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Of Heraldry

러피언 스타일의 핵심인 문장(紋章)을 이야기하려면 중세의 기사를 떠올리게 된다. 문장과 기사,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기사(騎士)는 프랑스어로 슈발리에(chevalier), 영어로는 나이트(knight)로 불리며 모험과 로망의 대명사로 음유 시인들에 의해 시로 읊어지고 다양한 장르의 소재로서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오늘날까지도 원탁의 기사로 사랑을 받는 ‘아서왕의 모험’을 꼽을 수 있으리라.로마 제국이 몰락하면서 유럽이 군웅할거의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접어든 즈음 무장을 갖추고 지역을 관장하는 군주들을 따르는 기사의 역할이 커지고 교회는 이 무장 집단에게 크리스티안의 정신을 심어준다. 아마도 이 문화적 유산이 유러피언들과 젠틀맨의 정신에 기초가 됐다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기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길고도 고통스런 수습 기간을 이겨내야만 한다. 귀족 자제로서 일곱 살이 되면 미래 보호자의 성(城)으로 옮겨간다. 그 영주는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의 계율과 군주와 어른들에 대한 예의를 가르쳤으며, 궁전의 의식에 그들을 입회시켰다. 음악과 식사 예절 등 다양한 교양을 바탕으로 길들였다. 그리고는 무력을 연마케 했다. 기사 작위는 보통 스물한 살이 되었을 즈음에 교육이 완전히 끝났다고 인정됐을 때 수여되었다. 특히 커티시(courtesy)라고 불렸던 예의범절을 습득하는 등 기사도를 닦는 데 중점을 뒀다. 기사도의 엄격한 예의범절과 교양은 무장한 자의 힘을 자제하는 데 도움을 줬다. 교육을 받고 있는 같은 성내에는 항상 젊은 처녀들이 모여들었는데 어릴 때부터 그 궁정의 어떤 숙녀를 마음의 연인으로 선택할 것이 권장됐다. 그리고 그의 모든 감정과 말과 행동을 그 연인과 연관시키도록 교육받는데 연인에게 봉사하는 것이 기사의 영광이자 직무였기에 애정과 감사에 넘친 그녀의 미소가 그의 참다운 용기에 대한 보상이었다. 충성과 사랑의 영향은 종교의 영향과 결합되었고, 성직자의 신분에 수반되는 모든 신성(神聖)과 종교적 외경이 부여된 기사의 작위는 가장 위대한 영주들에게 있어서도 동경의 대상이 될 정도로 추앙됐다.기사작위 서임 식장은 매우 장엄했다. 후보자는 엄격한 단식과 수일간 철야 기도를 한 뒤에 철저한 참회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는 성사인 ‘영성체’를 받았다. 그리고는 백색의 옷으로 단장하고 기사의 칼을 목에 걸치고는 교회로 향했다. 식을 집행하는 사제는 그 칼을 손에 들고 축복한 후에 다시 기사 후보자에게 돌려준다. 후보자는 팔짱을 끼고, 사회를 보는 기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제는 기사가 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에 관한 질문을 하고 그에게 선서를 시킨 뒤에 그의 요구를 승낙한다.기사 입단식에 참석한 신입 기사들은 여인들이나 소녀들에게서 황금 박차와 갑옷, 팔찌, 긴 장갑 등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칼을 찼다. 그리고는 사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는데, 그 의식은 “하느님과 성 미카엘, 성 조지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를 기사로 서임하노니 용감하고 예절바르고 충성스러울 지어다”라는 말과 더불어 기사 후보자의 어깨나 목을 칼등으로 세 번 두드리고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투구와 방패, 창을 수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문장을 코트 오브 암(Coat of arms)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기사들의 소속을 식별하기 위해 갑주 위에 기사 각자의 문장이 그려진 코트를 입었기 때문이다. 문장은 또한 방패에 그려진 문자라는 뜻으로 실드 오브 암(Shield of Arms)이라고도 하고 특히 투구 윗부분의 문장은 크레스트(Crest)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다양한 명칭들이 있는 문장은 중세 기사들이 전투에 나갈 때 착용하는 갑주와 얼굴을 감싸는 투구 등에 그려졌는데 이는 갑주와 투구가 몸과 얼굴을 가리기 때문에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였다. 따라서 최초의 문장은 매우 단순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기본 바탕 위에 단순한 무늬 하나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문장은 멀리서도 알아 볼 수 있는 용도였기에 디자인은 도식적이었으며 이것을 구분하기 쉽도록 기하학적 도형 그리고 동물 모형의 머리나 꼬리, 나무의 잎사귀 등의 윤곽은 매우 과장됐다. 문장 위의 의장은 방패 무늬 바탕의 전체를 뒤덮었다. 이러한 규칙은 전투 상황이나 마상(馬上)시합을 고려해 양식화된 것으로 문장의 기본 정신에 따르기 위해서는 이를 만드는 모든 디자이너들이 고수해야 하는 규칙이었다.하지만 세기가 지나며 문장은 더욱더 복잡하고 꽉 찬 구성의 디자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미 앞서 보았듯이 가문의 문장은 갈수록 후손들에 의해 여러 구획으로 나눠져 ‘쿼터링(quartering 4등분 문장)’ 한계에서 또다시 나눠지게 됐다. 이러한 분할에 따라 가족 관계와 조상 관계, 혼인과 여러 개의 봉토나 직위의 소유자임을 표현하기도 했다. 어떤 문장들은 너무나 반복되어 나눠진 결과 알아보기 힘들게 되기도 하였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장대한 4등분 문장(Queen Victoria's grand quarters)은 그 안에서 256번 또다시 4등분 될 수 있다.문장이 가문의 상징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뒤로는 일상생활에 쓰이는 대부분의 물건에 사용됐는데, 이 때문에 12세기 기(旗)에 쓰이던 때보다 크기가 비교적 작아졌다. 판독하기가 더욱 어려워졌음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술적인 효과 또한 감퇴했다. 15세기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문장은 그 스타일이 일반적으로 창의적이기보다 기계적인 느낌이 강했다. 오스트리아와 바바리아, 북 이탈리아의 문장은 바로크적인 느낌이 일반적으로 강하다. 다른 곳의 문장은 가끔 차가우며 품위 없는 느낌도 강한데 이는 이론만을 중시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희생물로서 모든 것을 암호화하고 숫자와 비율, 구성 등을 정확히 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창의력이나 우아함을 위한 조금의 여유도 두지 못한 탓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에는 독일, 스위스, 스칸디나비아의 많은 예술가들이 다시금 중세 시대 문장 원래의 단순함과 힘을 재현하여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한 방패 바탕 위의 사등분 혹은 단순한 두 개의 차지를 함께 새겨 넣은 경우를 제외하고 문장 구성의 또 다른 본질적인 특색은 바로 심도(深度)에 있다. 문장은 여러 개의 층이 겹겹이 서로 위에 표현되어 있는데 맨 아래층부터 읽는 것이 순서다. 사실 대부분의 중세 시대 문장을 이런 방식으로 읽어야 하며 특히 후기 로마네스크 시대의 문장은 더더욱 그러하여 가장 아래 겹을 먼저 본 후 다음은 중간 층,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일 위, 바로 보는 이에게서 가장 가까운 겹을 마지막으로 보며 읽는 것이다.무심코 지나치는 앤티크 속에는 무수한 문장들이 세월의 흔적을 남긴다. 좀 더 멋진 기업의 로고를 만들기 원한다면, 그리고 디자이너라면 문장이 담긴 앤티크를 수집하길 권한다.1 프레 라파엘로 유파의 화가인 에드먼드 블레어 리턴의 유명한 기사 서임식(accolade)이다. 기사는 문장이 그려진 외투를 철미늘 갑옷위에 착용하고 무릎을 꿇는다. 중세 로망스의 진수를 보여준다.2 신성로마제국의 1400년대 소속 공국의 문장들이 쌍두 독수리 날개로 배열됐다.3 웨일즈의 상징인 아서 왕의 동상으로서 검과 사자 문장이 그려진 방패가 돋보인다.4 자수로 그려진 아름다운 모노그램으로 결혼한 두 사람의 이니셜을 결합하고 머리에는 그 가문의 직위에 따라 관을 얹는다.5 깃발을 든 기사가 어느 규수의 집 앞으로 지나는 모습이 그려졌다. 여인은 무훈을 기원하는 뜻으로 하얀 수건을 창끝에 걸어준다.6 18세기 마이센의 티캐디로 주문자인 색슨 공국에서 나폴리 왕가로 시집간 공주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7 영국의 에드워드 7세 대관식 기념 맨틀 클럭이다. 문장이 전체 구도를 이루고 있다.8 독일 프러시아의 왕의 실버 실박스(seal box)로 왕의 상징인 독수리가 그려졌다.9 빅토리아 여왕의 문장을 수놓은 자수 핸드백.10 노르웨이 ‘Royal coat of arms’이 1906년도에 화가에 의해 그려졌다.11 아름다운 골드 모노그램이 장식된 신약성서헤리티지 소사이어티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 아카데미 대표. 앤티크 문화예술기행, 유럽도자기 저자.영국 엡버시 스쿨, 옥스퍼드 튜토리얼 서비스 칼리지 오브 런던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