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최태지

한 시대를 주름잡던 프리마 돈나 발레리나 최태지가 이제는 한국 발레를 이끄는 여성 트로이카 3인방 중 맏언니로, 국립발레단의 수장으로 우뚝 섰다. ‘해설이 있는 발레’라는 신선한 시도를 통해 발레의 부흥과 대중화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낸 그녀. 2009년을 맞아 ‘한국 발레의 세계적 명품화’에 새롭게 도전한다.터뷰를 위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마주한 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화사한 꽃 분홍 재킷을 입고 해사한 웃음을 짓고 있다. 올해 쉰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기품 있고 당당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문화계 거물급 인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후배들을 일일이 챙기는 모습에선 윗사람으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자애로움이 느껴진다. 잘나가는 프리마 돈나에서 지도자로, 그리고 사업가와 행정가로서 다양한 삶을 살아온 지난날들은 지금 그녀의 삶에 커다란 자양분이 되고 있다.발레가 어렵다고? 그러면 해설을 넣자. 발레가 지루하다고? 그러면 짧게 줄이자. 그녀는 간단명료했다. 생각한 걸 실행에 옮겼고, 소위 대박이 났다. 그녀가 처음으로 국립발레단 단장을 맡았을 때 국내 발레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이 사실이다. 외환위기 한파로 공연장마다 관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을 때 매회 매진 기록을 세운 공연도 발레였다. 그 시기에 국립 발레 단원들은 잇따라 해외 콩쿠르를 석권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나라 발레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그녀, 최태지가 있기에 가능했다.그녀가 정동극장장이라는 외유를 마치고 7년 만에 친정인 국립발레단으로 복귀했던 지난해. 취임하자마자 기자회견을 통해 ‘역시 최태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이제 그는 3년이라는 재임 기간 중 3분의 1 지점에 와 있다.“지난해 예술의전당 화재 사건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어요. 덕분에 지방으로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공연했고, 특히 초등학교와 군부대에서의 공연은 성공적이었죠. 올해엔 예술의 전당 재개관과 함께 다양하고도 특별한 발레 공연들을 준비해 놓고 있어요. ‘신데렐라’라는 작품을 통해 모던발레의 진수를 보여주고 2년간 준비한 ‘호동왕자’를 명품 공연으로 올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그녀의 말은 일본식 어투로 인해 어눌했지만, 의미는 분명했으며 포부는 원대했다. 어찌 보면 핸디캡이 될 수 있는 말투를 장점으로 소화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모습에 듣는 사람은 경청하게 되고 설득력은 배가됐다. 그녀가 발레리나라는 예술인에서 성공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에도 그녀의 말에 담긴 순수성과 흡입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눌한 말투를 매력으로 부각시킨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딛고 일어나 오뚝이처럼 살아왔다.재일교포인 그녀는 일본에서는 한국인이어서 차별받고 한국에서는 ‘나라를 버린’ 반쪽 한국인으로 이중 차별 당하는 아픔을 견뎌내야 했다. 그녀의 일본식 이름은 오타니 야스에. 재일조선인으로 크게 성공한 아버지의 지원 아래 발레를 배웠으며 가이타니 무용학교를 수학, 가이타니 발레단 단원이 됐다. 문부성에서 지원하는 장학금으로 해외 유학의 길에 들어서려던 순간, 일본인만 해당된다는 자격 조건은 그녀로 하여금 유학의 꿈을 좌절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일본 국적으로 바꾸지 않고 개인적으로 프랑스로 발레 연수를 떠났고 국립 발레단 초대 단장이었던 임성남 선생의 초청으로 세헤라자데의 주역을 맡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한국에 정착해 국립발레단을 대표하는 주역 발레리나로 성장했고 ‘돈키호테’ ‘해적’ 등 고전 대작 초연 멤버로 국내 무대에 뿌리를 내렸다.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변신한 것이다.“어렸을 때, 어머니가 부엌에서 이미자 노래를 들으며 요리를 하셨던 모습이 아직 생생해요. 부모님이 항상 그리워했던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늘 사명감을 느끼죠. 부모님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고요. 오빠들처럼 귀화했다면 편했겠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과거 이 문제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많이 울기도 했지만 말이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한국 문화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 욕심 없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이토록 발레와 일을 사랑하는 그녀지만 맺고 끊을 땐 누구보다 확실했다. 흔히 발레리나들은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발레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결혼과 일 사이에서 갈등을 많이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위해 발레단에 사표를 던지고 미련 없이 나왔다. 그리고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무려 87kg까지 체중이 불어난 그녀는 문득 발레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개월 만에 47kg으로, 쉽게 말해 반 토막이 됐다.“한다고 하면 하는 성격이어서요. 마음에서 진심으로 원하고 우러나오는 일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좋아하는 일본 속담 중에 ‘똑똑한 새는 손톱을 감춘다’는 말이 있어요. 참고 견디고 있으면 나중에 꽃피울 수 있다는 뜻이죠. 급한 만큼 인내심을 가지는 게 중요하고 무엇보다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그녀는 두 딸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러시아에서 발레리나로 활약 중인 큰딸과 아직 대학생인 작은딸. 특히 발레가 아닌 다른 길을 택한 작은딸은 가끔 그녀에게 어른스러운 말을 해 감동을 주기도 한다.“제가 어떤 일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걸 딸이 보더니 이런 말을 하더군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이것도 지나가리라’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고요. 무릎을 탁 쳤죠.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어요. 모든 것에 집착을 버리고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때 나다운 삶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요. 성공이라는 방향을 정해 놓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씩 착실히 걸어 나가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이제는 ‘애프터 5’ 즉, 일과 후의 시간을 보다 여유롭게 채워나가고 싶다는 최태지 단장.“오로지 발레라는 예술을 위해 살아온 삶이었지만, 이제는 삶을 위한 예술을 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해 내는 것이 이 시기의 한 페이지를 이끌어가는 사람 중 한 명인 저의 사명이겠지요. 그것을 위해선 관심과 후원이 아직도 많이 필요합니다. 앞으로도 내면을 이야기하는 발레단과 작품들을 통해 삶의 기쁨을 선사해 드리고 싶습니다.”국립발레단 수장으로 발레의 대중화와 훌륭한 발레리나와 발레리노 양성, 한 단계 향상된 수준 높은 공연과 한국 발레의 세계화를 위해 정진하는 최태지 예술감독. 그녀는 오늘도 무대가 아닌 책상에서 또 다른 춤을 추고, 꿈을 채운다.모든 것에 집착을 버리고 그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때 나다운 삶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요. 성공이라는 방향을 정해 놓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씩 착실히 걸어 나가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1959년 일본 교토 출생. 1968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1996년 국립발레단 최연소 단장 겸 예술감독 1999년 스위스 로잔 국제발레콩쿠르 한국인 최초 심사위원 2001년 성균관대 무용학과 겸임교수 2004년 정동극장 극장장 2005년 문화예술체육상, 러시아 ‘브누아 드 라 당스’ 한국인 최초 심사위원 2008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현), 파라다이스상 문화예술부문상글 김지연·사진 이승재 기자 jykim@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