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블루오션 좇는 모험가

세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부자 금기 사상 때문에 부자들은 내놓고 부를 추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십자군전쟁 이후 동양과의 교류가 늘고, 12세기께 동방으로부터 아라비아 숫자가 도입되면서부터 경제는 급격히 성장했다. 그것은 기적과 같은 계산의 혁명 때문이었다.기적의 계산술, 아라비아 숫자회계학자 리틀턴은 십자군전쟁의 부산물로 유럽으로 아라비아 숫자가 도입된 것이 복식부기를 태동시킨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아라비아 숫자가 도입되기 이전에 유럽에서는 멍청한 로마 숫자(Ⅰ, Ⅱ·· Ⅴ·· Ⅹ·· C·· D·· M)를 쓰고 있었다. 로마 숫자는 5단위마다 로마 글자를 바꾸어 쓰고 있다. 1은 Ⅰ로 2는 Ⅰ를 두개를 겹친 Ⅱ로, 5는 Ⅴ로. 여기에다 왼쪽에 Ⅰ를 붙이면 1을 빼서 4가 되고 오른 쪽에 붙이면 1을 더해서 6이 된다. 10은 Ⅹ이고 50은 L, 100은 C, 500은 D, 1000은 M으로 나타냈다. 예를 들어 2469는 [MMCDLⅩⅨ]이 된다. 여기에다 3528을 곱할 일을 생각해 보라. 계산이 엄청나게 어려워 산술전문가가 아닌 보통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회계가 대중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10가지의 숫자(아라비아 숫자는 각의 수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0은 인도에서 도입되었다고 함)만 있으면 어떤 숫자도 나타낼 수 있는 아라비아 숫자는 가히 혁명적 계산기술로서 마치‘주판’에서‘전자계산기’로 바뀐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숫자는 복식부기를 가능케 했고, 그것은 대규모의 상거래를 촉진시켰다.지중해 무역의 허브, 베네치아최근 만조 때 해면이 상승해 침수 피해가 잦자 이탈리아 국가 차원에서‘모세 프로젝트’라는 수중 댐을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베네치아. 1995년 여름, 필자는 조익순 이정호씨 등 한국회계학회 소속 20여 명의 교수와 함께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1494년 최초의 회계책을 쓴 루카 파치올리의 고향을 방문하면서 유럽을 여행했다) 너무나 큰 충격에 빠져 한동안 넋을 잃었던 기억이 있다. 물 위에 뜬 고도, 알프스에서 찍어온 나무를 바다 속 석호 암초에 파일로 박아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건설한 화려한 궁전들…. 십자군전쟁 이후 지중해의 중심 허브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및 피렌체였다. 베네치아는 지중해 동쪽에 치중하면서 시리아· 이집트와 교역하며 향신료, 비단, 면직물 등을 다뤘고, 제노바는 서쪽에 치중하면서 흑해 방면에서 명반(염색 재료), 비단, 설탕을 주로 거래했다. 아드리아 해 안쪽에 위치한 베네치아는 5세기께 중앙아시아에 살던 투르크계의 유목 기마민족인 훈족이 이탈리아를 침략하자 당시의 세력가들이 이들에게 내몰려 건설한 위대한 해상도시(훈족들은 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다. 베네치아는 해적들의 침략을 쉽게 방어하면서도 알프스의 여러 협로를 통해 남부 독일지역과 동방의 터키에 접근할 수 있어서 중개무역에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무역선이 바로 건물 앞에 정박해 거래하고 곧바로 떠날 수 있는 상거래의 천국, 그곳이 베네치아였다. 성 마가(Mark)의 유물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는 대성당 앞의 산마르코 광장은 베네치아의 중심으로 동서양을 잇는 큰 시장이었다. 10세기의 베네치아공화국은 제노바와 함께 동방무역의 허브로서 동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동방의 진귀한 물건이었던 비단, 향료, 소금, 후추, 차, 커피…, 베네치아는 유럽 최고의 도시였으며, 황금과 부가 넘쳐나는 야망의 도시국가였다. 1291년 지브롤터 해협이 발견되고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베네치아는 지중해의 별이었다. 모직물, 유리제품, 가죽제품을 생산하기 전의 베네치아는 무역, 보험, 조선이 핵심 산업이었다. 1380년 제4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에서 베네치아가 승리하고 지중해의 패자가 됐다. 베네치아의 주물공장 근처에 주거지를 제한해‘냄새나는 유대인’이 살게 했다는‘게토(ghetto)’에서 유대인들은 배척과 질시 속에서도 기독교도들이 꺼리는 전당업과 대부업, 고물상, 노예상이나 가축상 등을 하며 이윤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든 뛰어들어‘상업민족’으로 살아남았다. 기록에 의하면 1000년께 이미 상당수의 유대인 무역상들이 중국에 정착했었다. 활짝 열린 마르코 폴로 판타지1300년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는 환상적인 한 권의 책이 출간됐다. 그것은 마르코 폴로가 쓴 ‘세계 경이의 서’라는 제목의 동방견문록이었다. 이 책은 보석상인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동방 여행을 떠난 마르코 폴로가 파미르고원을 거쳐 몽골에 도착해(1274) 쿠빌라이를 알현하고 17년 간 원나라에 살다가 산전수전 다 겪고 돌아온 후(1295) 옥중에서 작가에게 받아 적도록 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종이로 만든 돈을 사용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면서도 호사가나 모험가들에게 동방의 환상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기회만 닿으면 동방으로 가서 당시 인기 상품이었던 비단, 후추, 황금, 차, 소금 등을 거래해 일확천금을 얻고 싶어 했다. 그러나 프랜시스 우드는 논문(1995)에서 마르코 폴로가 만리장성에 관해 전혀 언급이 없는 점이나, 중국 기록에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점 등을 들어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는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으며 이방인들에게 얻어들은 이야기에 상상을 보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방견문록이 진짜든, 허풍이든 간에 야망과 용기를 가진 수많은 개척 상인들은 중국과 인도는 물론‘황금이 나는 땅’이라는 지팡구(일본)에 가고 싶은 열병에 사로잡히게 됐다. 나침반이 발전되고(나침반은 BC 11세기 중국의 주나라에서 만든 지남자가 원조라고 하며, 12세기 말에 유럽으로 전해져 13세기에 이탈리아 사람 조야가 개량해 만들었다고 함) 지동설이 파급됨에 따라 먼 항해에 자신이 붙게 되었고 모험무역은 더욱 활발히 전개됐다. 중국이나 인도 또는 일본에의 환상은 오늘날의 의미로 보면 바로‘블루 오션’이라 할 수 있다. 일단 루트를 발견하고 동방의 물자를 들여오기만 하면 경쟁 없이 독점하며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콜럼부스가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을 6년 간이나 설득해 자금을 마련하고 서쪽으로 용감하게 떠나 인도의 일부라고 믿은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것이 1492년이며,‘검은 황금’이라고 불리던 커피가 베네치아에 들어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스 외르크 바우어는 ‘포르투갈 사람으로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다가마가 1497년 7월부터 1499년 7월까지 2년에 걸친 원정 여행에서 후추 거래로 얻은 이익이 4척의 배 중 2척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액의 60배가 넘었다’고 밝히고 있다. 베네치아의 상인은 동방의 물품을 싣고 온 배 네 척이 차례로 침몰해서 모든 화물이 바다 속에 가라앉는다 해도 다섯 번째 배만 무사히 항구에 들어온다면 수지가 맞았다고 했다. 바다를 지배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했다. 일찍이 항해술이나 나침반을 유럽보다 먼저 발명한 중국은 명나라 때 상업을‘기생적인 것’으로 무시하는 반상업주의적 정책으로 정크선을 불태워버림으로써 세계를 지배할 기회를 유럽에 넘겨주고 말았다.富도 탄생·성장·쇠퇴·사멸‘마르코 폴로 판타지’는 발견의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인도의 고아(1510), 페르시아의 호르무즈(1515), 그의 이름을 딴 마젤란 해협을 지나 1521년 필리핀 제도에 닿은 마젤란은 거기에서 죽는다. 찰스 킨들버거의 ‘경제강대국 흥망사1500~1990’를 보면 국가의 부(富)도 생명 주기를 가지고 있어서 탄생·성장·쇠퇴·사멸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처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 독점적 시장을 확보해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슘페터가 이야기하는 혁신의 원동력은 바로 이러한 독점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이윤의 창출이다. 그러나 일단 부를 이루고 나면‘생산의 영웅’들은‘소비의 영웅’으로 바뀐다. 그들은 이제 안정된 상태에서 주저앉아 위험을 회피하고 사치와 안락을 향유하는 인간의 속성을 예외 없이 따른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지중해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피렌체, 제노바 등)도 영광의 정점에서 향락과 사치와 과소비로 타락의 길을 걸으며 서서히 쇠퇴해 갔다.“그 어떤 나라라도 2~3세대 동안 계속해서 기술혁신의 최첨단에 있을 수는 없다”고 역사적 규칙성을 말한 카드웰의 법칙(Cardwell’s law)은 참으로 음미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