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신영옥

iss Shin, Follow me.”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객석에 앉아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을 보고 있던 신영옥을 누군가 불러냈다. 공연의 조감독이었다. 그를 따라 구불거리는 어두운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공연의 2막이 올랐을 때, 그녀는 질다가 돼 있었다.신영옥이 화려하게 데뷔한 공연이자,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운명의 오페라 ‘리골레토’. 그녀의 역사적인 질다는 대타로 시작됐다. 당시 질다 역을 맡고 있던, 잘나가는 한국 소프라노 홍혜경이 갑자기 컨디션 난조를 보이며 1막밖에 공연을 할 수 없게 된 것. 평소 리골레토를 보며, 선배의 질다를 보며 ‘나도 한번 해봤으면…’이라고 바랐던 신영옥에게 황금과도 같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얻을 자격이 있는 법. 동경하던 무대의 하고 싶던 역할이라 수없이 연습하고 모든 곡을 다 외우고 있었기에 그녀의 갑작스러운 데뷔가 가능했다.“질다 드레스와 가발을 대충 하고는 무대로 나갔죠. 너무 당황해서 신발도 신지 않고 나갔어요. ‘더도 덜도 말고, 그동안 내가 공부한 걸 최선을 다해 발휘하자! 하느님, 절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무대로 나갔습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무대가 너무 커서인지 사람들이 콩알 만하게 보였어요. 하지만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무사히 무대를 마쳤죠.”신영옥은 아름답고 슬픈 질다를 소름끼치도록 잘 소화해냈다. 이후 홍혜경의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아 신영옥이 그 역할을 맡아 하게 된다. 마지막 날 공연은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으로 생중계됐다. 세계 음악계에 소프라노 신영옥을 알리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세계의 언론은 신영옥의 ‘질다의 아리아’를 두고 ‘깨끗한 고음 처리와 섬세한 감정 묘사가 돋보인다’고 극찬했다.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흘러 신영옥은 명실 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이 가장 아끼는 소프라노로 성장했다. 세계적인 리릭 콜로라투라로 평가받는 신영옥은 그동안 드라마틱한 발성과 연기가 요구되는 비극적 운명의 여주인공 역으로 맹활약해 왔다. 맑고 아름다운 음성과 기품 있는 외모로 클래식 애호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신영옥은 뉴욕 파리 런던 캐나다 칠레 이탈리아 중국 베이징 등 전 세계 오페라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그리고 올해 데뷔 20년을 맞아 좀 더 대중 속으로 파고 들 수 있는 음반을 가지고 우리 곁에 찾아왔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음악에 신영옥만의 색깔을 입혀 낸 ‘시네마티크(Cinematique)’가 그것. 이를 위해 내한한 신영옥을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처음엔 영화 음악 말고 여러 방면으로 할 계획이 있었어요. 그런데 라크메 피가로의 결혼 등 오페라에서 직접 불러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음악들이 영화 속에도 나오고 그 외 좋아하는 영화 속에 나온 음악들을 모아보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시네마티크를 만들게 됐어요.”평소 스티븐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이나 최근의 ‘다크 나이트’까지 다양한 영화를 섭렵하고, 좋아했던 신영옥에겐 당연한 선택이었다.“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피가로 결혼의 ‘편지이중창’이에요. 물론 모든 분들이 좋아하는 넬라 판타지아도 좋기는 하지만 편지이중창이 유독 정이 가네요. 피가로의 결혼이 제가 오페라를 데뷔했던 작품이기 때문일 거예요.”신영옥은 음악 인생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 이럴 때 쓰는 것인가 보다. 그녀는 1965년 갓 네 살이 됐을 때 KBS 어린이 합창단에 최연소로 입단하는 기록을 세웠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리틀엔젤스 예술단원으로 선발돼 11세 때부터는 해외 공연을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유명 인사들을 만났죠. 당시 저와 함께 활동하던 단원들이 지금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맹활약 중이에요. 유니버설발레단의 문훈숙 단장과 사물놀이로 유명한 김덕수 교수죠. 당시 활동이 지금의 저에게 자양분이 된 것 같아요.”어려서부터 유독 큰 소리로 울었던 꼬마를 지금의 디바로 키워낸 것은 호랑이 같던 그녀의 어머니였다. 세 딸 중 막내인 신영옥이 유난히 목소리가 맑고 곱다는 것을 발견한 어머니는 그녀를 성악가로 키우기로 마음먹고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토대로 문턱 높기로 유명한 줄리아드 음대에 무사히 안착한 신영옥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냈다. 짧은 영어 실력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그녀를 더욱 소극적으로 만들었고, 향수와 불안감은 유학 생활을 위기에 봉착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가 유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자상하고 세심한 어머니의 사랑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저를 평할 때 ‘비극에 어울리는 프리마돈나’라고들 하죠. 유독 죽는 역할을 많이 하고 비련의 여주인공 역을 잘 소화해냈기 때문일 거예요. 그건 아마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노래에 투영됐기 때문이겠죠. 데뷔하고 3년 정도 됐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항상 호랑이같이 엄격했던 어머니였기에, 당신의 부재가 제게 더 크게 다가왔어요.”생전의 어머니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그녀는 지난 2000년, 찬송가 음반을 내기도 했다. 수록된 모든 곡들이 제각기 다른 감동으로 가슴에 저며 오는 건 그녀의 오랜 신앙 생활과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신영옥은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데뷔 시절처럼 자신을 단련한다. 나이나 경력으로 볼 때, 그녀는 지금 대학 교수를 해야 마땅하지만 여전히 레슨을 받는 중이다. 세계 최정상에 있지만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 때문이다.지난 3월에 했던 미국 볼티모어 오페라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주인공 줄리엣 역을 맡았을 때는 새벽 4시까지 연습하곤 했다. 날마다 대본에 밑줄을 치며 공부하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도 열심히 모니터링했다. 줄리엣이 단도로 자살하는 마지막 장면에선 극에 몰입한 나머지 너무 세게 찔러 진짜 피가 나기도 했다. 그 열정이 통했는지 관객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평소 아시아 성악가에 대해 선입견이 있던 예술 감독도 신영옥에게만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가 만약 음악을 하지 않았더라면 인테리어 디자이너 또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을 것 같아요. 지금도 그쪽으로 관심과 취미를 가지고 있고요. 하지만 제게 음악이란,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힘’이고 생명이죠. 노래는 100% 천직이에요. 예순이 넘어서도 노래할 겁니다.”성악가로서 최전성기인 40대를 살아가는 신영옥은 이제 후학 양성에도 물심양면 관심을 쏟고 있다. 선화예고 1회 졸업생인 그녀는 지난 2002년에 모교에 장학금을 기탁하고 2년마다 ‘신영옥 성악콩쿠르’를 통해 후배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데뷔 20주년을 맞아 그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 중인 그녀의 모습은 국내 클래식 애호가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팬들에게 꿈과 희망이 된다.그녀의 목소리와 행보에 거는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1961년생. 줄리아드 음악학교.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주역 가수(현). 2008볼티모어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2007제62회 유엔의 날 기념 음악회 신영옥 & 정명훈 & 서울 시향2005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가면무도회’ 외 2004세종문화회관 신영옥&시크릿가든 협연2003바스티유 오페라 ‘연기의 사나이, 페렐라’ 2002볼티모어 오페라 ‘루치아’ ‘라끄메’, 도이치 오퍼베를린 ‘피가로의 결혼’ 2001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가면무도회’, 스페인 테네리세 ‘캐플릿가와 몬테규가’2000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리골레토’ 등 다수1995대통령 문화훈장 수상1992난파음악상 수상1990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 우승, 올가 쿠세비츠키 콩쿠르 우승 로렌 자커리 콩쿠르, MEF 콩쿠르 우승 1989플로람 콩쿠르 우승 1988콜로랠리 콩쿠르 우승1978동아콩쿠르 우승글 김지연·사진 이승재 기자 jykim@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