카싱은 또 한 가지 중요한 노력을 했는데, 바로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었다. 그는 신용을 중요시하고, 특히 사업 파트너에게 신용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상대에게 돈을 벌게 해주는 것이라는 신조를 갖고 있다. 1970년대 홍콩 철도공사의 대형 건축 부지를 매입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유로 “철도공사가 현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리카싱은 제2의 고향 홍콩에서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개인의 부가 홍콩 경제권 전체를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적지 않은 게 현실. 리카싱은 일본의 침략과 공산 혁명을 겪은 후 대륙을 탈출한 많은 화교들이 그렇듯이 홍콩도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으며, 다른 많은 홍콩의 권세가나 부호들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싱가포르 국적을 취득했다. 이 사실이 홍콩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1997년 장남 빅터가 대륙 마피아단에 납치돼 수백만달러의 몸값을 요구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도 리카싱을 동정하기보다는 그가 이 사실을 홍콩 당국에 알리지 않고 자기 인맥을 이용해 마피아와 직접 협상하고 아들을 돌려받았다고 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리카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홍콩에 대해 야심(野心)은 없고 애심(愛心)만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하지만 리카싱은 사실 타고난 장사꾼답게 중국 및 홍콩 정부와 관계가 불편해질 만한 일은 절대 만들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중국 고위 공산당원들과도 탄탄한 인맥을 쌓아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때문에 빅터 납치 사건이 있던 그해 허치슨왐포아가 파나마운하의 일부 권리를 최장 50년간 임대 형식으로 취득하자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관문을 장악하려 한다”고 강력히 반대하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그에게는 빅터 말고 리처드라는 아들이 있다. 이 둘은 모두 캐나다 국적을 갖고 있으며 현재 각각 청콩그룹 부회장과 통신회사 PCCW 대표를 맡고 있다. 현재 리카싱은 경영 일선에선 거의 손을 뗐다. 환갑을 넘기면서부터 그가 몰두하고 있는 일은 교육 자선 사업이다. 그는 어린 시절 새벽에 깨어나면 언제나 호롱불을 켜놓고 책상에 앉아 제자들의 숙제를 고쳐주고 있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평생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았으며 일생을 통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도 부친으로 알려져 있다. 교육 자선 사업을 주로 하는 리카싱재단은 이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리카싱재단은 리카싱의 개인 재산을 바탕으로 1980년 출범해 지금까지 1조원 이상을 사회에 기부했으며, 이 돈 중 90%가 교육과 의료 사업에 절반씩 투입됐다. 이 재단은 1981년 중국 대륙 산토우에 산토우 대학, 2000년에 상하이에 청콩경영대학원을 만들었다. 리카싱은 최근 홍콩에서 또 한 번 뉴스메이커가 됐다. 홍콩 최고 국립 명문인 홍콩대학 의대가 10억 홍콩달러(1300억원)를 기부받고, 리카싱 의대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기 때문이다. 홍콩 의대는 “돈을 받고 이름을 판다”며 반발하는 졸업생들의 연좌 농성에도 불구하고 자체 결의로 개명을 강행했는데, 리카싱은 이 같은 반대 여론을 잘 알면서도 ‘리카싱 의대’라는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홍콩대 측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내가 개명을 막지 않는 이유는 공명심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홍콩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리카싱재단의 기부 중 80%가 무기명으로 이뤄졌고 지금까지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권력자나 홍콩 여론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무리수를 둔 것이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리카싱은 미국 버클리대 의대에도 3억 홍콩달러를 기부하고 ‘리카싱생명공학센터’를 짓기로 했고 지난 1월에는 프랑스 정부가 주는 레종 드뇌르 훈장도 받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중국 베이징대, 홍콩대, 홍콩과기대, 홍콩중문대, 캐나다 캘거리대학 등에서 받은 명예 박사학위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의 설움을 달래주고 있다고나 할까. ☞ 리카싱의 재산규모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