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햇살이 엷어졌다. 하늘이 잡힐 듯 투명하다. 쪽빛 가을이다. 여름 내 그토록 씽씽 울어 대던 매미 소리도 시들해 지고 저녁 어둠이 내리면서 귀뚜라미 소리가 함초롬히 들린다. 마당 한가운데 햇살이 오래 머물다 떠난 자리를 아쉬워 하듯 바람이 드나든다. 젖살 보기 좋은 어린 새색시를 닮은 듯 노랗게 통통한 달이 동산에 오르면 뒤란 장독대에서 찌르륵 찌르륵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 더욱 구슬프다. 가을 밤 늦게 집에 와 잠 못 이루다 문득 북송의 문장가 구양수(歐陽修)의 ‘추성부(秋聲賦)’가 생각 나 묵은 책장을 열어본다. “구양수가 밤에 독서하다가 홀연히 서남쪽으로부터 들리는 소리 있어 두렵고 놀라워 동자에게 나아가 살펴보라고 하였더니,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은하수가 하늘에 떠 있으나 사방에 사람소리는 들리지 않고 소리는 단지 숲 속에서 들릴 뿐이라 한다. 아! 이게 바로 가을 소리구나.”이렇게 시작하는 이 글은 글맛 모르던 철부지 이십 대에도 마냥 좋았다. 강산이 두 번 더 변한 이즘에 와서 읽는 맛도 여전히 좋다. 낙엽이 몇 차례 더 내리고 몇 번의 봄이 지나면 더 깊은 가을의 맛을 느낄 수 있을까. 하릴없이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내다본다. 도심의 불빛이 휘황하다. 별빛은 안 보이고 깊고 푸른 밤하늘이 낮게 떠 있다. 태풍 ‘나비’가 동해안에 비바람을 뿌리고 지나간 다음, 변산반도 내소사 가는 길 곰소 줄포엔 아직 가을걷이가 시작되지 않아 들판에 넘실대는 나락들의 풍요로움이 따사로웠다. 노령산맥의 서쪽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이루어진 만경강은 전북평야의 한가운데를 적시며 서해로 흘러든다. 이 강을 건너 김제 땅에 들어서면 끝없이 광활한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호남의 곡창인 김제 만경평야다. 이 고장 사람은 그 평야를 ‘징계 맹경 외애밋들’이라고 부른다. ‘징계 맹경’은 김제 만경을 일컫는 말이고 ‘외애밋들’은 ‘너른들’ 곧 평야를 일컫는 말이다.이 너른 들판 만경강 건너에서 보면 저녁놀이 짙어감에 따라 어느덧 아득한 불빛이 돋아난다. 그 불빛 너머 어둠의 저쪽에는 내소사의 불빛이 숨겨져 있다. 내소사 초입 바닷가의 얕은 산세에서 보기 어려운 바위봉우리 우뚝한 산세가 눈 맛을 시원하게 한다. 능가산내소사(楞伽山來蘇寺)라고 대자로 쓰인 일주문에 들어서니 눈앞으로 펼쳐진 전나무 숲길이 장관이다. 이 내소사 입구 전나무 숲길은 솔바람 소리에 전나무 사이로 내리는 비(松風檜雨), 사월의 신록(四月新綠), 겨울의 눈꽃(冬期白花)으로 표현되는 전나무 숲 삼경(檜林三景)으로 변산 팔경 중 하나에 들 만큼 아름다운 숲길이다. 전나무 숲의 한낮 풍요로운 태양과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는 절을 찾는 나그네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비포장 흙길의 부드러움과 전나무 숲의 울창함에 마음 빼앗긴 채 가다가 마지막 숲길을 벗어나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사찰 경내의 장엄함에 발걸음을 멈춘다. 선경이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능가산의 산세가 기상이 넘친다. 봉래루 앞의 수백 년은 족히 됨직한 느티나무의 고목 등걸 사이로 보이는 기와지붕의 화음이 아름답다. 구름 한 점 없이 높은 쪽빛 가을 하늘 아래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황홀해질 지경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고려 때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 인조11년(1633)에 청민선사(淸敏禪師)가 중건했고 고종 2년(1865) 환해선사(歡海禪師)가 중건했다. 예전에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함께 변산의 4대 명찰로 꼽혔으나 다른 절들은 전란에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내소사만이 남아 있다. 능가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뒤를 둘러싼 경내에는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고려동종(보물 제227호)이 걸린 범종각과 봉래루, 설선당, 요사채 그리고 삼층석탑이 조용히 자리한다.대웅보전은 화려하고 섬세한 쇠서, 날렵한 팔작지붕과 약간의 배흘림기둥 그리고 연꽃을 하나씩 조각한 빗살문이 압권이다. 이 입면조형에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건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1년에 건립됐다. 유교 건축의 영향으로 자연석 그대로의 주초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 집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 성행한 다폿집으로, 공포는 외 3출목 내 5출목으로 복잡하게 짜여 있으며 밖으로 튀어나온 제공의 쇠서들이 겹겹으로 중첩되어 매우 장식적이다. 법당 내부의 제공 뿌리에는 모두 연꽃 봉우리를 새겨, 우물반자를 댄 천장에 가득한 꽃무늬 단청과 더불어 법당 안에 화사함을 뿌린다. 거기에 천장 대들보 양편 우물반자에는 바라, 해금, 아쟁, 퉁소, 나발, 비파, 거문고 등 10종의 악기를 연주하는 형상이 그려져 있어 부처님 계신 천상계의 화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불단 후불벽 뒷면에는 거대한 백의관음보살상(白衣觀音菩薩像)을 그려 건물의 장식적 환상을 더욱 고양시킨다. 이 그림은 강진 무위사(無爲寺) 대웅전 후불벽화인 백의수월관음보살입상과 비견할 만한 수작이다. 무엇보다 내소사 대웅보전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정면 3칸 여덟 짝의 꽃살문. 법당 내부의 것은 화려한 단청으로 장엄을 더했고, 법당 밖의 것은 단청 하지 않은 나무 그대로의 배흘림 백골기둥에 단청하지 않은 꽃살문을 새겨놓았다. 단청만 없다뿐이지, 모란 연꽃 국화 등으로 가득 수놓인 문살은 그대로 화사한 꽃밭 그 자체다. 누각인 봉래루는 자연석 주초에 기둥을 올린 덤벙 주초로 누각을 지지하는 기둥의 높이가 주초의 높이에 맞추어 올렸기 때문에 기둥들의 높낮이가 모두 다른 것이 흥미롭다. 스님들의 생활 공간인 설선당은 지체 있는 사대부집 안채를 보는 듯 규모가 당당하다. 평면의 높낮이를 다양하게 해 공간효율을 극대화한 한옥의 공간조형 구성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내소사의 고려동종은 고려 고종 9년(1222) 청림사 종으로 주조되었으나 청림사가 없어진 후 조선 철종 4년(1853)에 이곳 내소사로 옮겨 왔다. 높이 1.3m 직경 67㎝의 전형적인 고려 후기의 종이다. 맨 위 한국 종 특유의 음통과 용의 모습을 한 종 고리가 있고, 종의 아래위를 두르고 있는 연화문과 연주문(蓮珠紋)이 새겨진 유곽 안에 가로 세로 세 개씩 모두 아홉 개의 종유(鐘乳)가 있다. 여기에 몸통엔 양각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 밖에 내소사에는 조선 태종 15년 (1415) 이씨 부인이 죽은 남편 유근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글 한자 쓰고 절 한 번 하는 일자일배(一字一拜)의 정성으로 써서 공양한 법화경발본사본(法華經拔本寫本) 7권(보물 제278호)이 있다. 방금 쓴 듯 청초한 묵흔에 한자 한 획의 신운이 감도는 자획은 감동을 넘어선다.변산 격포항 채석강에 저녁놀이 내린다. 채석강은 변산 서쪽 끝 격포항 일대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일컫는다. 이곳의 경치가 당 이백이 배 타고 술 마시다가 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졌다는 채석강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변산반도 최서단으로 옛 수운의 근거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 관하의 격포진이 있던 곳이다. 석양의 낙조가 일품이다. 격포 바닷가에서 부는 소금기 밴 낮고 무더운 바람이 반도 내륙으로 불어오고 해안선을 따라 고깃배들이 점점이 떠 있었다. 법성포 칠산 앞바다 조깃배 풍어 노랫가락이 변산 곰소나루까지 들려올 듯 건너 보이는 고창 산마루에 저녁이 온다. 줄포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교정에 펄럭이는 만국기의 명랑한 하늘거림처럼 해안가 키 큰 미루나무 잎사귀들 밝게 춤추고,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들 모습에서 정겹고 흐뭇한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일렁인다. 길고 먼 세월을 거슬러 깊고 아득한 가을이 묻어난다.빈 절에서 해 저물도록 끝없이 졸고 있는데어디서 우수수 소리깨어보니 낙엽만 쌓였네.斜陽空寺裡抱膝打閑眠蕭蕭驚覺了霜葉滿前내소사 선방 철 지난 선객의 참선 화두에 경허(鏡虛) 스님의 선시 한 수가 휙 스쳐 지나간다. 나는 지금 시간 안에 있는가, 시간 밖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