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독락당·옥산서원

무심한 시간과 공간아침부터 훅훅 찐다. 여름은 더워야 제 맛이라지만 금년은 유난하다. 시원한 계곡 폭포수 아래 두 발 담그고 잘 익은 수박이라도 한 입 베어 물면 좋으련만 사는 것이 마음 같지 않다. 그저 선풍기 바람에 마음을 달래고 당시(唐詩) 한 수 읽어본다. 이백(李白)의 시 ‘하일산중(夏日山中)’ 가운데 “날 더워 부채 부치기도 귀찮아 숲 속에 들어가 벌거숭이나 될까 보다(娜搖白羽扇 裸袒靑林中)”라는 구절을 읊으면 좀 시원해지려나. 그래도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어 엊그제 입추가 지나고 여름내 무성하게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한결 수그러들었다. 회나무 그늘 아래 게으른 풍경이 낮잠을 잔다. 날은 더운데 시간은 잘도 간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찾아가던 날은 폭염에 열대야까지 겹쳐 여러 날 잠을 설친 끝이었다. 삼복더위와 피서 인파에 떠밀려 새벽 일찍 서둘러 길을 떠났다. 반도 강산이 녹음으로 우거졌다. 온통 녹색바다다.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한 옥산서원을 처음 찾은 것은 대학원을 마치고 들어간 군 복무 시절, 영천 육군 3사관학교에서 단기장교가 되기 위한 생도 훈련을 끝내고 전방으로 떠나기 전이었다. 몸은 군기가 바짝 든 초짜 군인이었지만,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화가(畵家)인지라 옥산서원 답사가 더없이 반가웠다. 서원 앞 계곡에 걸쳐 놓은 외나무다리 위에서 전우들과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내 마음을 앗는 것은 따로 있었다. 멀리 서원 외곽에 둘러친 아름드리 향나무와 어우러진 서원의 용마루 지붕 선. 그런 서원을 감싸고 있는 반듯한 뒷동산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해 늦가을 서원 앞 세심대 계곡으로 낙엽 수북이 내려 물빛이 빨갛게 물들었다. 젊음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풋내기 예술가가 보기에도 옥산서원은 참 아름다웠다. 제대를 하고 다시 세월이 가고, 넓은 세상 큰 삶을 경험하고, 다시 찾은 옥산서원은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고 역사의 뒤안길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옥산서원, 사각형 반듯한 여백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고 배향하는 서원이다. 이언적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된 이른바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이다. 회재는 홍문관 교리, 직제학, 이조·예조·형조판서, 경상도 관찰사 좌찬성 등을 역임했으며,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옥산서원은 회재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배향하는 사액서원으로 1572년 임진란에도 병화를 면했고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 중 하나다. 서원은 화개산(華蓋山)을 주산으로 하여 수려한 풍광을 보여주는 자계(紫溪)와 주변의 울창한 수목이 빼어난 경관을 이룬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서원 앞 계곡물은 폭포를 이루어 소리를 내며 용소(龍沼)를 이루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원을 감돌아 흘러 나간다. 그 옛날 유생들이 심신을 깨끗이 씻고 자연을 관조하며 학문을 연마하라는 의미로 계곡 너럭바위에 ‘세심대(洗心臺)’라 각자(刻字)를 하였다. 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으로 들어서면 앞으로 작은 시내물이 흐르는데, 이는 서원의 명당수로서 계곡에서 일부러 물줄기를 끌어들여 만든 풍수의 한 전형이다. 서원의 누마루인 무변루의 당호는 무변풍월(無邊風月)에서 따온 것으로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층 누마루에 서면 서원 앞 처마 사이로 강당과 마당이 시원하게 보이고, 서원 밖으로는 계곡과 앞산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무변루 아래를 지나 돌계단을 딛고 오르면 강당인 구인당(求仁堂)과 문필을 닮은 뒷동산의 어우러짐이 돋보인다. 구인당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사뿐히 들어올려진 추녀의 선이 특히 아름답다. 구인당 좌우로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齋)가 있으며, 마당 가운데 관솔불을 피워 서원을 밝히던 정료대(庭燎臺)가 당당히 서 있다. 강당 전면에 있는 ‘玉山書院’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노년 글씨로 추사의 한예(漢隸)풍의 호방하고 회화적인 풍모와는 전혀 다른 사대부의 강직한 기개가 돋보이는 굳세고 정갈한 기름기 하나 없는 해서체로 쓰여 있다. 한낮 햇살이 눈부시게 서원 안마당에 내려앉아 사각형 반듯한 여백을 만든다. 무심한 시간과 공간이 말없이 교차된다.獨樂堂, 작지만 아름다운 서재독락당(獨樂堂)은 옥산서원 위쪽에 위치한 회재의 독서공간이자 사랑채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독락당은 회재가 1531년 사간(司諫)으로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1481~1532)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된 후 낙향하여 이곳 옥산으로 들어와 1532년부터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했던 집이다. 독락당은 솟을대문을 지나 안채와 사랑채로 통하는 중문을 거쳐 다시 작은 문을 직각으로 돌아 들어가야 그 면모를 볼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숨겨진 공간이다. 기단을 낮게 깔아 거의 마당과 비슷한 높이로 낮추어 지은 까닭에 자연보다 우월한 듯한 권위를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자연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고 생활하는 은자(隱者), 아니 참 선비의 삶을 짐작케 하는 공간이다. ‘독락’이라 함은 성리학을 연구하며 천진(天眞) 본체(本體)를 홀로 즐긴다는 의미로, 회재가 이곳에서 자연을 관조하며 학문을 연마한 인지자(仁智者)적 여유로움을 읽을 수 있다. 독락당 뒤 개울을 끼고 자리하고 있는 계정(溪亭)은 독락당과는 또 다른 담백한 풍모를 연출한다. 계정은 방 한 칸에 마루 두 칸을 들인 공간으로 계곡을 향해 쪽마루를 덧대 계자난간을 두른 작은 집이다. 일어서면 머리가 닿을 것만 같은 낮은 천장과 낮은 처마를 한 아담한 규모지만 건물의 구성이 보여주는 질박한 활달함과 여유가 찾은 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시원한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날 즈음, 계정 마루에 앉아 장마 지나 물 깊어야 겨우 두어 자 깊이나 될까 한 시내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살찐 물고기 바라보며 바쁜 세상사 시름 잊고 싶다.계정 앞 계곡에는 물놀이 온 어른들과 아이들이 소리치며 깔깔댄다.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금세 천진해진 웃음소리가 계곡에 가득하다. 청나라 서도가인 등석여(鄧石如·1743~1805)의 전서첩 가운데 ‘소나기 지난 뒤 매미소리 들리고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雨過蟬聲 風來華氣)’더니 소나기 뿌리고 거짓말처럼 자연은 다시 맑은 햇살을 흩뿌린다.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는지 8월도 벌써 중순, 마음은 이미 추석에 가 있다. 동산에 보름달 오르고 계정에서 낭낭히 글 읽던 선비님들 지금 모두 어디 계신가. 십년 뒤 백년 뒤 나는 어디로 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며 다시 일상으로 한 발짝 깊숙이 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