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벌 금융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의 금융사들은 사상 초유의 연쇄 도산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미 베어스턴스가 망한 데 이어 또 다른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유동성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법원에 파산 신청을 냈다. 메릴린치는 뱅크오브아메리카에 인수됐으며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는 정부의 긴급 구제금융으로 수명을 이어가는 처지가 됐다.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이 드러나며 “누구든 망할 수 있다”는 공포가 독버섯처럼 금융시장을 강타했다. 공포는 집단행동을 야기한다. 극장에서 “불이야”라고 외치면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출입구로 몰려 사고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신용 공황이 빚어지며 은행 간 자금 거래조차 사실상 중단될 정도였다. 자금 흐름을 중개하는 금융의 본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대신 안전 자산에만 돈이 몰려 금값이 치솟았다. 자금이 단기 부동화되면서 수익률이 사실상 제로인 3개월짜리 미국 국채에 돈이 몰리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머니마켓펀드도 수익률이 마이너스를 기록, 자금이 유출되는 일도 벌어졌다.유동성 위기에 몰린 금융사에 대한 개별 구제금융이나 대규모 시중 유동성 지원만으로 금융 위기가 해소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미국 정부는 금융시장과 부동산 시장을 동시에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게 됐다. 주택시장과 금융시장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전문가들은 금융 위기의 진원지인 주택 시장이 안정되지 않으면 금융 위기가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CNN머니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주택 가격은 1996~2006년 사이에 무려 85%나 급격하게 치솟으면서 거품을 형성했다. 이 거품이 터지면서 지속적인 가격 조정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이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도 “주택 시장 조정으로 인해 미국 경제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며 “이 문제가 해결돼야 미 경제와 시장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주택 시장 거품 붕괴에서 비롯된 신용 경색은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만들고, 더 많은 금융 회사들의 지급 불능 사태를 야기해 경제를 악화시킨다. 불안한 은행과 투자자들이 점점 더 대출과 투자를 꺼리게 된다.투자은행 모건 키건의 케빈 기디스 이사는 “집은 구매자가 있어야 하고 구매자는 돈이 필요한데 금융시장의 돈줄이 점점 마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코노믹사이클리서치사의 락시만 아추탄 이사는 “금리가 떨어졌어도 기업과 개인이 돈을 빌리기가 더 어려워졌다”며 “최악의 상황은 아직 지나지 않은 것 같다”고 우려했다. 곧 출간될 ‘국가를 구제하라(Bailout Nation)’는 책의 저자 배리 리톨츠는 “주택 가격이 정상화되기 전까지 시장에 원하는 만큼 돈을 쏟아 부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주택 시장이 계속 하락하면 미 금융사들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대출채권(주택담보대출) 등을 모아 유동화한 신용 파생상품인 부채담보부증권(CDO)의 가치가 뚝뚝 떨어진다. 또 파산 위험을 보증한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사업에서도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CDS 시장 규모는 2000년 9000억 달러에서 2007년 45조5000억 달러로 급팽창했다. 미국 증시 시가총액의 2배 규모다. 게다가 CDS는 모든 금융사들이 복잡하게 엮여 있어 한 금융사의 도산이 다른 금융사의 도산으로 번질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상품 구조가 복잡해 어느 상품에 어느 정도의 위험이 내포돼 있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게 요즘 미국의 금융시장이다. 최근 미국 최대 보험사인 AIG가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 것도 CDS를 많이 판매한 결과로 볼 수 있다.주택 가격이 하락하면 금융사의 디레버리지 과정은 계속돼야 한다. 디레버리지는 레버리지의 반대 개념으로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빚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는 헐값에 자산을 팔아야 한다. 금융사들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금융사의 디레버리지와 경제 침체에 따른 소비 위축이 바로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실업률 증가에 따른 소비 위축과 주택 경기 하락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로 미국 증시에서는 국제 유가 하락도 더 이상 호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8월 미국 실업률은 6.1%까지 치솟았다. 실업이 늘면 수요가 줄고 경기는 침체의 늪으로 빠질 가능성이 커진다. 월가 일각에서는 미국의 3분기 소비가 감소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현상은 1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미국 연방정부가 신용 공황으로 치닫고 있는 금융시장을 구제하기 위해 금융사들이 보유 중인 모기지(주택 담보) 관련 자산을 매입하는 기구를 설립하기로 한 것도 금융권의 디레버리지 활동을 돕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헨리 폴슨 미 재무부 장관은 9월 18일 상하원 의원들과 긴급 회동을 가진 직후 가진 브리핑에서 “이번 금융 혼란은 부동산 가격 조정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라며 “문제의 핵심을 근본적으로 풀 수 있는 신속한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미국 정부는 1989년 발생한 저축대부(S&L)조합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리신탁공사(RTC)와 비슷한 기구를 설립, 일정 기간 동안 경매 방식으로 금융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모기지 관련 악성 자산을 매입하게 된다. 금융사들 입장에서는 할인된 가격이지만 회계 장부에서 악성 자산을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모기지 대출자들도 채권이 정부 소유로 넘어간 만큼 대출 조건 등을 재조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되면 대출 상환 불이행에 따른 차압이 줄어 주택시장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롬바드스트리트리서치의 다이애나 초이레바는 “미국은 과잉 부채로 시달려온 만큼 당분간 디레버리지 과정을 거치는 동시에 금융 영역이 축소돼야 한다”고 말했다.이런 과정은 상당한 고통이 수반된다. 투자는 물론 고객에 대한 대출도 꺼리게 된다. 세계 금융시장이 불확실성에 대한 관용을 잃은 것이다. 예전에는 불확실성에 대한 리스크를 투자의 기회로 봤다. 하지만 이제는 작은 불확실성이라도 무조건 피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다. 한국 정부가 최근 자신 있게 외평채를 발행해 9월 위기설을 불식하겠다고 했지만 시장에서 예상보다 높은 가산 금리를 요구해 결국 발행을 연기한 것도 이런 시장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개발도상국 금융사들이 월가에서 돈을 빌리기도 그만큼 어려워졌다. 단기로 급한 돈을 빌릴 뿐 장기 차입 시장은 사실상 막혀 있다.시장이 불안할수록 안전 자산 선호 현상이 뚜렷해진다. 전 세계 투자자들은 달러와 금을 사들이고 있다. 미국 주택 시장이 바닥을 칠 때까지 지켜보자는 취지다. 미국 주택 가격은 최고 수준을 기록했던 2006년과 비교해 16%가량 떨어졌다. 일각에서는 추가로 10%가량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전망대로라면 미 금융사들은 계속 자산을 처분하면서 사투를 벌여야 한다. 현재로서는 승자가 따로 없다. 살아 남아야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른바 생존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누가 승자가 될지,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금융사 간 어떤 짝짓기가 이뤄질지 주목된다.이익원 한국경제신문 뉴욕 특파원 iklee@hankyung.com