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시대의 부자는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자의 부(富)자를 파자하면 ‘한(一) 사람이 밭(田)을 모두 갖고(口) 관을 쓴( ) 모습’이라 한다. 그러나 일찍이 여불위가 터득한 바와 같이 농사를 지으면 10배의 이익을 가져오지만 장사를 하면 100배의 이익이 있어 더 큰 부자가 된다. 괴테는 이러한 상인을 ‘신성한 존재’라고 칭송했고 상거래는 사람들에게 풍요와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중농주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인 또는 부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것은 오랜 종교적 선입관과 함께 상거래나 부자가 지닌 독특한 특성 때문인 듯하다.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자본주의 사회는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부자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존경한다. 부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해 주며, 세금을 많이 내고, 보통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지역사회의 학교나 교회·문화시설 등에 기부를 많이 한다. 미국에도 물론 악덕 기업인이나 지탄받는 부자는 있다. 아무리 부자라도 범법자인 경우는 철저하게 법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법을 어기지 않은 부자는 무조건 존경받는다.자본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턴가 부자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졌다. 이러한 반 부자 정서의 뿌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농경사회 초기에는 육체가 허약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이 주로 상업에 종사한 탓에 그들을 깔보았다는 설도 있으며, ‘상(商)나라 사람’과 같이 패망한 국가의 유랑민들이 상업에 종사한 까닭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일찍이 지중해의 상권을 잡은 페니키아인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상품의 원산지를 밝히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상품에 대해서 비밀, 허풍, 거짓말이 많고 도량형을 속이는 예가 많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요즘 와서는 원산지를 밝히는 것이 의무화했지만 아직도 원산지를 속이는 사례는 많다. 수입소를 한우로 속이고 중국산 농산물을 국산 농산물로 둔갑시키는 사례가 여전하며 수많은 명품 ‘짝퉁’이 쏟아져 나오고 저울과 자를 정확히 보지 않으면 부자(父子)간에도 속기 일쑤다. 따라서 고대 중국에서는 제왕이 지방을 순시하면 먼저 도량형을 바르게 했고,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도 부정한 자나 저울을 이용한 거래에 대해서는 엄한 벌이 적용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농경사회에서는 상인을 더 천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특성 때문에 ‘장돌뱅이’라 불렀고, 조상이 불확실하고 신뢰성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때 가난이 선으로 인식성경에서도 인간의 물질적 탐심을 엄격하게 경계하며 부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가난하게 살더라도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살면 영생의 천국이 보장된다고 제시함으로써 수많은 민중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누가복음(16:19)에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로 부자를 비난한다. “나사로는 비록 거지였지만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해 나갔고, 부자는 살았을 때 이 땅에 소망을 두었고 욕심을 가졌으며 악하게 살았기에 결국 거지는 천사들의 손에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음부에 내려가 세세토록 고통을 당하게 됐다.”이와 같이 초기의 기독교에서는 부자를 싫어했다. 재화의 결핍상태, 부(富)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가난’은 기독교적 의미에서 은유적으로 ‘온유·겸비·청결’한 상태를 말하며, 불교에서도 ‘무(無), 공(空)·비유(非有)·결여(缺如)·무욕(無慾)’의 경지를 말하기도 해 ‘가난’을 ‘선(善)’으로 인식한 것은 비슷했다.이러한 사상은 만족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인 ‘정신적 만족’을 선택하는 방법인 것이다. 종교에서는 물질로서 채울 수 없는 만족의 영역을 제시하며 가난한 대중들을 위로하고 사후의 파라다이스를 제시해 가난하면서도 착하게 사는 서민생활의 당위성을 확보하고 심리적 안정과 만족을 충족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유명한 산상보훈의 설교(마태복음 5:3)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했고, 구약에서도 사회적 가난과 물리적 궁핍이 권력자나 부자들의 착취와 폭정에 의해 생기고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가난의 원인을 부른다고 인식해 그런 자들은 심판의 대상(아모스 5:11, 이사야 5:8, 예레미야 5:27)이었으며, 특히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는 ‘가난한 자’나 ‘억압받는 자’는 축복받을 의인으로 지칭됐다. 오죽했으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누가복음 18:25)”고 까지 극언했을까. 특히 기독교에서는 자본에 의해 이자가 번식되는 것을 무엇보다 금기시했다. 출애굽기(22:25)에,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돈을 꾸어 주거든 너는 그에게 고리대금업자처럼 하지 말라”고 했으며, 325년 최초의 종교회의였던 니케아공의회는 성직자들의 대부를 금지했고, 850년에는 평민 금전 대부업자들을 파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풍조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다. 유대인은 이러한 기독교 교회법의 제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기독교에서 금기시하고 기피하던 고리대금업 등으로 돈을 벌 수 있었고 이것이 유대인을 싫어하고 배척하는 하나의 이유가 됐다. 13세기 경부터 자본가들은 기독교의 ‘부자금기윤리’를 회피하기 위해 출자자의 이름을 숨긴 익명의 조합을 만들었고, 모험기업(Venture:오늘날 벤처의 모태)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면서 교회에 헌금하는 것으로 용서를 받았다. 그 후 무한책임의 채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한책임회사를 만들었고, 이 제도가 발전하여 오늘날의 주식회사가 됐다. 또 하나의 주장은 ‘사회주의적 환상’때문이라는 설이다.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해 잉여생산의 생산요소별 배분에 모순이 생겨 결국 노동자의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게 되며,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이상적인 공산사회를 이룬다는 마르크스의 가설이 부자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사상은 100여년 동안의 실험을 통해 실패한 가설로 결론났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문제점이 없지는 않지만 인간의 기본적 본성에 더욱 부합하기 때문에 약간의 문제점은 사회윤리로서 수정되고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투명경영이 자본주의의 힘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자본주의는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다. 그런데 부자는 무엇 때문에 여론과 노동자를 두려워하는가. 나는 부자나 경영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에서 든 여러 가지 사례를 묻곤 한다. 상품의 원산지나 도량형을 속이지는 않았는지, 불량상품을 팔지는 않았는지,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법을 위반하지는 않았는지, 탈세를 하지는 않았는지, 남을 고통에 밀어 넣으며 돈을 벌지는 않았는지….무조건적 反부자정서 사라져야만약 이러한 사실이 없다면 부자가 두려워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누구도 부자를 비난할 권리가 없다. 부자는 남다른 근면과 용기, 그리고 아이디어로 남들보다 더 노력해 얻은 열매의 소유자이기에 그들이 이룩한 성과를 그들이 누리는 건 당연하다. 설사 행운의 여신에 의해 선택된 복권 당첨자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부러워할지언정 시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행운은 누구에게 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부자들은 스스로 부의 축적 과정을 떳떳이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소위 ‘투명경영’ 혹은 ‘윤리경영’이라 부른다. 물론 그들이 어렵게 개발한 노하우를 공개해 초과이익의 원천까지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을 위해서 최소한의 회계공시제도를 만들어 뒀다. 인터넷의 발달은 보통사람의 정보력과 투시력을 더욱 높여놓았다. 이제는 웬만한 장벽이나 가리개는 모두 뚫어보거나 엿볼 수 있게 됐다. 또 그가 본 사실은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빛의 속도로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최근의 X파일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비밀이 얼마나 유지되기 힘든 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권은 신성시 되고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정당한 거래에 의한 소유권 만이 그래야 한다. 어렵게 이룬 부자들의 승리를 아낌없이 축하하며 존경하는 풍토를 이루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식의 무조건적인 반 부자 정서는 사라져서 한 단계 더 성숙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