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진단 불황터널 빠져나온 미술시장 ① 프롤로그
세계 미술시장이 호황을 구가하는 가운데 국내 미술계도 10여년의 긴 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와 이제 새로운 꿈틀거림을 보이고 있다. 개인 소장가나 기업의 미술품 투자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형성돼 가는 분위기 속에서 미술계 흐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미술시장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파악은 필수적이다. IMF 이후 깊은 불황을 체험했던 국내 미술계와 달리 지난 7,8년 간 서구 미술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해 왔으며 그 열기는 지금도 식을 줄 모른다. 2001년 뉴욕에서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그 여파로 미술시장의 경기가 가라앉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잠시 있었으나, 미술시장은 아직까지 거침없는 팽창을 계속해 오고 있다. 모든 정보가 노출되며 공유될 수 있는 오늘의 환경 속에서 이제 미술품 수집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글로벌한 시각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며 안전할 것이다. 서구 미술시장의 지속되는 호황과 현재 불황 탈출 길목에 선 국내 미술시장의 상황적 접점은 진지한 미술품 수집가 뿐만 아니라 새로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초보 컬렉터들에게도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투자환경이라 할 수 있겠다.80년대 말을 전후로 한 일본의 거품경제 붕괴는 한때 일본인이 주요 투자 고객이었던 서구 미술시장 침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당시에 주로 모네, 고흐, 피카소, 마티스 등 서양 근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에 집중하던 일본의 자본이 사라지면서 서구 미술시장은 불황에 들어섰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서구 금융 경기의 호황에 따른 거대 자본의 미술시장 유입으로 미술시장의 경기는 다시 가파른 상승곡선을 타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시장의 과열 속에 작품 값이 갑자기 상승하는 한편 집단 투자가들의 아트 펀드가 유행하는 등 일견 투기의 조짐마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장기 불황 뒤에 찾아온 드라마틱한 경기 회복은 서구 미술시장의 콘텐츠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 왔다. 첫째, 기존 시장이 주로 일본 투자가에 의존한 것이었다면, 새로운 시장의 호황은 훨씬 거대해진 서구의 자기 자본이 이끌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미술품 투자가들의 주요 관심대상이 기존의 근대미술에서 컨템포러리 아트, 즉 동세대 미술로 전환됐다는 점이다. 서구 미술사에서 근대와 동세대 미술을 구분하는 시점을 50년대 말, 60년대 초반으로 보는데 이 시기에 태동한 대표적 경향이었던 미국의 미니멀리즘 미술과 팝아트가 지난 7,8년 간 미술 시장에서 주요 투자 아이템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그 예로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미국관 대표작가이기도 한 유명 팝아티스트 에드 루샤의 경우 100호 정도의 작품이 최근 경매에서 80만달러에 낙찰됨으로써 비슷한 조건의 작품들의 90년대 중반 거래가격에 비해 약 8배의 상승폭을 보였다. 미니멀리즘 미술의 대표작가 도널드 저드의 경우도 90년대 중반 이후 최근까지 주요 조각들이 80만달러에서 200만달러 가까운 가격에 거래돼 미니멀리즘 미술에 대한 수집가들의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독일 신표현주의 미술의 대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80년대 이후 이미 시장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았으나 최근 몇 년 간 수 백만달러를 호가하는 작품들의 판매가 계속 이어지면서 최고의 블루칩 작가 중 한명으로 자리잡았다. 셋째, 엄청난 자본의 유입으로 규모가 거대해진 미술시장은 기존의 블루칩 작가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격의 젊은 현대작가들의 시장 진입을 가져 왔다. 대표적 사례로 영국 현대미술의 신세대 슈퍼스타 작가로 떠오른 데미안 허스트는 아직 40세 미만의 나이에 주요 작품들이 수십 만달러를 호가하는 인기작가가 되었다. 넷째, 시장 아이템의 또 하나의 변화는 사진미술 시장의 눈에 띄는 성장이다. 가장 전통적 매체인 회화의 표현성과 그 한계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타블로 작업으로 부상한 사진은 90년대 후반 서구 미술시장에서 일반적인 회화 작품의 가격을 능가하며 시장에 유행을 몰고 왔다. 안드레아스 거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토마스 루프 등 독일 현대 사진 작가들의 작품은 사진 미술시장을 리드하며 지속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다섯째, 미술시장의 팽창은 자연스레 경매회사의 확장과 아트페어의 시장 장악력 확대를 동반하게 됐다. 기존에는 주로 전문 화상들을 위한 시장이었던 경매에 이젠 화상과 일반 소장가가 거의 같은 비중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아트페어의 숫자와 각 페어에서 일어나는 매출도 지속적인 증가세에 있는데, 특히 개성 있고 참신하며 아직도 값이 싼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아트페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젊은 작가들이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채널이 쉽게 열린 것이다.앞으로 지금까지 올라간 미술품들의 상승폭과 인기 작가들의 목록에는 다소 변화와 부침이 있겠으나 전체적인 시장 규모는 당분간 계속 확장될 전망이다. 지난 몇 년 간 소수의 국내 수집가들은 이미 세계화한 미술시장의 환경을 발빠르게 포착했으며 앞으로는 보다 많은 국내 수집가들이 글로벌 마켓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내 유망작가들의 해외 미술시장 진출 성공 여부는 국내 소장가들의 관심을 더욱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이 해외 미술품 유입 뿐만 아니라 국내 유망작가들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병행함으로써 우리 시장의 건강하고 균형 잡힌 성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국내 작가와 화상들의 보다 치밀한 노력과 공격적인 글로벌 마케팅이 수반되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이제 국내외를 아울러 세계 미술시장은 하나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