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잘 못 읽는 억만장자 즐거움 파는 괴짜 CEO

천성 난독증(難讀症)으로 재무제표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장애인.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 없이 맨손으로 기업을 일으킨 의지의 주인공. 영국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회장(54)은 자수성가(self-made)한 대표적 기업가로 꼽힌다. 그는 역경을 딛고 32억달러(약 3조2000억원)의 재산을 모아 영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가 됐다. 그는 어떻게 이런 부를 일궈냈을까.얘기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된다. 1950년 영국에서 태어난 브랜슨 회장은 어머니로부터 독립심과 도전 의식을 배우면서 자라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네 살 때 집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 혼자 집에 돌아오라고 한 적도 있다. 그가 열두 살 때 80km나 떨어진 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집에 찾아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는 양파를 썰면서 “잘했다 리키, 재미있었니?”라며 태연하게 맞이했다.다섯 살 때 수영을 배운 과정은 그의 도전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족들과 함께 바다에 간 그는 고모가 이틀 안에 수영을 배우면 10실링을 주겠다고 하자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몇 시간을 혼자 헤엄쳤다. 그러나 끝내 수영을 배우는 데 실패하고 만다. 다음 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는 도로 주변의 강을 발견하고는 차를 세워달라고 떼를 썼다. 가족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물속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물살이 셌고 수영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온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진 위기의 순간, 그는 발밑에 돌을 발견했다. 사력을 다해 돌을 박차고 솟구쳤으며 결국 그는 10실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들을 토대로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돌적 성격을 갖게 됐다.학교성적은 늘 최하위권서 맴돌아학창시절 그는 골칫거리 학생이었다. 지능은 정상이지만 글자를 읽거나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장애로 학교 성적은 늘 최하위권이었다. 공부보다는 스포츠에 더 열중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운동을 할 수 없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결국 열여섯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학교 교장은 브랜슨이 백만장자가 되거나 감옥에 갈 것이라고 예언했고 이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까지도….브랜슨은 아주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트리 재배 사업이나 앵무새 기르기 등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그는 학교를 그만둔 뒤부터 사업 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첫 사업은 ‘스튜던트’란 학생 잡지였다. 난독증으로 고통 받았던 그가 선택하기 매우 어려운 분야였지만 그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편집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됐다. 대신 그는 광고와 판매 등을 맡았다. 잡지의 주 내용은 그가 학교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불합리한 관행 등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저항 잡지였던 셈이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수익성 측면에서 이 잡지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그러나 브랜슨은 학생 잡지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잡지 판매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젊은 학생들이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음반을 사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또 음악을 듣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특히 우편으로 주문받아 음반을 싼 값에 판매하면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란 점을 깨우쳤다. 직감이 든 것이다.그는 1971년 동료들과 함께 우편 할인판매를 시작했다. 회사 이름은 처음 사업을 해본다는 뜻에서 ‘버진(virgin)’으로 정했다. 버진그룹의 시초인 버진레코드가 만들어진 것. 초기 사업은 순항했다. 스튜던트에 광고를 내자마자 주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복병이 생겼다. 우체국이 파업을 해 버린 것. 우편 판매 모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브랜슨은 다른 대형 음반 판매업체와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기존 음반판매 업체를 돌아보니 아이디어는 어렵지 않게 나왔다. 기존 업체들은 오로지 음반을 판매할 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슈퍼나 할인점 같은 곳이다. 그러나 고객들은 음악 자체를 즐긴다. 따라서 매장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주면 어떨까. 또 편안한 분위기에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커피’가 아니라 ‘문화’를 판 스타벅스가 나오기 한참 전 브랜슨은 이미 ‘음반’이 아니라 ‘즐거움’을 판다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든 것이다.이런 전략은 크게 성공했다. 버진레코드의 성공을 바탕으로 브랜슨은 스튜디오를 직접 만들어 가수들의 음반도 제작했다. 음반 제작도 남들과 달랐다. 대형 레코드사가 소홀히 했던 무명가수를 적극 발굴해 수백만 장을 판매하는 성과를 내면서 영국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버진은 특히 마이크 올필드나 섹스 피스톨스, 롤링 스톤스 등 유명 가수와 계약해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인터넷·식품·항공 등 사업 다각화그러나 브랜슨은 이런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또 다른 도전에 나서야 직성이 풀린다. 음반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그는 나이트클럽, 영화 배급, 게임 소프트웨어, 호텔에 이어 항공 사업까지 벌이기로 결심한다. 다른 업종보다 특히 항공사 진출을 결정할 때에는 주위의 반대가 엄청났다. 영국에는 세계적 업체인 브리티시항공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실패가 뻔해 보였다. 그렇지만 도전이 인생 모토인 그는 이처럼 무모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브리티시항공 등 기존 항공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출발했다. 달랑 비행기 한 대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버진은 일등석을 없애고 비즈니스 클래스 요금대의 ‘어퍼 클래스’를 선보였다. 이 어퍼 클래스 승객에게 다른 항공사 1등석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기내에서 목욕 이용 안마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게 한 것. 승무원도 가족처럼 친근한 표정으로 고객을 맞이했다. 이런 혁신적 서비스를 통해 버진애틀랜틱항공은 각종 상을 휩쓸며 버진이란 브랜드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또 영국 제2의 항공사로 키워 항공업 진출에 반대했던 모든 사람이 잘못 판단했음을 입증해 보였다.엔터테이너 CEO·히피자본가로 불려이후 브랜슨은 버진이란 브랜드로 무차별적으로 사업을 확대한다. 인터넷, 식품, 금융 등에 이르기까지 계열사는 무려 250개가 넘는다. 그러나 사업 다각화 방식은 우리나라 과거 재벌과는 상당히 다르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회사를 인수하는 게 아니라 버진이란 브랜드 사용권을 주고 경영 전략을 수립해 주는 대신 주식을 제공받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고객에게 즐거움 같은 색다른 가치를 준다는 버진이란 기업의 브랜드와 명성을 팔아 사업을 키워 온 것이다.브랜슨은 어렸을 때 한 항공사 사람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이 된 충고를 들었다. “바보가 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줘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이후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이 교훈을 잊은 적이 없다. 그의 인생 자체도 즐거움이고 경영 철학도 즐거움이다. 그래서 그는 ‘엔터테이너 CEO’ 혹은 ‘히피 자본가’로 불린다. 일례로 브랜슨은 미국의 상징인 코카콜라를 제압하겠다며 뉴욕 한복판에 탱크를 타고 들어가 코카콜라 간판에 대포를 쏘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또 열기구를 타고 세계 일주를 두 번이나 시도했다 실패하자 또 다시 목숨을 걸고 도전하기도 했다. 고공낙하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도 즐긴다. 비즈니스 회의도 격식을 탈피해 술을 마시면서 자유롭게 의견을 내도록 유도하는 등 직장 생활은 즐거워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하고 있다. 브랜슨은 새벽 3시까지 함께 술을 마신 사람이 떠올린 아이디어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노트에 메모하는 철저함도 보여주고 있다.그의 비즈니스 아이디어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최근 우주여행 비즈니스를 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이에 따라 오는 2007년부터 2억원 정도를 내면 4분간 우주공간에서 무중력 상태를 체험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물론 그에게는 어두운 과거도 있다. 교장선생님의 예언대로 탈루 혐의로 한 달여 간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바람을 피워 이혼당한 적도 있다. 망한 사업도 많았고 현재도 매출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회사도 상당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어두운 일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또 이런 경험 때문인지 실패에 대해서도 대단히 관대하다. 그는 “설령 회사 돈을 훔친 사람이라도 꼭 한 번의 기회는 더 줘야 한다. 다시 기회를 주면 놀라울 정도로 충성심 높은 능력 있는 직원이 될 수도 있다. 만약 나도 실패 후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런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다.버진은 ‘즐거운 삶’이란 가치를 파는 회사버진그룹은 잡화상이다. 항공, 음반, 휴대폰, 오토바이 임대, 화장품, 속옷, 신부화장, 헬스클럽, 열기구, 철도, 금융 등 어느 것 하나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이런 기업 확장 전략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라는 전통적 경영 이론과는 완전히 상충된다. 이에 대해 브랜슨은 상당히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버진은 ‘즐거운 삶’이란 가치를 파는 회사입니다. 이런 회사는 우리가 유일합니다. 따라서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고 우리에게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별 돈을 들이지 않고 새 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됐죠. 우리는 브랜드 벤처캐피털 업체가 된 것입니다.” 도전정신과 즐거움을 앞세워 버진의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린 뒤 이 브랜드를 팔아 블루오션을 개척한 브랜슨은 비즈니스에 대한 일반인들의 통념을 깬 개척자로,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리더십을 보여준 경영자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