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선비정신의 전통남도에 가을걷이가 한창일 무렵, 안동 들녘은 황금물결로 일렁이고 있었고 사과밭 사과나무에는 여름내 뙤약볕을 이겨낸 탐스러운 사과가 마지막 때깔을 입느라 바빴다. 도산서당을 방문하던 10월 초 어느 날, 때마침 도산별시(陶山別試)가 치러지고 있었다. 도산별시는 퇴계 선생의 높은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중앙에서 도산서원으로 관리를 파견해 시행했던 지방의 과거시험이다. 조선시대의 지방별시를 현대에 재현해 전통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는 행사로 그날 안동유생을 비롯한 전국에서 모여든 유림과 문장가들이 저마다 한시 시제(詩題)를 놓고 평생 익힌 문장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모두들 두루마기와 갓을 갖춰 입고 두툼한 돋보기 너머로 열심히 손을 놀리며 별시답안을 적는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조선 오백년을 지탱해 온 안동 유림들의 올곧은 풍모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퇴계가 서거한 지 어언 오백년이 다 돼가는 데도 안동엔 그의 학문과 덕행을 숭상하고 추모하는 선비정신이 오롯이 살아있다. 옛 정신과 기백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 긴 시간을 이어 공부하고 있는 오늘날 선비들의 모습이 나에겐 새로운 풍경이었다. 道學적 인격체의 전형도산서원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계리에 있다. 서원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1574년(선조 7년) 본래 있던 도산서당 뒤편에 창건돼, 그 이듬해인 1575년 서원 건물이 낙성되고 선조로부터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 퇴계의 위패를 모셨다. 도산서원은 건립 이후 ‘퇴계학파’와 영남유림의 중심역할을 했으며,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이다.퇴계는 조선시대의 사회이념이었던 도학사상을 이론적으로 확고하게 정립함으로써 도학의 철학적 수준에 새로운 지평을 연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석학이다. 동시에 유교전통에서 보면 도학정신을 생활 속에 실천해 인격으로 구현한 ‘정인군자(正人君子)’다. 도학적 인격체의 전형이란 뜻이다. 퇴계는 안동 예안현 온계(溫溪)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막내로 태어나 당시 명망 있는 학자 송재(松齋) 이우(李隅)의 가르침을 받으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 후 청량산을 비롯한 안동 근방의 봉정사 등 고요한 산사를 찾아 독서에 열중했다. 특히 20세 때는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주역 연구에 몰두,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을 얻게 된다. 그는 성균관 유생이던 1533년 33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면서 관직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어 박사(博士), 전적(典籍),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충청도 어사, 성균관 사성(司成) 등의 벼슬에 올랐다. 그가 45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파직당했으나 곧바로 복직됐다. 이 일로 조정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린 퇴계는 이듬해 휴가를 받아 고향땅을 밟았다. 그는 낙동강이 여울지며 돌아가는 청량산 상류 토계(兎溪)의 양지바른 바위 언덕 위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독서에 전념했는데, 그 암자 앞을 지나는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라 이름을 고치고 자신의 호로 삼으며 조정에서 물러날 뜻을 굳혔다고 한다. 벼슬에 나아가 한 시대를 바로잡는 일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과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자신의 역할이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50세 이후 만년기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寒棲庵), 계상서당(溪上書堂),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해 모여든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도산서당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57세(1557) 되던 해 지은 세 칸 기와집이다. 영지산(靈芝山)과 도산(陶山)을 조산으로 하는 서당은 왼쪽으로는 청량산에서 흘러나온 동취병(東翠屛)이, 오른쪽으로는 영취산에서 흘러나온 서취병(西翠屛)이 이를 감싸고 있다. 남으로는 낙동강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이는 조그마한 골짜기에 자리잡았는데, 그리 높거나 크지 않다. 그 골짜기의 형세가 넓고 뛰어나며 치우침 없이 높이 솟아 있어 사방의 산봉우리와 계곡들이 모두 손잡고 절하면서 그 산을 사방으로 둘러 안은 것 같은 형세를 하고 있다. 이렇듯 절경에 도산서당이 지어졌고 그 후 다시 도산서원이 들어서게 됐다. 도산서당을 짓기 전 퇴계는 계상서당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집이 허술해 무너지자 제자들이 수업을 받기 위해 도산에 정사를 세우겠다고 하자 이를 허락하고 자신도 혼자 몇 차례 도산 남쪽에 나가서 서당자리를 정했다. 처음 서당자리를 결정했을 때의 기쁜 심경을 퇴계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비바람 치는 계당 책상조차 못 가릴제 風雨溪堂不庇牀좋은 곳에 옮겨보려 숲 속 두루 찾았네 卜遷求勝遍林岡어찌 알았으랴 백년토록 학문할 땅이 那知百歲藏修地캐고 고기 낚던 그 곁에 있을 줄을 只在平生採釣傍꽃은 나를 맞아 웃으니 정이 깊고 花笑向人情不淺벗 찾는 새소리는 그 뜻이 더욱 길도다 鳥鳴久友意偏長뜰을 옮겨와서 깃들기를 다짐하니 誓移三徑來棲息기쁠 때 꽃다움을 뉘와 함께찾으리오..... 樂處何人共襲芳〈尋改卜書堂地 得於陶山之南 有感而作〉터를 정한 후 퇴계는 도산서당의 경영을 도모해 건축 일은 용수사의 승려 법련에 맡겼다. 그 즈음 조정의 부름을 받아 반 년 남짓 서울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도 그는 설계도인 ‘옥사도자(屋舍圖子)’를 그려 보낼 정도로 서당 건립에 마음을 쏟았다. 그가 60세 되던 동짓달에 암서헌(巖棲軒)과 완락재(玩樂齋) 등 도산서당이 낙성됐다. 터를 잡은 지 5년 만인 퇴계가 61세(1561) 되던 해에 비로소 도산서당의 전부가 완성됐다. 도산서당이 완성된 직후의 동짓달에 그는 ‘陶山記’를 지어 도산서당의 아름다운 경관과 정연한 건물 배치 등을 정겹고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산〔陶山〕남쪽에 땅을 발견하니, 작은 골짜기가 하나 있는데, 앞으로는 강가를 굽어 그윽하고 고요하며 멀리 터져 있을 뿐더러 바위와 숲은 고요하고 빽빽하며 돌샘이 달고 차가우니, 수양할 곳으로 알맞다.” 낙동강 상류 한 줄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도산서당의 터는 골짜기 안에 그윽하게 감추어져 있으면서도 깊고 푸른 강과 녹음 짙은 들로 전망이 탁 트인 절경지다. 그가 찾아다녔던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기암괴석의 웅장한 경치가 결코 아니었다. 마음을 고요하고 청명하게 지킬 수 있는 아담하고 조화로운 운치였다. 학문과 수양을 통한 삶을 자연과 분리시킬 수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자연의 신선함으로 마음을 정화시키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뿜어내는 지혜의 빛으로 자연을 더욱 아름답게 바라보고 비추는 그였기 때문이다.“…堂이 모두 세 간으로 그 중간에 한 간은 玩樂齋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주렴계(朱濂溪)의 「名堂實記」중에 ‘즐겨 완상하여 족히 나의 일생을 마쳐도 싫어하지 않으련다.’ (樂而玩之, 足以終吾身而不厭)라는 말씀을 취한 것이요, 동편 한 간은 巖棲軒이라 이름하였으니, 雲谷(朱子)의 시 속에 ‘오랫동안 자신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에/ 바위에 깃들어서 약간 효과 바라노라.’(自信久未能, 巖棲冀徹效)라는 말씀을 취한 것이며, 합하여 陶山書堂이라 하였다. 舍가 모두 여덟 간인데, 齋의 이름을 時習이요, 寮는 止宿이라 하고, 軒은 觀瀾이라 하여 합하여 농운정사라 하였다. 서당의 동편에 조그마한 네모진 못을 파고는 그 가운데에 연꽃을 심고 淨友塘이라 이름하며, 또 그 동편은 蒙泉 샘이요, 몽천 위 산기슭을 파내어서 암서헌과 마주보게 하여 평평하게 단을 쌓고는 그 위에다 매화·대·솔·국화 등을 심고는 節友社라 이름하고, 서당 앞 드나드는 곳에 싸립문을 달아 幽貞門이라 하고, 문 밖 작은 길이 개울물을 따라 내려가 동구에 이르면 두 멧부리가 서로 마주 대해 있었다. <陶山記>퇴계는 도산서당을 소박한 삼간의 작은 초옥으로 지었지만 ‘堂 · 齋 · 軒’의 기본구조를 갖추었고, 서당의 서쪽 벽에는 서가를 꾸며 1000여 권의 서책을 두었다. 또 화분 하나, 책상 하나, 연적 하나, 지팡이 하나, 침구와 돗자리, 향로, 혼천의를 넣어두는 궤 등을 마련하기도 했다. 마당에는 방당(方塘)의 못과 몽천(蒙泉)의 옹달샘을 배치해 멋스러움을 더했으며, 동쪽 언덕에는 솔 · 대 · 매화 · 국화 등 시련 속에서도 고고한 지조를 지킨다 하여 절개를 상징하는 꽃과 나무를 심어 벗으로 삼았다. 그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고요하면서 단단했지만 포용력을 지녔고, 부드러우면서 화평했지만 엄격했다. 동시에 자연의 그윽한 풍경과 철따라 피는 꽃과 나무에도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일 줄 아는, 시적 세계의 정겨운 운치도 함께 갖고 있었다. 이런 성품을 지닌 그였기에 주변의 동구 밖 산수와 서당 건물이 어우러지도록 하고 서당의 안과 밖이 상응할 수 있게 해 하나의 작은 우주를 완성했다.자연과 인간의 조화자연과 인간이, 자연과 인공의 건물이, 또 자연과 퇴계의 정서가 정겹게 어우러졌던 만큼 적어도 퇴계에게는 도산서당이 하나의 완결된 우주였다. 동시에 그 자신의 인격과 사상적 산실이었다. 이런 곳이었기에 학문을 강론하거나 손님을 맞을 때를 제외하고 그는 혼자 고요히 사색에 침잠하곤 했다. 퇴계는 도산서당의 완락재에서 혼자 잘 때 한밤중에 일어나 창을 열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가, 한 가닥 상념이 자신을 파고들었던 체험을, “달은 밝고 별은 깨끗하며 강산은 텅 비어 있는 듯 적적하여, 천지가 열리기 이전 세계의 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밝힌 적이 있다. 고요한 사색의 생활 속에서 그는 우주의 시원을 경험했던 것이다. 초봄 새벽이면 도산서당 동쪽 언덕 절우사에 한두 송이 매화가 피었을 것이고, 한여름 대낮에는 정우당의 백련이 고고한 자태를 드러냈을 것이다. 늦가을이면 찬서리 맞아가며 함초롬히 피었을 노란 국화 향을 맡았을 것이고, 정월 대한 추위로 아궁이 불길이 드세어 지던 날에는 종일 앞산을 지우며 내린 함박눈에 백색 설화가 절경을 이루었을 것이다. 숭고할 정도로 아름다웠을 자연의 한가운데 한 점 도산서당이 앉아 있던 풍경을 마음으로 그려본다. 그 도산서당에서 학문과 독서로 노년을 보낸 퇴계 선생의 삶도 그려진다. 자신만의 우주에서 세상을 얻었으니 세상 어떤 것도 세상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었을 삶, 이보다 멋진 삶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