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커타 카네기’…1년만에 재산 250억달러로 불린 억만장자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과 가치투자의 대명사인 워런 버핏은 각각 세계 1,2위의 부자다. 그렇다면 세계 3위의 부자는 누구일까. 의외로 미국이나 유럽 혹은 일본 출신이 아니다. 바로 인도 출신으로 세계 최대 철강업체인 미탈스틸을 이끌고 있는 라크시미 미탈(54)이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갑작스럽게 벼락부자가 됐기 때문이다.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그는 2003년 미 경제잡지 포브스 집계에서 세계 62위 부자였다. 하지만 단 1년 만에 재산이 250억달러로 불어나면서 순위가 무려 59계단이나 뛰어올랐다. 이처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 부자는 많지 않기 때문에 그의 약진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미탈이 처음부터 부자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인도 북부의 라자스탄주로 사막과 같이 척박한 땅이다. 1960년대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 세계를 무대로 철강이란 전통 산업분야에서 경이적인 부를 일궈냈다. 성장의 비결은 무엇일까.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 기업 구조조정이 한창일 때 “나에게 쓰레기는 남에게도 쓰레기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우량 계열사를 팔아야지 나에게 쓰레기인 부실 계열사는 남에게 팔리지도 않고 팔 수도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바로 미탈의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미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쓰레기를 ‘보물’로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에게 미국 철강업체 ISG를 판 윌버 로스는 “그의 타이밍은 흠잡을 데가 없다”며 “그는 모든 사람들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업체를 인수해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고 말했다.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를 본떠 ‘캘커타의 카네기’로 불리는 미탈은 척박한 라자스탄주를 떠나 가족과 함께 캘커타로 이주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캘커타 재비에르대 경영학과를 다녔다. 오전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영세 전기로 업체의 일을 도왔다.운명을 바꾼 뜻밖의 사건그의 운명을 바꾼 건 뜻밖의 사건이다. 당시 인도 정부는 국영 철강회사와 민영회사 각각 한곳에 사실상 철강산업에 대한 독점권을 줬다. 미탈의 아버지는 이런 규제정책 탓에 인도에서 성장하기 어렵다고 판단, 미탈을 인도네시아로 보냈다. 25살의 미탈은 인도네시아에서 부도가 난 소형 철강업체를 인수해 수익성 있는 회사로 변모시켰다. 동유럽 이민자나 흑인노동자 등 저임금 노동자를 활용, 회사의 가치를 높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소형 철강업체에 시련을 준 인도 정부의 정책이 거대 다국적 철강회사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된 셈이다.미탈은 인도네시아 회사를 발판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한다. 원료 조달 문제로 애를 먹던 미탈이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또 한번의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고 그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1983년에 대체원료인 DRI(Direct Reduction Iron)에 주목했다. DRI는 가스를 이용해 고체 상태의 철광석을 직접 환원, 철원을 만들게 해준다. 이 원료를 찾아 나선 미탈은 카리브해의 섬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철강회사 이스콧(ISCOTT)을 알게 됐고, 이 회사로부터 안정적으로 원료를 공급받게 된다. 미탈은 특히 트리니다드 토바고 정부가 가동률이 30%에 불과하던 이스콧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외국 회사에 매각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알고 좋은 조건을 제시해 인수에 성공했다. 그는 적자를 내던 이 회사를 1년 만에 흑자 전환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시카르트철강을 인수해 1년 만에 흑자로 바꿔놓았다. 이쯤 되니 ‘턴어라운드(실적호전) 전문가’란 명성이 쌓일 수밖에.미탈은 여세를 몰아 캐나다의 시드벡과 독일의 함부르크제철소를 잇따라 인수했고, 체코 카자흐스탄 폴란드 루마니아 등 동구권 국가에까지 진출해 턴어라운드 성공 신화를 일궈나갔다. 그가 부실기업 턴어라운드의 귀재가 된 것은 인수 대상 회사를 선정할 때 ‘2년 이내에 수익을 내지 못하는 회사는 인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철강회사들은 왜 이런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을까. 그는 여타 외국 철강업체와는 완전히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다. 외국 업체들 눈에는 설비가 낙후됐고 비효율적인 동구권 철강회사들이 매력적으로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미탈은 자신 있게 이들을 선택했다. 그는 최첨단 철강 기술을 고집하지 않았다. 대신 낙후돼 있지만 현재 설비를 잘 보수하고, 중급 수준의 기술만 확보해주면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철강 내수 수요를 충당해 수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했다. 이 예상은 적중했다. 특히 동구권 업체는 효율성만 잘 확보하면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기 때문에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남들이 버린 쓰레기더미에서 경쟁자 없는 거대한 시장인 ‘블루오션’을 찾아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그렇다고 그가 자기 돈만으로 회사를 인수한 것도 아니다. 그는 기업을 인수할 때 외부 자금을 최대한 활용했다. 당사국 정부로 하여금 일정부문 채무를 떠안도록 한 데다 국제기구로부터 자금도 지원받았다. 동구권 국가들의 경우 열악한 사회 인프라를 확충해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철강분야 투자에서 국제기구의 자금 지원을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운영자금을 즉각 투입하고 과감한 감원 등 구조조정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설비투자를 통해 생산 효율성을 극대화시켰다.통상 철강업체들에 생산량이란 개념은 수익보다 훨씬 중요했다. 하지만 미탈은 철저하게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했다. 제 값을 받지 못하면 생산량을 줄여버리라고 과감하게 지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그의 소신 때문에 가능했다. 이 같은 경영 방침으로 미탈스틸은 26%라는 높은 세전 순이익률을 내고 있다. 미국 철강회사 중 가장 수익성이 좋은 뉴코어도 15% 수준이고, 미탈에 이어 세계 2위 철강업체인 아셀러는 9%에 불과하다.이와 함께 미탈은 광활한 인도 대륙의 수준 높은 인적 자원을 잘 활용했다. 철강 분야에 경험이 있는 인도 출신의 우수한 인력을 고액연봉을 제시하면서 대거 채용했다. 이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미탈스틸 계열사에 파견됐다. 전 세계에 자회사가 퍼져 있지만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했던 것은 인도 출신 전문인력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란 평가다.초호화 결혼식에 좌파세력들 시위미탈은 현장주의도 강조한다. 1년에 자가용 비행기로 35만마일을 날아다닐 정도다. ‘미탈에게 가장 좋은 휴식은 제철소 방문’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는 현장의 세부 사항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이 최선의 경영이라고 믿고 있다.이처럼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현대판 철강왕으로 불리게 됐지만 미탈의 개인 생활은 ‘원조 철강왕’ 카네기와는 딴판이다. 막대한 재산을 자선사업에 썼던 카네기와 달리 미탈은 초호화판 생활과 화끈한 씀씀이로 유명하다. 그는 ‘영국의 타지마할’로 불리는 켄싱턴 집을 1억2000만달러에 사들였다. 이 집은 영국에서 왕궁을 제외하고는 민간 주택 가운데 가장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다.지난 1998년 미탈의 장남인 아디트야의 결혼식은 무려 4일간이나 캘커타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초호화 결혼식 탓에 인도 좌파 인사들이 시위까지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굴복할 미탈이 아니다. 작년 미탈의 딸 배니샤의 결혼식이 열렸는데 이번에는 아들 결혼식보다 더 화려하게 치렀다. 총 6000만달러를 쓴 것으로 전해졌는데 베르사유 궁전을 통째로 빌려 1500명의 하객과 함께 최고급 파티를 벌였다. 호주 팝스타인 킬리 미노구를 초청, 공연도 가졌다. 너무 사치스럽지 않느냐는 비판에 대해 미탈은 “우리 모두가 즐긴 아주 좋은 결혼식이었다”며 문제될 게 없다는 반응이다.현재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미탈은 토니 블레어 총리와의 각별한 관계로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은 적도 있다. 그는 블레어의 노동당에 2001년에만 23만달러를 기부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마침 미탈이 루마니아 철강회사를 인수할 때 블레어가 루마니아의 EU 가입을 도와주겠다는 편지를 보내고, 영국 정부는 4700만달러의 은행 대출을 루마니아에 약속해 정경유착이 아니냐는 비판 여론이 일기도 했다.이런 잡음이 있었지만 미탈이 지금까지 큰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의 과제도 만만치 않다. 미국 ISG를 인수해 세계 최대 철강사가 되면서 이제 제3세계의 중저가 철강 시장이 아닌 까다로운 미국 고객을 대상으로 한 고가 시장에도 진출하게 됐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영을 통해 고급 소비자들의 입맛을 맞춰야 하는 과제가 생긴 것이다. 또 2004년 철강 가격 급등으로 톡톡히 재미를 봤지만 최근에는 철강 수요 감소로 가격이 떨어지는 등 외부 여건이 악화되고 있는 건 문제다.중국진출은 여전히 도전할 과제미탈은 1900년대 자동차산업과 마찬가지로 2000년대 철강산업도 ‘빅3’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세계화 전략의 정점으로 중국을 노리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공을 들였지만 정부 규제정책으로 몇몇 회사의 지분 일부만 인수했을 뿐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시장이 완전히 개방될 때까지 인내를 갖고 기다리겠다는 입장이지만 중국 진출은 여전히 도전할 과제로 남아 있다.미탈스틸의 성장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미탈의 열정은 대단하다. 그는 “내가 이 자리에 적합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회사에 가치를 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이 자리에 머물겠다”며 “나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2004년 미탈스틸의 지역별 생산량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