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 태조 왕건은 후대 임금들과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열 가지 유훈인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불교를 믿고 진흥시킬 것(제1조)과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성대하게 치를 것(제6조)을 당부했다. 연등회는 신라 진흥왕 때부터 시작된 행사다. 매년 초봄(1월 15일, 후대에는 2월 15일)에 연등을 켜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고 국태민안을 빌었다. 성종 때 최승로의 건의로 중단됐으나 현종 때 거란이 침입하자 다시 거행해 고려 말까지 이어졌다. 팔관회는 토속신(산신, 용왕)에 제사 지내며 왕실의 안녕을 빌던 의식으로 매년 가을(10월 15일)에 거행했다. 이러한 행사에서 진다(進茶)의식은 필수적이었다. 궁중 행정 기관인 다방(茶房)이 주관해 임금께 차를 올리고 임금은 태자와 문무백관들에게 차를 내렸다.궁중의 의식은 크게 길·흉·빈·군·가례(吉·凶·賓·軍·嘉禮)의 다섯 가지로 길례는 국가적인 제사이고 흉례는 상례, 빈례는 연회와 접빈의식, 군례는 군사의식, 가례는 혼례의식을 말한다. 이런 궁중의 모든 의례에는 진다의식이 행해졌다.흉례에는 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가 있었다. 죄인에게 사형(死刑)을 결정하기 전에 임금과 신하가 함께 모여 차를 마시며 다시 한 번 신중하고 공정한 판단을 하기 위한 의식이었다.차를 마시고 참형에 처할 자들에 관용을 베풀어 유배를 보내고 꼭 참형에 처할 자만 붉은 붓으로 표시하라는 뜻에서 거행됐다.고려시대 때 차는 중요한 국가적인 예물(禮物-貢物)이었다. 정종 4년(1038)에는 거란에, 인종 8년(1130)에는 금나라에, 충렬왕 18년(1292)에는 원나라에 각각 조공과 함께 차, 다포(茶布), 향차(香茶) 등을 예물로 보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차를 받기도 했다.문종 32년(1078) 때 송에 사신으로 간 안도와 진목에게 여러 신물(信物)과 특별히 용봉차(龍鳳茶) 10근을 보내왔다. 용봉차는 송나라 특산의 고급 덩이차로 황제를 위한 차였다. 생산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늘 사용할 수 있었다.차는 왕의 중요한 하사품이었다. 성종 8년(989)에 최승로가 죽자 왕은 차 200각을 부의품으로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내사령 최지몽이 죽었을 때에 200각, 평장사 최양에게는 1000각, 내사령 서희와 시중 한언공에게 각각 200각씩을 부의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차는 좋은 하사품이었다. 태조 14년 (931)에 “백관에게 비단을, 군인과 백성들에게 차와 복두를, 승려들에게는 차와 향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려사 제2권)고려 초기의 선비 이자현(1061~1125)은 권문 세도가 이자연의 손자이자 이자경의 사촌이었다. 호는 식암(息庵) 청평거사(淸平居士), 시호는 진락공(眞樂公)이었다. 과거에 급제해 대악서승이 됐으나 29세의 젊은 나이에 속세의 부귀영화를 떨치고 청평산에 들어가 문수원을 수리해 기거했다. 채식과 베옷으로 선(禪)과 도를 즐기며 소요했는데 예종이 차, 향, 금, 비단을 하사하며 여러 차례 나오도록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평소 그대 보기를 원하여 그리움이 날로 더하네. 어진이의 뜻을 빼앗기 어렵지만 내 그리움 어이할까?”예종의 간절한 시 한 수를 내리자 선생이 곧 나왔다.왕이 말하기를 “덕 있는 노인을 사모해 보고 싶은 지 오래니, 신하의 예로서 만날 수 없다”고 하며 전각에 올라 절하게 했다. 자리에 앉히고 차를 나누며 조용히 얘기하고 삼각산 청량사에 머무르도록 명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양생의 요결을 물으니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하니 왕이 칭찬하며 더욱 후대했다.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차, 향, 법복을 은총으로 내렸다.(고려사 95권, 고려사절요 8권)농림부 지정 대한민국 녹차 명인쌍계제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